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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99화 (599/1,064)

599화

방위군 일부를 솔롬으로 소환하는 동시에 훈련 시킨 병력 일부를 판니른 각지로 파견했다. 그 과정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연스러웠다. 군터는 굳이 판니른 방위군을 장악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순조로웠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서두르지 않았기에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위군의 장교들은 새로운 질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군터는 야스메티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들 중 일부에게 서신을 보내 좋은 말로 달랬고, 앞으로도 그들의 자리를 유지 시켜줄 것을 약속했다.

“너무 무른 것이 아닌가?”

군터는 그들에게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야스메티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솔롬에 있는 자들이야 어찌 다루든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죽이거나 살리는 것까지 모두 장군의 뜻대로 하실 수 있지요. 허나 저들은 장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줄을 잡고서 장군에게 이빨을 드러낸다면 골치가 아플 테지요.”

“그래서 일단 불러들이란 말인가?”

“손을 쓰더라도 불러들이신 후에 쓰셔야 합니다. 물론, 그러지 않으시는 것이 더 좋지요. 적어도 당분간은 말입니다.”

솔롬의 군대는 항시 눈에 두고 통제할 수 있으니 장교들을 어찌 처리하든 무방하다. 하지만 솔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방위군은 그들을 지휘하는 일선 장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의 인사는 방위군단장 직을 맡은 군터의 소관이나, 어디까지나 명목상 그렇다는 것일 뿐. 강하게 나간다면 어느 정도는 뜻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 뒷감당이 문제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당근과 채찍으로써 그들을 다스리십시오.”

“당근이라.”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가 별로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야스메티가 곧바로 말을 더했다.

“장군께서는 옥석을 가리고 싶으시겠지만, 부디 얼마간은 참아주십시오. 손에 쥔 것이 모두 옥일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옥은 옥대로, 돌은 돌대로 쓰임이 있는 법이니 아름답지 않다 하여 너무 박하게 여기지는 마시기를.”

“어째서 지금 그런 말을 하지?”

“전에는 장군께서 다스리셔야 할 것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다스리는 위치에 오르셨으니 장군의 용인술 역시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에는 장군의 눈에 차는 이보다 차지 않는 이가 더 많을 테니, 눈에 차지 않는 이들을 모두 배척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군터는 야스메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좋든 싫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얼굴도 모르는 수하들을 함께 끌고 가야 한다.

“알겠다. 할 이야기는 그게 전부인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뭐지?”

“솔롬은 앞으로 크렘보르 가문의 터전이자, 판니른의 또 다른 주도가 될 겁니다. 헌데 그러기에는, 지금의 규모가 아쉽습니다.”

“주도? 솔롬은 성이다. 융성해야 할 도시가 아니라 적을 막기 위한 군사 거점이지 않느냐.”

“예. 그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은 그렇지요. 허나 지금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

“동쪽의 적을 방비하는 일은 어차피 전방의 요새들에서 결정지어질 거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굳이 솔롬이 성으로 남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장군께서는 이 성에 병사 몇천을 두느니 차라리 그들을 이끌고 나가 적과 싸우실 분이지요.”

정확하다. 공성보다는 야전이, 야전보다는 수성이 더 쉬운 것이 상식이지만 군터는 수성보다는 야전이 더 편했다. 직접 말을 타고 기병을 이끌며 적을 상대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성벽 위에서 적을 맞거나, 뒤에 숨어서 적의 공세를 버티는 것은 그와 맞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야스메티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다른 이가 솔롬의 성주라면 모를까, 군터가 솔롬을 다스리는 이상 솔롬이 가진 성으로서의 장점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솔롬을 지금처럼 성으로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판니른 동부의 심장 역할을 하는 도시로 만들어 국경의 요새들에게 보다 긴밀히 지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일리는 있다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듯한데.”

“돈을 조금 쓰시면 됩니다.”

“돈을?”

군터가 의아해하자 야스메티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군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지 않아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군터는 야스메티에게 지금 설명한 그대로 시행하라 명했다.

* * *

“지주들의 파악은 끝났나?”

“예.”

“이야기는 전했고?”

“물론입니다. 허나…….”

“뭐지?”

“팔지 않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수는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그들이 가진 땅이 작지 않습니다.”

야스메티가 알만하다는 듯 코웃음 쳤다.

“돈이 아쉽지 않은 놈들이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살아온 토호들입니다.”

“그렇다 해도, 땅을 팔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그 때문은 아니겠지.”

버틀레인이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는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야스메티를 흘깃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머리가 굴러가는 자들입니다. 대대적으로 땅을 사들인다는 소식을 접했겠고, 그 뒤에 거물이 있다는 것까지 짐작했겠지요. 한 몫 단단히 잡을 기회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대체로 부자들은 머리가 좋다. 스스로 부를 일궈낸 자라면 말할 것도 없고, 물려받은 부일지라도 그것을 이제껏 지켜냈다면 역시 머리가 없을 수는 없다.

“…어찌 할까요?”

버틀레인은 궁금했다. 이 무서운 사내가 배짱을 부리고 있는 지주들을 과연 어떻게 다룰지.

‘좋게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것은 예감이 아니었다. 반쯤은 확신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제껏 봐온 야스메티라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후한 대가로 땅을 사들이고자 했다. 말하자면 지주들을 배려해준 것이다. 하지만 일부 지주들이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니, 이제 남은 것은.

“어떤가.”

“예?”

“자네가 해결할 수 있겠나? 방법은 상관없네만.”

“그,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습니다만…어렵습니다. 지금 배짱을 부리고 있는 토호들은 보통내기들이 아닙니다.”

“흐음. 자네가 당해내지 못할 정도인가?”

“힘들 것입니다. 제 아래에도 힘쓰는 녀석들이 몇 있습니다만, 대를 이어 넓은 농토를 지켜온 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겠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무리를 한다면 어찌어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그리 해야 하는가? 무리를 하다가 자칫 일이 잘못되어 피를 볼 일이 생긴다면 그게 무슨 손해인가.

“어쩔 수 없군.”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그걸 자네가 알아 무엇하게?”

찔끔한 버틀레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불안한 눈으로 눈치를 보자 야스메티가 피식 웃었다.

“좋게 해결을 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쩔 수 있나. 거칠게 하는 수밖에.”

“…….”

짐작은 했었지만 역시다.

‘이들은 결코 얌전한 자들이 아니야.’

세간에 솔롬의 성주인 군터 크렘보르는 철저한 군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할 일에만 전념하는 모범적인 군인이라고.

‘개소리지.’

정말 그런 자였다면 솔롬에 부임하자마자 일으킨 피바람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까지는 적국과 내통한 자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암상을 이용해 아바시스와 통한 점만 보아도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꽤나 다른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지금, 대놓고 힘을 쓸 것을 암시하는 저 말은 또 어떠한가.

‘설마 대놓고 힘을 쓰지는 않겠지?’

그랬다가는 대번에 안 좋은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물론, 숨죽이고 있는 민심까지 불안하게 흔들릴 것이다. 야스메티는 머리가 좋은 자이니,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은밀하게 손을 쓴다는 이야기인데.

‘가능하지. 나를 잡아올 때 나섰던 자들만 봐도…….’

평범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그때 보았던 자들은 군문에 적을 둔 자들이 아니라 청부를 받는 암살자라 해도 믿을 만큼 은밀하고 살벌했다. 그자들이 나선다면 제아무리 방귀 좀 뀌는 토호들이라 하더라도 속수무책일 것이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군.’

버틀레인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완고하게 버티던 지주들이 땅을 팔겠다고 말을 바꿨다. 자신감과 탐욕이 이글거리던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좋아.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솔롬 인근의 농토는 이제 모두 크렘보르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야스메티는 그 땅을 농민들에게 소작 주었다. 세는 4할. 기존의 지주들이 적으면 6할. 많으면 7, 8할까지도 받던 소작세에 비하면 크렘보르 가문이 받는 것은 그 절반에 불과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농민들이 자연히 몰려들었다.

“먹고 살 정도만 내어주면 족해. 그 이상은 불가하다.”

야스메티는 그들에게 땅을 내주었다. 그러나 딱 일가족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땅만을 허락했다. 그러다 보니 농민들은 많이 몰려들었지만 땅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소문을 내라. 갈 곳 없는 자들을 끌어들이는 거다.”

판니른 각지에는 고향을 떠나와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황자들이 일으킨 전란으로 한 번, 각지에서 활개를 치는 도적들 때문에 한 번. 그들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유랑을 거듭했다.

그들 중 판니른 동부를 떠돌고 있던 일부가 솔롬의 소문을 접했다. 솔롬의 새로운 성주가 인근의 땅을 대거 사들여 백성들에게 저렴하게 소작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더불어 그들과 마찬가지인, 갈 곳 없는 유랑민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까지.

유랑민들이 하나둘씩 솔롬으로 모여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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