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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96화 (596/1,064)

596화

솔롬의 성주가 되고 판니른의 방위군단장이 되었으나 실제로 군터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수하들이 올리는 보고서를 훑어보고, 결재가 필요한 서류에 인장을 찍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머리를 쓰는 일은 야스메티를 필두로 몇몇 수하들이 하고, 발로 뛰어야 하는 일들은 그 외 나머지 수하들이 한다. 군터가 하는 일이라고는 묵직하게 자리에 앉아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

그러나 야스메티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했다. 든든하게 버티고 서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나?

무슨 의미인지 안다. 또한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무료함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무료하다. 물론 매일 색다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었고, 지금도 이따금 찾게 되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흥. 그가 느끼고 있는 무료함의 본질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아무리 솔롬의 성주니, 방위군단장이니 하는 감투를 쓰더라도 그는 무인.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다.

꽤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때는 전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때가 있었거늘, 이제는 갑옷을 입고도 짐무실에만 앉아 있는 게 익숙해졌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즐겁지는 않았다.

군터는 한동안 들여다보던 종이 뭉치를 옆으로 치우고서 살라스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장군.”

“첼로브 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도적놈들.”

“아. 그놈들은…….”

“내가 가겠다.”

“예? 그러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가만히 의자에만 앉아 있으려니 몸이 굳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름을 퍼뜨리기 위함이라면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더 효과적일 터.”

“그렇기는 합니다만.”

살라스는 군터의 말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이제 막 시작된 판니른 ‘청소’는 판니른 방위군단장의 이름 아래 진행되는 것이다. 판니른 전역에서 날뛰고 있는 크고 작은 도적 무리를 소탕하면 백성들의 칭송은 자연히 군터 크렘보르에게 향할 것이다. 그가 직접 전투에 나서고 안 나서고는 중요치 않다. 도적들을 청소하는 군대는 모두 그의 깃발을 들고 싸울 테니까.

그러나 지금 군터의 말처럼, 그가 직접 나서서 싸운다면…그래. 아마 효과는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라스는 ‘굳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말 몸이 근질거리시는 모양이군.’

다시 한번 느꼈다. 그의 상관은 천상 무인이고, 군인이다. 가만히 앉아서 종이나 넘길 사람은 아닌 것이다.

“장군의 뜻이 그러시다면, 준비하겠습니다.”

“많은 수는 필요 없다.”

“오백이면 될까요?”

“삼백이면 족하다.”

“그건 너무…….”

“고작해야 도적놈들. 게다가 판니른 안이지. 그 이상은 우스울 뿐이야.”

“알겠습니다.”

군터는 연이어 야스메티에게도 얼마간의 외유에 대해 통보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상했던 대로, 야스메티는 살라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하지만 군터의 마음은 이미 굳었기에 야스메티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말릴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야스메티도 곧 체념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장군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한 달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가시는 곳이 첼로브라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한 달이다.”

오고 가는 데만 족히 스무날은 넘게 걸릴 텐데,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는 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 군터의 군재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야스메티로서도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병력을 많이 거느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300이라 들었는데…….

‘뭐, 알아서 하시겠지.’

무책임하다면 무책임한 것일 테지만, 그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차피 군사(軍事)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쪽은 오히려 군터와 살라스 같은 무관들이 전문이니,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다만 군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최대한 힘주어 설명했다.

“장군께서 이곳에 오신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한번 물갈이를 했다고는 하지만, 솔롬의 질서는 겉보기에만 그럴듯할 뿐 여전히 불안정합니다. 게다가 장군의 잠재적인 적들 역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지요. 그들이 장군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 손을 쓰려 한다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지배 체제를 구축하기는 했으나, 아직 완전히 굳히지는 못한 것이다. 일처리를 어설프게 해서가 아니라, 성의 관료며 시민들이 새로운 지배자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단 군터의 무지막지한 힘에 굴복하긴 했으나, 아직 그를 낯설어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 군터가 자리를 비운다? 그 사이에 불온한 의도를 가진 쥐새끼들이 숨어들어와서 수작을 부린다면, 조금은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다.

“쉽지 않다고 하지,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는군.”

“음…그거야 뭐.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쥐새끼 몇 마리 때문에 무너질까 걱정한다면 힘들여 집을 지은 것이 우스워지지 않겠습니까.”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쥐새끼 몇 마리 때문에 망가질 집이라면, 차라리 허물어버리고 새로 짓는 게 낫겠지.”

“하하. 그건 또 그렇군요.”

“말했듯, 한 달이면 충분하다.”

“예, 예. 기왕 나서시는 김에 판니른 전역에 장군의 이름이 떠들썩하게 들리도록 활약해주십시오.”

다른 사람이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오직 야스메티만이 가능한 일이다.

군터는 헛웃음을 짓고 있는 살라스에게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날 대신해주어야겠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첼로브는 판니른의 주도인 하잘을 기준으로 해서 남서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곳곳에 숲과 산이 펼쳐져 있고, 평지는 찾아보기 힘든 험한 지세. 그렇기에 농사를 짓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다른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정을 길게 잡은 사냥꾼들이 아닌 이상 첼로브를 찾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2황자가 7황자에게 처절하게 패배하고 몰락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원래도 소수의 마적들이 주둔지로 쓴 모양입니다. 그런 곳에 당시 갈 곳 없던 패잔병들 일부가 몰려들었다더군요. 기존에 있던 마적들과 합쳤는지 몰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뒤로 첼로브를 거점으로 하는 도적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시어문드가 솔롬을 떠나기 전, 그리고 첼로브로 이동하는 동안 알아낸 정보들을 늘어놓았다.

“패잔병들이라. 전쟁이 끝나고서 항복하지 않았던 건가?”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쳤더라도 2황자가 죽고 그의 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뒤라면 항복을 해도 괜찮았을 터인데 첼로브에 숨어있었다는 것이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당장 도망쳐서 포로 신세를 면하더라도 결국 기다리는 것은 기약 없는 도망자의 삶일 뿐인데, 어째서 그들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들의 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몇 가지 추측은 해볼 수 있겠지요. 그들이 평범한 병사들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병사들은 투항하고자 하였으나 지휘관이 억압하여 어쩔 수 없이 따랐을 수도 있겠고…뭐가 됐든 이유야 있지 않겠습니까.”

시어문드가 말한 이유일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도망쳤다가 도적질에 맛이 들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첼로브에 출몰하는 것들이 도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

“놈들의 동태는?”

“정찰병들이 주변 지역을 탐문한 바로는, 다시 밖으로 나온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적질을 해대면서도 태평하군. 토벌군이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하지 않았거나, 와도 자신이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자신?”

군터가 작게 코웃음 쳤다. 그러자 시어문드가 슬그머니 뒷말을 더했다.

“토벌군이 와도 격퇴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최악의 상황에도 몸을 뺄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믿는 구석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건 좀 그럴듯하다.

첼로브에는 삼림이 많다. 숨기도 좋고, 몸을 뺄 수 있는 뒷구멍을 만들기에도 좋은 장소다. 그렇기에 도적놈들도 이곳에 똬리를 튼 게 아니겠나.

“곤란하군.”

탁 트인 평야도 아니고,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놈들이 숨거나 도망치고자 한다면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미리 준비해놓은 뒷구멍까지 있다면 놈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을 터.

“방도가 있겠나?”

“정면으로 들이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뭘 하려고 해도, 우리보다는 놈들이 더 첼로브의 지세에 익숙할 테니까 말입니다.”

“허면?”

“유인을 해보심이 어떻습니까. 일단 장군의 깃발부터 숨기고, 어수룩한 자가 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된 척 연기를 하는 거지요.”

“넘어오겠나?”

“조심성이 많은 놈들일 테니 그냥 넘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허나 적당한 미끼를 던진다면…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끼라.

말과는 달리, 시어문드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감돌았다.

* * *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

“토벌군 말입니다. 이번에 새로 부임했다는 방위군단장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풀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부가 이곳까지 온 모양입니다.”

“수는 얼마나 된다더냐?”

“얼추 삼백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적군.”

“저희가 점잖게 군 덕에 꽤나 얕보인 모양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 토벌군이 왔다는 것은 물론 경계해야 하지만, 삼백이라는 숫자는 그런 걱정을 덜어주기에 충분했다.

“어찌 되었든…조심하는 게 좋겠지. 놈들이 물러날 때까지는 산채에서 머물도록 한다.”

“음…헌데 가주님.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경 쓰이는 부분?”

“토벌군 말입니다. 멀리서 온 놈들인지 스무 대가 넘어가는 수레를 끌고 있답니다.”

“수레를 스무 대가 넘게?”

군대와 함께 움직이는 수레에 뭐가 실렸겠는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허나 병력이 고작해야 삼백인데 수레는 스무 대가 넘는다고? 아무리 놈들이 멀리서 왔다고 해도 꽤나 과하다.

“하옵고…토벌군을 이끄는 놈이, 병사들을 부리는 꼴을 듣자 하니 공명심만 앞선 책상물림인 것 같습니다. 행군 일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시도 때도 없이 병사들을 닦달한다더군요.”

“…….”

“위험부담이야 있겠습니다만, 놈들이 끌고 온 물자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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