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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02화 (602/1,064)

602화

“…….”

검을 털어 칼날에 묻은 피를 떨쳐냈다. 그러자 찝찝한 기분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피를 보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니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똑같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그에게 있어서는 전혀 달랐다.

“곧 경비병이 올 겁니다. 지금 바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래.”

살짝 흘러내렸던 복면을 다시 올려 쓰고 창문을 넘었다. 함께 온 수하들처럼 높이 뛰지는 못하는 대신, 그의 몸놀림에는 은밀한 기교가 섞여 있었다. 그것을 그의 수하도 느꼈는지, 빠르게 내달리는 와중 슬쩍 물었다.

“예전에 이런 일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도망자로 살았던 때가 있다.”

옛 주인의 원수를 갚고자 눈이 뒤집혔던 때. 지금보다 한참 젊었던 시절에는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해야 했다.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머리는 잊었다. 하지만 몸은 잊지 않았다. 그동안 테리브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보람이 있다.

“대장님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그랬다면 너희가 불안해하지 않았겠나.”

“…….”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에 입을 꾹 다문다.

충성스러운 녀석들은 아니지만, 이해한다. 한 번 버림받은 과거가 있는 자들은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이렇게 솔직하기라도 한 것이 어디인가.

“오늘 이후로 한동안은 바깥출입을 삼가야겠군요.”

“아니. 평소처럼 한다. 갑자기 활동을 줄이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사게 될 테니.”

비밀리에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할지라도, 크렘보르 가문이 움직이는 정보 조직이 있다는 사실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활동을 줄인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둠 속을 소리 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집결 장소였다. 눈에 띄지 않는 자그마한 건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이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대장님.”

“문제는 없었나?”

“예. 호위가 있긴 했습니다만, 소란스럽지 않게 끝냈습니다.”

그날 밤. 열여섯 사람이 죽었다. 그중 셋의 죽음으로 인해, 다음 날 아침 캄브라이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 * *

“암살. 암살이라니.”

청아한 인상의 미부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벌써 몇 번째 되풀이하는 말이었지만 누구 하나 그 점에 대해 짚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녀의 독백에 혹 잡음이라도 섞일까 싶어 숨소리조차 최대한 죽였다.

“감시는 철저히 했습니다. 지난밤에 움직인 자는 없습니다.”

각진 턱의 중년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 있는 말은 왠지 모를 신뢰감을 주었지만 귀부인은 그의 말에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움직인 자가 없는데 왜 세 사람이 죽었겠습니까?”

“로드니 공자에게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수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수하가 아니라 뭐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있는 게지요. 그게 아니라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판니른에서 살수들을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귀부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놈이 쉽게 당해주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놈은 이제 가주마저 안중에 없는 것 같아요.”

분노에 가득 찬 귀부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중년인은 속으로 달리 생각했다.

‘가주마저 안중에 없다? 글쎄.’

막다른 곳에 몰린 절박한 선택이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썩 나쁘지는 않다. 물론 이 일로 가주는 크게 분노할 테고, 그의 마음속에서 로드니 캄브라이는 더더욱 후계자의 자리로부터 멀어지겠지만 그렇다고 뭔가 제재를 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증좌가 없을뿐더러, 제재를 가하려고 해도 마땅한 것이 없다. 이미 판니른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거기서 뭘 더 손을 쓸 수 있을까. 기껏해야 이곳에 남은 로드니 캄브라이의 사람들을 견제하는 정도겠지. 그마저도 직접 손을 쓰지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둘러서 해야 할 것이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 숨겨둔 한 수는 있었다는 게지.’

수하인지 동맹인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이번 일로 로드니 캄브라이는 자신의 저력을 보였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테리브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과시한 것이다. 이 일로 그의 세력은 결집할 것이고, 이쪽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로드니 캄브라이의 숨겨진 칼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주께서는 소식을 접하셨습니까?”

중년인의 물음에 귀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귀부인이 근심 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기력이 상해 있는데, 이런 소식을 들었다가는 다시 몸져누울지도 몰라요.”

“알리지 않아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먼저 아뢰시지요.”

“…예. 그래야지요.”

“가주님의 병세에 차도는 없으십니까?”

“가주의 병은 세월이 내린 것입니다. 세월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전의 신관들은 물론, 용하다는 의사는 어떻게든 불러서 가주의 병세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다. 조금 좋아졌다 싶은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얼마나 갈까.’

가주가 최대한 버텨줘야 한다. 아직 둘째 공자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러다가 당장 내일이라도 가주가 죽어버리면 어찌합니까.”

“그리되지 않게 하려고 몸값 비싼 신관과 의사들을 종일 상주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악몽을 꿨어요. 율리안이, 내 아이가 울면서 어미를 찾더군요. 내가 놀라 달려가 율리안을 안고서 달래주고 있는데, 그놈이 우리 모자 앞에 검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르겠어요.”

귀부인이 손을 뻗었다. 매끄러운 손가락이 중년인의 볼을 쓸었다. 그러자 중년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서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당겨 귀부인을 품에 안았다.

“큰일을 앞두고 있으면, 의심이라는 놈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무슨 의심이죠?”

품속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는 가냘픈 여인이었다. 중년인은 그의 가슴에 닿는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지요. 미래에 대한 의심. 확신에 대한 의심. 두려움에 대한 의심.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인간의 마음은 생각처럼 강하지 않기에 매 순간 균열이 가고, 의심이라는 놈은 그 균열을 타고 흘러들어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굳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쫓겨서 내린 판단은 잘못된 것일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때로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에는 그놈에게 한 번 당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한참 앞서 있습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놈에게 크게 한 방 먹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하지 않는 것.”

중년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영명하십니다.”

그 미소를 본 귀부인은 비로소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중년인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공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이 사단이 일어난 것도, 놈을 너무 몰아붙인 탓이겠죠.”

“…….”

“사람들을 단속해야겠어요. 이번 일로 흔들리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뜻대로 하십시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먹이를 보채는 아기새처럼, 눈빛으로 갈구했다.

“…….”

중년인은 올려다보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 * *

“니클라스 공이 기대한 것보다 잘해줬군요.”

테리브란과 하잘에서 비슷하게 소식이 들어왔다. 하나는 일을 잘 처리했다는 보고. 하나는 일을 잘 처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총독의 원조는 앞으로 할 일들에 도움이 될 겁니다.”

군터는 그런가보다, 했다. 재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에 관해서는 야스메티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것인가.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이런 처사에 대해 야스메티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군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야스메티의 능력과 충성심을 믿었다. 만약 그가 그 믿음을 배신한다면, 그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뿐.

“농토의 보급이 거의 끝나갑니다. 최대한 많은 인원에게 땅이 돌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만, 그래도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인구 과잉이다. 솔롬 인근의 농토를 거의 다 소유하고 있다지만 솔롬의 인구에다, 이번에 솔롬으로 몰려온 유민들까지 더하니 땅이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그들이 모두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달리 밥벌이를 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계획보다는 조금 빠르지만, 개척촌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봐둔 곳은 있나?”

“예. 허나 그곳을 모두 관리하려면 아무래도 병사들이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병을 말하나?”

“좋지 않습니까. 가족이 있는 자들을 병사로 뽑아서 부린다면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재정을 걱정하지 않았었나?”

“말씀드렸듯, 총독의 원조가 있지 않습니까. 덕분에 당분간은 여유가 있습니다. 원조받은 것을 다 쓸 즈음이면 벌여놓은 사업들이 자리를 잡을 테지요.”

“희망적인 전망이군.”

“파종의 시기입니다. 씨를 뿌릴 때는 거둘 것을 기대하면서 뿌리는 법이지요. 게다가, 장군의 사업에 가뭄이 들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본래라면 그를 견제해야 했을 총독은 그의 동맹이다. 판니른 굴지의 권세가인 몰던 가문 역시 마찬가지. 남은 것은 해들리르인데, 그들도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겉으로는 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

어떻게 보아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내년 추수기에 뜬금없이 기록적인 가뭄이라도 들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새로운 외성벽의 축조도 순조롭습니다. 성이 넓어지면 관리도 더 번거로워질 테니 일찌감치 증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하라.”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크렘보르 가문의 문장기와 적기를 든 병사들은 판니른 전역을 돌며 도적들을 소탕했고,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이 순식간에 판니른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

“혼란스러웠던 판니른의 정세가 장군의 무명 아래 나날이 안정되어가고 있습니다.”

군터가 솔롬의 성주로 부임한 이후로 줄곧 눈치를 보던 동부 3대 가문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해들리르 가문을 앞세워 접촉해왔다. 처음에 그들은 군터의 속내를 떠보려 했고, 군터가 이런저런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그때부터는 그를 회유하려 들었다. 그들이 건네는 달콤한 말과 약간의 성의들에서는 테리브란의 귀족들을 상대할 대항마로 삼겠다는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군터는 그들의 은근한 제안에 응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속을 태웠다. 물론 야스메티의 조언을 전적으로 따른 것이었다.

“장군.”

그러던 어느날.

“렌에서 기이한 소문이…….”

남쪽으로부터 들려온 기사(奇事)가 군터의 흥미를 끌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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