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밤이 깊었다. 종일 행군한 병사들은 일찌감치 잠들었다.
“괜찮겠습니까?”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 외에 깨어있는 이들은 몇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인원 중에 시어문드와 그의 수하가 있었다.
“괜찮다.”
“아무리 눈속임을 위해서라지만…너무 지나쳤던 것이 아닐지.”
“군터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모두 찾아보기 힘든 강군이다. 이 정도로 지치지는 않아. 자네도 알지 않나?”
시어문드는 군터와 함께 전투를 치른 적이 있다. 그때 직접 본 것이 있으니, 그는 군터의 병사들이 이 정도로 나가떨어질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 되는 날에는…….”
뒷말은 삼켰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하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왜 모를까. 시어문드 역시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크렘보르의 휘하에 들어왔다. 그저 그런 하급 장교도 아니고, 천부장의 자리를 한 번에 꿰차면서. 새로이 동료가 된 이들 중에는 그를 아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설령 안다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자가 아무런 공도 없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자가 몇이나 될까. 의심만 하면 다행이고, 질시의 눈초리를 대놓고 보내도 어쩔 수 없다.
시어문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의심하고 질투하는 이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공을 세우고 능력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
‘반드시 걸려든다.’
이곳에 숨어있는 것은 평범한 도적들이 아니다. 평범하게 눈이 돌아간 놈들이었다면 눈에 띄는 대로 약탈을 자행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이런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지도 않았을 테고.
조심성이 많은 놈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 놈들의 규모는 크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수만 대략 오백 가량이라 했으니 본거지에 더 있다고 친다면, 어쩌면 천에 육박하는 규모일지도 모른다. 일개 도적들치고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그런 놈들이 약탈에 열을 올리지도 않는다. 그렇다 해서 자기들끼리 농사나 사냥을 하며 자급자족하는 것도 아닐 터.
‘사정이 여의치 않겠지.’
이쪽의 수는 고작해야 삼백. 그에 반해 뭔가 있어 보이는 수레를 잔뜩 끌고 있으니, 아무리 조심성 많은 놈들이라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함정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이성이 발휘할 수 있는 통제력은 그리 크지 않다. 특히나 비대한 무리를 움직여야 하는 처지라면 더욱 그렇다.
‘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들 수밖에 없는 불안감을 익숙하게 가라앉혔다. 조급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것은 결국 확률 싸움이고, 선택의 문제다. 그는 확률이 높은 쪽에 걸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 주사위는 이미 던졌는데 마음 졸인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괜히 아군을 불안하게 만들기만 할 뿐.
걱정하는 수하를 돌려보내고 홀로 남은 시어문드는 조용히 막사를 나서서 구름 낀 하늘을 올려보았다.
‘종일 날이 어둑하군. 야습을 해온다면 오늘 밤이 적기일 터인데.’
낮이건 밤이건 태연한 척을 하면서 내색을 하지 않지만, 그라고 해서 어찌 마음이 편할까. 적이 움직인다면,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최대로 잡아도 앞으로 사흘. 그 안에 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의 계책은 실패다.
“적이다-!”
초조한 마음을 한숨에 실어 날려 보내던 순간. 느닷없이 들려온 고함.
‘왔군.’
시어문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 * *
소리 없는 기습이었다. 어둑한 밤하늘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최대한 몸을 감추고 기척을 죽이며 접근했고, 화살을 쏘며 일제히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적이다-!”
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깊이 잠든 줄 알았던 적병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그것도 완전 무장을 한 채로.
‘반응이 빠르다. 이건…….’
그는 즉시 깨달았다.
‘함정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서늘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치고 들어간 상황. 여기서 함정이라고, 후퇴하라고 외친들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 아군은 당황하고, 적은 기세가 올라 추격을 시작할 터. 뒤를 밟히면서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기는 마찬가지.
‘함정이라고 할지라도…당장 적의 수는 삼백에 불과하다. 수적 우위는 이쪽에 있어!’
몸을 낮추고 여기까지 접근하면서 인근에 또 다른 적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게 함정이고, 별도의 적이 다른 곳에서 대기 중이라고 해도 당장 이곳까지 달려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적의 원군이 오기 전에 저들을 쓸어버리고 물자를 탈취하여 퇴각하면 된다.
‘그래. 그게 최선이야.’
적은 기민하게 반응했지만 그 수는 척 보기에도 얼마 되지 않았다. 삼백이라면 아군의 절반. 승산은 충분하다.
“쳐라! 모조리 쓸어버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반격해오는 적에게 당황했던 이들이 그의 외침에 전의를 되찾았다. 그들은 거친 욕설을 뱉으며, 이제 막 진형을 굳혀가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퍼억!
심장을 찌른 일격. 그것으로 끝이었다.
반쯤 눈이 뒤집혀서 덤벼들던 적이 창끝에 걸려 덜렁거렸다.
“장군.”
시어문드가 달려왔다. 덤덤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리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 어지간히도 기쁜 듯했다.
“그래. 네 생각대로 되었구나.”
“여기서 저들을 모두 쓸어버리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진심이다. 아예 꼭꼭 숨어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대가리를 내민 것들을 놓칠 일은 없다. 적은 척 보아하니 기병도 거의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쉽게 물러설 생각도 없어 보였다.
“직접 나서십니까?”
“언제나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의미 없는 질문이다. 직접 나서지 않을 것이라면 뭐하러 이곳까지 왔겠나.
작은 전투. 하지만 그래도 좋다.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순간, 장소다.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것도 호흡 하나, 움직임 하나에 생사가 갈리는 이곳의 이 순간만큼 치열할 수는 없다.
“무리할 필요 없다! 앞으로 나가지 마!”
공들여 키운 병사들은 이번에도 제 몫을 하고 있다. 배는 되어 보이는 적을 상대로도 움츠러들지 않고 냉철하게 응전한다. 적은 압도적인 수를 앞세워 거칠게 밀어붙이려 하고 있지만, 바위처럼 굳건하게 뭉친 아군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훌륭해.’
수하들의 모습은 만족스러웠다.
군터는 말에 올랐다. 뒤따르는 기병 없이 혼자 휘젓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고, 오히려 표적이 될 뿐이나 지금만은 괜찮다. 날이 어둑하여 적의 눈에 띄지도 않고, 적의 수가 많지 않으며 또한 흩어져 있어 단기필마로도 충분히 길을 열 자신이 있었다.
“따르지 마라.”
언제나처럼 그의 뒤를 따르려던 몇몇 친위대 병사들을 제지하고 홀로 말의 배를 찼다.
히히힝!
흥분한 말의 울음소리가 기운차다. 간만의 전투에 들뜬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밀어붙여! 칼 말고 창으로 찔러라!”
지휘하는 목소리.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도 못했겠지만, 군터는 아무리 시끄러운 전장에서도 원하는 소리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달려라.’
말이 콧김을 뿜으며 내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적은 창 한 번 휘둘러 치워냈다. 창대에 걸리든, 창날에 걸리든 창의 궤적에 걸린 적은 베이거나 치이거나 하여 두셋씩 나가떨어졌다.
“뭐, 뭐야!”
군터의 존재감은 확연했다. 홀로 말을 타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뿜어내는 흉흉한 기세는 전투의 열기에 이성이 반쯤 마모된 이들조차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이…….”
전혀 도적 같아 보이지 않는, 장교의 갑옷을 입은 사내는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군터는 그에게 말을 이을 시간을 주지는 않았다.
퍼억!
창날이 가슴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달리는 말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양옆에서 찔러오는 창은 다른 손에 쥔 검이 모두 자르고 쳐냈다.
“커헉!”
군터는 창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적 대장의 몸뚱이가 살짝 창대를 타고 내려왔다. 창날은 완전히 그의 몸을 관통하여 등 뒤로 튀어나왔다.
“이놈!”
군터는 적 대장을 창대에 매단 채로 거칠게 창을 휘둘렀다. 창대 중간에 걸려 있던 몸뚱이가 쑥 하고 빠져나가 가장 먼저 덤벼들던 적에게 날아갔다. 분노에 차 있던 적은 숨이 다 끊겨가는 대장과 부딪쳐 땅을 굴렀다.
“흡!”
군터는 그 자리에 멈춰서 적들을 맞았다. 전후좌우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거나 피하며, 말에게 접근하는 적을 찌르고 베었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그의 시간은 그의 적들보다 서너 배는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핏!
귀 옆으로 화살이 지나갔다. 쭉 뻗은 창끝에 칼을 들고 달려오던 적의 목이 찔렸다. 곧바로 뒤로 잡아당긴 창대 끝에 역시 칼을 들고 접근하던 적의 머리가 깨졌다. 연달아 창을 길게 잡고 한 바퀴 휘돌리니 두 명의 적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방진 풀어! 적을 섬멸하라!”
짧은 순간 군터가 맹위를 떨친 것만으로도 적이 흔들리며 포위가 느슨해졌다. 방진을 굳히고 버티기로 일관하던 솔롬의 병사들은 시어문드의 호령에 일제히 태세를 전환했다. 그들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뀐 것만으로도 느슨해진 포위는 삽시간에 찢겨버렸고, 지시를 내릴 대장을 잃은 적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혼란에 빠졌다.
“흐읍!”
그와 동시에 군터도 다시 말을 달리게 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음산한 죽음의 기운이 검은 창에 깃들었다. 군터가 그것을 정면의 허공에 대고 한 차례 휘두르자 응집되어 있던 기운이 창날을 따라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허억!”
모든 생명과 적대하는 기운은 군터의 앞에 있던 적들을 휩쓸었다. 창날을 떠난 기운과 가장 먼저 맞닥뜨린 적병은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져 무릎을 꿇었고, 그를 관통한 기운에 2차로 접촉한 이는 무릎을 꿇지는 않았으나 역시 안색이 변하며 비틀거렸다.
영향을 받은 것은 십수 명. 자세가 무너질 정도로 크게 영향을 받은 이는 가장 처음에 기운을 접한 서넛 정도였지만, 그 뒤로 접촉한 이들 모두는 적어도 군터의 돌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심신에 타격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히히힝!
군터는 거칠게 창을 휘두르며 뭉쳐있는 적들을 단번에 돌파했다. 그가 지나간 직후, 살기등등한 솔롬의 병사들이 적을 연달아 덮쳤다.
아아악!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달아나는 적이 나오기 시작할 즈음에는 이미 적의 수가 반 이상 줄어든 후였다.
“추격하라! 한 놈도 놓치지 마!”
추격 명령에 삼십여 기의 기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사냥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