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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01화 (601/1,064)

601화

로드니 캄브라이는 솔롬의 소식을 접하고 길게 탄식했다, 아니 탄식이라기보다는 감탄이었다.

“돈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습니다. 솔롬에서 영향력을 굳히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은 모양입니다.”

운바소르 아실이 주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로드니 캄브라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품었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솔롬 인근의 농토를 대거 사들이고, 유민들까지 수천이 넘게 받아들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들을 모두 노역장에서 부릴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성의 혼란을 그대로 방치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래저래 돈이 나갈 터인데. 그걸 전부 감당할 수 있다고?”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저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이상하긴 하군. 파산하려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크렘보르 가문은 신생 가문이다. 군터 그자 또한 위장이라고는 하나, 맨몸으로 제국에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 사이에 재물을 모으면 얼마나 모았겠는가. 그새 뒤로 얼마나 챙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탐욕스러운 자라는 소문은 없었으니 챙겼더라도 수중에 재물이 그리 많지는 않을 터인데…….”

물론 공금으로 처리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솔롬이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성이라고는 해도 결국 일개 성에 불과하다. 그런 곳에서 재물이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는가? 더군다나 대대적으로 군비까지 증강하던 참이다. 강요한 ‘후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액수가 2만 군대를 모두 책임질 수는 없을 테니 아물 생각해봐도 솔롬의 일을 처리하기 위한 재물이 나올 구석은 없다.

‘의욕은 알겠지만, 역시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로드니 캄브라이의 생각은 얼마 후에 접한 또 다른 소식, 솔롬의 새로운 성벽이 지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경솔한 사람은 아니라고 보았는데…일가를 이루어서인지 너무 마음이 앞서는군.’

조금 실망스럽기는 했으나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무리를 하면 재물이 부족해질 테고, 그러면 자연히 손을 벌리게 될 것이니 적당하게 원조를 해주면서 다소 대하기가 어렵던 솔롬 성주를 그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옵고…본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평온하던 로드니 캄브라이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던가?”

“저들의 야료가 한층 더 극심해졌다는군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로드니 캄브라이가 봉인된 서신을 받아들었다. 봉인을 뜯기도 전에 이미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 감정은 서신을 읽는 내내 더 심해지다가 다 읽고 나서는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

“빌어먹을 년 같으니.”

아무리 친모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아비의 아내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운바소르 아실은 익숙한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릅니다. 대처를 해야 할 듯싶습니다만.”

“어떻게 말인가?”

로드니 캄브라이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처를, 아니 반격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라고 해서 모르겠는가? 저들이 설쳐대면 설쳐댈수록, 그리고 이쪽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대세는 기운다. 눈치를 보고 있는 이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며, 지금은 그를 따르고 있는 이들 역시 불안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세력의 결집이 깨지면 남은 것은 몰락뿐.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어쩐단 말인가? 그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은 개 같은 년의 수작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그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면서도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 때문이었다.

“시간이 부족해. 시간이…….”

테리브란에서 한참 떨어진 판니른으로 유배되었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않고 재기와 복수를 꿈꿨지만, 상대는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답답하구나.’

아무리 웅대한 뜻을 품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고 한들 그것을 준비하고 이룰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무소용이다.

“…….”

주인의 안색이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운바소르 아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가주께서 각하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면서도 이곳으로 보내신 연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버님께서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느냐 이 말인가?”

로드니 캄브라이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으나, 그의 수하가 굳이 그를 화나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그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았다.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첫째. 트집을 잡히기는 했지만 그 빌미라는 것이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둘째. 장자가 죽은 마당에 차자인 그마저 없어진다면 후계가 불안해진다. 말하자면…….

‘나는 보험인 셈이지.’

미우나 고우나 둘뿐인 아들이다. 그렇게 물고 빠는 막내가 장성했다면 모르겠으나, 녀석은 아직 어리다. 물론 그 어린놈의 뒤에는 간사한 계집년이 있다지만…크게 봐야 하는 가주의 입장에서는 감정과 이성을 분리해야 했을 터.

“가주님은 각하를 탐탁지 않아 하시지만, 그분께서는 절대 각하를 치시지 못합니다. 각하께서 도저히 넘어가기 힘든 대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각하. 조금 더 대범해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각하께는 다른 시간이 있습니다.”

다른 시간이라. 모호한 말이지만 앞서 들은 말이 있기에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쉬웠다.

“발각되지 않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수가 있겠나? 본가는 저들의 손에 들어갔다.”

“전부는 아니지요.”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저들의 시야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손은 빌리면 그만입니다.”

“빚을 지라는 말인가?”

“빚을 지는 것이 꺼림칙하시다면 거래는 어떻습니까?”

“거래라…….”

단어 하나를 바꾼 것에 불과하지만,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건 나쁘지 않지.”

* * *

하잘에서 사자가 왔다. 총독의 명을 받고 온 자이니 총독의 말을 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가 전한 말은, 아니 서신의 내용은 정말 뜻밖이었다.

“이 내용에 대해 알고 있나?”

“소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서신을 장군께 전하라는 명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주눅 든 기색이 역력한 사자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럴 줄 알았다. 서신의 내용을 모르니 저렇게 얼빠진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서신의 내용은, 심각하다면 심각한 것이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을 이런 허술한 자를 통해 전한 것은, 이런 자이기에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알겠다. 쉴 곳을 내줄 터이니 이만 물러가라.”

“예.”

사자를 내보낸 군터는 그 즉시 야스메티를 호출했다.

“찾으셨습니까.”

공무를 보다가 불려온 야스메티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에게 군터는 들고 있던 로드니 캄브라이의 서신을 던져줌으로써 설명을 대신했다.

“…거 참. 어지간히도 급하긴 급한가 봅니다.”

서신을 읽는 것은 금방이었다. 야스메티는 곧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리한 부탁이다. 그렇지 않나?”

“무리한 부탁이면서…신뢰의 표현이기도 하지요.”

“신뢰?”

군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야스메티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이 서신이 테리브란의 캄브라이 가주에게 들어가면 어찌 되겠습니까? 총독은 저 스스로 자신의 목줄을 장군께 드러낸 셈입니다.”

“그래서, 들어줘야 한다고 보는가?”

“으음. 글쎄요.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그러는 것이 좋겠지만, 장군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쉽지 않은 문제가 아닙니까. 더군다나, 총독이 장군께 목줄을 보였다지만…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부터는 장군의 목줄도 저쪽에 드러나는 셈이 됩니다.”

“캄브라이 가문과 척을 지기 때문인가.”

“좋게 보자면, 장군께서 이번에 그의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그와의 동맹은 더욱 확고해질 겁니다.”

“해야 한다고 보는 게로군.”

“테리브란에는 니클라스 공이 있습니다.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니클라스는 암살자가 아니야.”

“그는 그럴지 몰라도, 그의 수하들은 밤에 일하는 데 익숙합니다.”

수인병들을 이름이다. 그들의 날랜 몸은 남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데 큰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 그간 이것저것 은밀한 일을 하며 쌓은 경험도 있으니, 그들은 지금도 훌륭한 암살자일지 모른다.

“…….”

야스메티는 할 것을 권한다. 군터의 마음도 이미 기운 상태였지만, 그는 바로 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며 생각했다.

중요하고 위험한 일이지만, 그리 어려운 일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다. 야스메티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목줄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서로의 약점을 쥔 동맹은 이전보다 굳건해질 테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터.

사실 거절해도 된다.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총독과의 사이가 서먹해지겠지만, 그럼 뭐 어떤가. 총독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 그는 마음을 달리 먹지 못한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다.’

결국, 잘못되었을 때의 뒷감당이 문제다. 캄브라이 가문과 그 동맹들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게 두려운가? 하고 묻는다면…….

‘전혀.’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런 생각 자체에 강한 반감이 든다. 캄브라이가 아니라 제레이스라도 마찬가지.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 어째서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 해야 하는가?

“니클라스에게 사람을 보내라.”

총독에게, 로드니 캄브라이에게 확실하게 빚을 지워둔다. 재정이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원조를 운운하는 것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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