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야스메티는 아낌없이 돈을 풀었다. 농토를 사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솔롬의 성벽을 확장하기까지 했다. 기존 이중 성벽을 삼중 성벽으로 넓히는 식이었는데, 여기에 농토를 사들일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갔다. 어느 정도였냐면, 살라스와 토어릭이 찾아와 우려를 표할 정도였다. 살라스는 그렇다 치고, 야스메티와 죽이 잘 맞는 토어릭마저도 이래도 되는 건지 걱정스럽다고 말할 정도로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다.
군터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야스메티에게 전했다. 그러나 야스메티는 걱정 없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려는 이해하나, 필요한 일입니다. 솔롬은 성치고는 꽤 큰 편이지만, 동부의 심장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상주인구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유동인구까지 더 늘리려면 그럴듯한 도시 규모는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그리 큰 손해는 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무슨 소리지.”
“보수는 일당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솔롬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그동안 돈을 쓰지 않겠습니까.”
공사는 고되다. 먹고 자는 것만으로는 그 고단함이 풀리지 않을 테니, 자연히 그 이상을 바라게 될 터. 그들이 고단함을 풀기 위해 푸는 돈은 고스란히 솔롬의 수입이 되며, 나아가 솔롬의 성주인 군터의 수입이 된다. 물론 전부 돌아오지는 않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솔롬이 번영하고 커질수록 크렘보르 가문의 성세 역시 커진다.
“재물을 가만히 금고에 두면 먼지만 쌓일 뿐이지만, 미래의 더 큰 가치에 투자한다면 또 다른 빛을 보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불안해하는 녀석들에게 해주지 그랬나. 그랬다면 번거로울 일도 없었을 터인데.”
“지금도 충분히 많이 나서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이상 제가 나대게 된다면 반감을 살 겁니다.”
“그럴 리가.”
“장군. 장군 휘하의 무관들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특히 장군과 오랜 세월 함께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이들의 경우에는 그 자부심이 더 강하지요. 그들은 칼 한 자루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자가 자신들의 위에 있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제가 장군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하지요.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 그들은 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
“장군은 모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장군께 철저하게 충성하고 복종하니까요. 그들이 머리로나마 저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 역시 장군이 저를 총애하시고, 높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건 몰랐군.”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기에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야스메티의 말처럼 그의 수하들은 그에게 절대복종하였으니까. 그들은 무슨 명령을 내리든 충실히 이행했고 불만을 가지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수하들을 너무 쉽고 간단하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말로 해서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군.”
칼잡이들에게는 칼잡이 특유의 자부심이 있다. 내 힘으로 죽음을 물리치며 살아왔다는, 어찌 보면 유치한 마음이다. 그러나 생사의 기로를 숱하게 건너온 자의 눈에, 그런 경험이 없는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오만이라는 짧은 한 마디로,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수는 없다. 군터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렇기에 야스메티의 말에 조금은 진지해졌다.
“걱정마십시오 장군. 잊으셨습니까? 저 또한 초원에서 나고 자란 몸입니다. 전사들의 자부심은 익숙합니다. 그들에게 무시를 받는 것 또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이해합니다. 물론 언젠가는 고쳐져야 할 일이겠으나, 그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봐야 할 문제입니다.”
야스메티의 깡마른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장군께서 중간에 계셔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장군께서 제게 힘을 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려갈 테니까요.”
“…살라스와 토어릭에게는 말해두지.”
“뜻대로 하십시오.”
* * *
솔롬의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사방에서 몰려온 유민들이 솔롬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솔롬은 도시도 아니었고,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는 성이었으나 그들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도적들의 칼날에서 그들을 지켜줄 힘이었다. 그런 면에서 솔롬은 그들이 바라는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낮은 세율로 빌려주는 농토, 그리고 판니른의 방위군을 통솔하는 군단장이 거하는 성.
“제가 보건대, 백성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살게 해줄 권력자를 갈구합니다.”
야스메티가 말했다.
“그게 어려운가?”
“어렵지요. 대개 권력자는 욕심이 많으니까요. 그들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짜낼 수 있는 도구로 여깁니다.”
“…….”
“그러나…욕심이 많은 것은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말장난 같군.”
“송구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다. 백성들이 살고자 하는 것은 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허나 막상 원하던 대로 살만해지면, 그때부터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불만을 품겠지요.”
“얻는다면 더 많은 것을 바랄 테고?”
야스메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발전의 동력이 되나, 동시에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할 터.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군요.”
야스메티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꼭 그 두 개 중 하나여야 하는 걸까.
‘생각이 너무 많아. 녀석다운 것이지만.’
철학적인 의문은 갖지 않는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한다. 그뿐이다.
“근래에 성내가 꽤 시끄러운 모양이더군.”
유민들이 수천이 훌쩍 넘게 몰려들었다. 며칠 후에는 만을 넘을지도 모른다. 미리 설정해놓은 거주지구에 몰았다지만 그들이 거기에 가만히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니 성내에서 이런저런 소란이 생기는 것은 필연이었다.
바로 엊그제. 살라스가 치안대의 확충을 요청했다. 매사에 신중한 살라스인 만큼, 그가 확충을 요청했다는 것은 현재의 인력으로는 슬슬 관리하는 데 무리가 오고 있다는 뜻일 터.
“어려운 일이지요. 성 밖에 개척촌을 만들고 그곳에 유민들을 모는 것도 방법입니다만…그래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질 겁니다.”
소란이 일더라도 직접 손을 댈 수 있는 곳에 두고 보는 것이 낫다는 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야스메티가 그렇다고 한다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터.
“시끌시끌한 것은 사실이지만, 힘에 부칠 정도는 아니다. 여차하면 본보기로 얼마 정도, 광장에서 목을 베면 되겠지.”
“하하. 너무 극단적이신 것 아닙니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조금만 더 두고 보시지요. 당장은 시끄럽지만, 이것도 다 질서가 잡히는 과정일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성에 빈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런저런 사고를 치면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새로운 성벽을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것이 없었지만, 군터는 야스메티를 여전히 신뢰했다. 그의 말처럼, 이 모든 것이 훗날을 위한 투자가 되리라는 것을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번에도 야스메티의 손을 들어주었다. 점점 커지는 수하 무관들의 불만을 억누르며, 창고에 있는 금을 아낌없이 돈으로 바꿔 솔롬에 뿌렸다. 지하의 괴물이 금을 ‘생산’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창고에 쌓아둔 금이 먼저 바닥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어차피 우연히 손에 들어온 재물이다. 창고에 박혀서 먼지만 쌓이느니 의미 있게 쓰이는 편이 더 낫다.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후트는 배급받은 빵을 품에 꼭 안고서 병사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병사는 이미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는 물러나면서도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불안한 얼굴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다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한숨을 쉬며 품속의 빵을 꺼냈다.
딱딱하다. 눈을 감고 만져보면 이게 돌인지 빵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가 상하지 않으려면 물에 담그거나, 아니면 침을 발라 불려 먹어야 한다.
우적우적
마른 입에서 억지로 침을 짜내서 빵을 씹었지만, 역시나 맛은 없었다. 씹어도 씹어도, 입안 가득 퍼지는 것은 텁텁함 뿐.
하지만 이마저도 없어서 못 먹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배급은 솔롬에 들어오고 한 달이 될 때까지만 유효하다. 솔롬에 입성하며 발급받은 호패에 칼자국이 서른 개가 그이는 순간부터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저 밖에 나가 성벽을 짓는 데 일조하든지,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구하든지.
‘일자리라…….’
어려운 문제지만, 그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중에 가족들과 헤어져 버린 것이다. 비극이었지만, 그 때문에 그는 자기 몸뚱이 하나만 건사하면 됐으니 일자리를 구하는 데 있어서 조건에 덜 구애받을 수 있었다.
‘뭘 하려고 해도…역시 제이크 패거리부터 떨쳐내야 해.’
제이크는 한 열흘 전부터 그를 괴롭히고 있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동향 사람들 대여섯과 몰려 다녔는데, 일행이 적거나 후트처럼 혼자인 이들의 호패나 배급받은 빵을 강탈해가곤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들은 후트에게까지 손을 쓰지는 않았다. 후트의 체격도 체격이지만, 사나워 보이는 인상 덕분이었다.
하지만 먹을 것을 빼앗기는 대신, 후트는 제이크에게 은근한 권유를 받았다. 자신들과 함께하자는 거였다. 그는 지금은 비록 씹기도 힘든 빵 따위나 뜯고 있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 큰소리를 쳤다.
‘자리를 잡기는 개뿔이.’
자기 나름대로는 혼란스러운 성내의 상황을 노려보겠다는 것이겠지만, 후트는 그것이 어림도 없는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제이크가 도저히 그럴만한 재목으로 보이지도 않았을뿐더러, 솔롬의 성주가 자신의 성에 새로운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어림도 없지.’
게다가, 설령 성주가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한들 제이크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벌써부터 제이크라는 이름에 이를 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갈까? 배가 점점 더 주려올수록 그들은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차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이크의 옆에 붙어 있는 대여섯 놈쯤은…….
“비켜라!”
빵을 다 먹고 나서 골목을 나오는데,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번잡스럽던 거리가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말을 탄 병사 몇 명이 오르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양옆으로는 사람들이 우르르 비켜서 있었는데, 감히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저것인데.’
군문에 드는 것.
아마도 이곳에 있는 사내들 대부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솔롬에서 가장 인정받는 것은 돈 많은 상인도, 소작농을 몇이나 거느린 지주도 아니다.
바로 저들.
성 내에서 칼을 찬 채 활보하고 거리에서 말을 달릴 수 있는, 군인들이야말로 솔롬의 사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군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