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역시 평범한 도적들은 아니었다. 시어문드가 이야기했던 대로, 그들은 일찍이 2황자의 군세에 속했던 군인 출신이었다. 즉, 패잔병이라는 소리다. 포로들을 심문하니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군터의 창에 꿰뚫려 죽은 귀족이 그들을 이끌던 천부장이라고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그들은 전선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2황자의 죽음 이후 그의 세력이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7황자군의 추격을 피해 일찌감치 몸을 숨겼다고 했다.
“왜 도망치지 않았나?”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망을 치려면 확실하게 남쪽, 혹은 동쪽으로 도망쳐서 7황자의 세력권을 벗어나는 것이 옳다. 판니른 내에 숨어 있어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신분을 세탁하지 않는 이상 늦든 빠르든 결국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죽은 적장은 부하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판니른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특별히 저희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숨겨놓은 가산(家産)을 찾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고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슬쩍 한 번 물으니 줄줄이 불었다. 절박하기까지 한 목소리에서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가산이라.”
“수차례 판니른을 떠날 것을 청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판니른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기 힘들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의 명에 순순히 따랐던 것은 얼마간의 단물이라도 너희에게 떨어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겠지.”
“…….”
시어문드는 입을 꾹 다문 포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속물적인 태도를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람은 다 똑같다.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일 뿐 아닌가. 본래 판니른에 군적을 두었다는 것은 그들의 삶 모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인데, 그런 삶의 기반을 버려두고 떠난다면 재물이라도 챙기고픈 것이 당연하다. 제 한 목숨 살겠다고 이제껏 따른 상관을 매도하는 것이야 조금 추하긴 해도…뭐, 죽음 앞에 초연해질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 위치는?”
“예?”
“뭘 모르는 척을 하고 그러나. 그 가산이라는 것이 숨겨진 위치 말이야.”
“그것은…알지 못합니다.”
“어허. 어찌 그러는지 모르겠군. 다 왔는데 이제 와 살길을 마다하나?”
“저, 정말입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가산에 대한 것도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추측한 것일 뿐인데, 하물며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믿고 싶군.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겠지.”
“믿어주십시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거야 확인해보면 될 일.”
두 팔과 다리가 묶인 포로가 몸부림을 쳤다. 그의 절규를 뒤로 하고, 시어문드는 차가운 인상의 병사에게 눈짓했다.
“솜씨 좀 발휘해보게.”
“어느 정도까지 허락되는지요.”
“죽어도 상관없다.”
* * *
“송구스럽습니다. 아는 바가 전혀 없더군요.”
그 숨겨진 가산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모진 고문을 가했음에도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고통에 못 이겨, 혹은 살고 싶어서 무슨 말이든 지껄이고 보는 이들이 몇 있었으나 조금 더 캐물어 보니 금방 거짓이 드러났다.
“그놈도 그게 제 목숨줄인 것을 알고 있었던 거겠지.”
비밀은 비밀일 때 가치가 있다. 창으로 찔러 죽인 이름 모를 귀족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비밀을 쥐고 있는 한, 수하들이 욕망을 잃지 않는 한, 그는 안전했을 터.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도 아쉽군요.”
“당초의 목적은 차고 넘치게 달성했으니 그걸로 됐다.”
그리고 가산이라고 해도 얼마나 되겠는가. 귀족이면서도 기껏해야 천부장에 머물렀다면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을 것이다.
“돌아가지.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겠다.”
“예.”
“그건 그렇고, 제대로 활약했구나.”
“자잘하지요. 아직 부족합니다.”
“적어도 이곳에 온 병사들은 자네의 활약을 이야기하겠지.”
명목은 도적 토벌이었지만 실상은 패잔병 무리의 섬멸이었다. 또한, 단순한 도적 토벌이라고 해도 그 수가 천에 이르렀다면 그 성과는 폄하할 것이 아니다.
기존 그의 수하들이 갑자기 굴러들어온 새로운 얼굴을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시어문드의 고충도 이해하지만, 수하들의 역시 이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어문드의 태도는 기대했던 대로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하고 있지 않나. 군터는 시어문드가 설령 시간이 조금 걸릴지는 몰라도, 결국은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포로들이 남았습니다만.”
“얼마나 남았지?”
“사십이 조금 넘습니다.”
고문을 하는 과정에서 꽤 수가 줄었다. 살아남은 사십여 명도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처분해라.”
“알겠습니다.”
도망친 적은 모두 추살했다. 거두어들인 수급이 천 두가 넘는다. 얼마 되지도 않을, 변변찮은 귀족 가문의 재산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다.
* * *
천여 두의 수급과 함께,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솔롬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성과는 곧 솔롬 전체에 퍼졌다. 천이 넘는 도적 무리를 별다른 피해 없이 깔끔하게 소탕했다는 이야기는 사흘이 지나지 않아 솔롬 내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주시는군요 장군.”
“시어문드의 공이 컸다.”
“예. 그것도 전해 들었습니다. 장군께서는 그가 능력을 보일 것을 믿으셨지요?”
“실력은 운에 기대지 않으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장군께서 눈여겨보신 인재라기에 의심치는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기대가 크신 모양입니다?”
“군재로는 내 수하들 중 으뜸일 것이다. 나보다도 더 나을 것이고.”
“…그 정도입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띄워주기 위해 으레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스메티는 군터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어문드라는 자가 정말 그리 뛰어나단 말인가?
‘그래. 전에도 이름을 듣긴 들었었지.’
베이고르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 시어문드라는 이름을 몇 차례 들은 적이 있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때도 군터가 시어문드의 군재를 칭찬하는 말을 몇 번 정도 흘리듯 한 적이 있는 듯했다. 그때는 테리브란에서 따로 일을 보느라 그런 말들에 신경을 쓰지 못했었지만…….
‘장군보다도 위라고? 믿어지지 않는군.’
야스메티가 아는 군터는 대단한 사내였다. 권력자로서도 흔치 않은 대단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군인으로서의 재능은 그 이상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 전장에 나갔다 하면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고, 전쟁이 끝나면 항상 그의 무명이 들려온다. 어디에 가더라도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의 재주가 범인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군터가 자신보다 낫다고 하니, 시어문드라는 사내는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놀랍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만약 시어문드가 활약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 자리부터 온전히 굳혀놔야겠지만.’
도적들의 수급을 대거 챙겨온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그러나 시어문드에게 정말 군터가 말한 것 같은 재능이 있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 자격을 증명할 터.
“기대되는군요.”
“음.”
야스메티에게 한 말. 군터는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군재에 있어 자신보다 시어문드가 낫다고 여겼다.
군터는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의 전투는 그 자신이 지닌 일신의 무력을 앞세운 돌파 위주의 전투다. 강력한 기병을 이끌고, 스스로 꼭짓점이 되어 기병의 위력을 더욱 극대화하여 전투를 보다 수월히 풀어나가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이 방식은 위력적이고, 여태까지 항상 성과를 내왔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반칙과도 같다. 이 방식은, 그의 무재를 내세운 것이지 군재를 발휘한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는 일전에 단 한 번이지만 시어문드와 전장에서 겨뤘었다. 그때 그는 시어문드에게 작은 승리를 거뒀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군재가 더 나아서 거둔 승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만약 같은 수, 같은 질의 병력을 거느리고 그들만을 이용해서 맞붙는다고 가정하면 군터는 시어문드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전술, 전략을 다루는 데 있어 시어문드는 확실히 탁월하다. 그는 상대의 심리를 읽을 줄 알며,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줄도 안다.
‘일군을 맡길 만한 재목이지.’
틀림없는 장재(將材)다. 살라스도, 할렌, 군터의 수하들 중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재능이다. 그런 재능을 시어문드는 가지고 있다.
“장군께서 그를 특별하게 여기시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다른 이들의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당연한 소리를.”
안 그래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시어문드다. 그런데 거기에 군터가 대놓고 총애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더 큰 질시가 따르지 않겠나. 아무리 자잘한 일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군터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참. 버틀레인이 돌아왔습니다.”
“버틀레인?”
“그, 아바시스와 접촉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보냈던 암상 말입니다.”
대협곡으로 내려보낸 암상. 잊지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이 버틀레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았을 뿐.
“괴물을 죽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성과가 있었나 보군.”
“운 좋게도 말이지요.”
버틀레인이라는 이름의 암상은 그의 일을 충실히 해냈다. 대협곡을 통해 기존에 거래하던 아바시스의 상인들과 접촉한 그는 야스메티가 요구했던 대로 아바시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이종에 관한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그중에는 쓸모없는 것들도 많았지만, 그럴듯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야스메티의 말처럼, 운이 좋게도 솔롬의 지하에 가둬둔 괴물에 관한 내용을 적은 서적도 있었다.
“세 개의 서적에서 말하는 내용이 괴물의 특징과 매우 흡사합니다. 말이 매우 흡사하다뿐이지, 정확하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군터는 괴물에 대해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짧게 물었다.
“필요한 것이 있나?”
“입이 무거운 병사들이 백 명 정도 필요합니다.”
“살라스에게 이야기해두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