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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95화 (595/1,064)

595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앞뒤를 가로막고 서늘하게 노려볼 때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었다. 관에 잡혀갈 일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들이 정규군의 복장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를 포박하고는 어디론가 끌고 갔다. 어두컴컴한 밤에 범상치 않은 자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하고 있자니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수고했다. 몸수색은?”

“마쳤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상관임에 분명한 자의 앞에까지 그를 끌고 갔다. 그때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상복 차림이지만 틀림없이 고관으로 보이는, 무표정한 사내를 보자마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버틀레인?”

“예. 맞습니다.”

“두려운가?”

“솔직히 말씀드려서…그렇습니다.”

“그러게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저, 나리. 어찌하여 소인을…….”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분이 이야기해주실 거다.”

버틀레인은 그렇게 다시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번에는 눈을 가리기 위해 복면까지 씌운 채였다. 이제 그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척 보기에도 고관으로 보이는 이조차 답을 주지 않는다. 이야기해줄 사람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필시 그보다도 더 높은 지위일 터.

‘대체 어째서?’

왜 그런 높으신 분이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가. 버틀레인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를 지었다고? 그래. 인정한다. 별로 깔끔하게 살아온 인생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죄가 이렇게 야밤중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갈 정도인가 하면…글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대낮에 쳐들어와서 잡아가면 잡아가지, 이런 식으로 음모의 향기가 풀풀 풍기게는…….

‘음모?’

문득 떠오른 단어 하나. 두려움으로 굳어 있던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음모. 음모라.’

그래. 이제 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그 사내는 틀림없이 관리이고, 지금 양팔을 거칠게 끌고 가는 이들 역시 병사들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뭐가 두려워서 이 밤중에 사람을 납치한단 말인가.

‘이놈들…필시 뭔가 구린 일을 벌이고 있는 게야.’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버틀레인은 그가 일하는 방면에서 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경쟁자들의 질시를 꽤나 받는 몸이라는 거다.

‘그놈들이 관까지 끌어들였다고? 하지만 솔롬 성주는 지독할 정도의 무골(武骨)이라 이런 지저분한 바닥은 얼씬도 안 한다 들었는데.’

아니. 아니다. 솔롬의 성주는 그런 사람일지 몰라도, 그 휘하에 있는 자들까지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 않나?

‘빌어먹을…그 돼지 새끼들은 대체 뭘 한 거야?’

다른 이들이 그렇듯, 버틀레인 역시 돈을 먹여둔 관리가 여럿이었다. 그들에게 들인 돈 만큼, 그들은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다. 버틀레인이 결코 그들을 섭섭하지 대하지 않았기에 그들 역시 버틀레인의 든든한 뒷배…라고 하기는 그렇고,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그들은 귀뜸 한 번 해주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것일까? 설마하니 그들조차 알지 못하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일까? 만약 그런 거라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는데, 생각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암담함만 커졌다.

‘그래. 정신만 바짝 차리는 거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당장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끌려간 곳에서 바로 목을 치지만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상황을 봐가면서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해봐야 할 터.

“정말 하루만에 데려왔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자가 복면을 벗겼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바람이 통하지 않은 탓에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답답하던 복면을 벗는 순간에도 시원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춥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그랬고, 복면을 벗음과 동시에 더 심해졌다.

“호오. 재미있는 놈일세.”

“재미?”

“눈을 굴리고 있지 않나.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제 살길 찾아보겠다고 머리를 쓰고 있는 게지. 그래. 법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다니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흐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버틀레인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폐인 같은 생겨먹은 놈 주제에 무슨 놈의 눈이…….’

빼빼마른데다 안색까지 좋지 않다. 실내는 어두컴컴했지만 눈 밑에 짙게 드리운 그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대 치면 그대로 뻗을 것 같은 비리비리한 인상. 허나 그런 외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 비리비리하게 생겨먹은 자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의 생사가 갈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살고 싶으냐?”

“예.”

“그래. 살고 싶겠지. 허나 내가 왜 너를 살려줘야 하느냐?”

올 것이 왔다.

버틀레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송구하옵니다만…어찌하여 저 같은 하찮은 자를 죽이고자 하십니까?”

“뻔뻔한 놈이로세. 송구할 짓을 왜 하느냐? 내가 물었다. 기대한 것은 반문이 아니라 답인데, 네놈이 같잖은 잔꾀를 부리는구나.”

버틀레인이 즉시 납작 엎드렸다. 두 팔이 묶인 터라 땅을 짚을 수도 없어 그대로 이마를 땅에 박았다. 그에 쿵!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고통은 느낄 수도 없었다. 한기가 온몸을 엄습해 오는 듯했다.

“용서해주십시오!”

상대는 잔인한 자다. 자신 같은 인간은 개미를 눌러 죽이듯 태연히 없앨 수 있는 비정한 권력자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명확했다. 무조건적인 굴종. 그렇게 판단이 서자 버틀레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살려주십시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하니 좋군. 진작 그러지 그랬나.”

가벼운 말투. 마치 목소리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설마 처음부터 놀리려던 의도였일까. 순간 의심이 들었으나 곧바로 이어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주가 비상하다지?”

“재주라 하시면…….”

“관리들을 매수하는 재주. 대낮에도 국경을 제 집 문턱처럼 드나드는 재주. 돈이 될만한 것은 어떻게든 구해다 팔아치우는 재주.”

“…….”

“그리고,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 사이에서도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는 재주까지. 이 정도면 뭐 타고난 암상이라고 할 수 있겠구만.”

“소인은 그저.”

“내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곧, 버틀레인은 그의 시야 끄트머리에 나타난 두 발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앞에 있다.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루살이 같은 것들에게 빌붙어 있는 걸로 언제까지고 연명할 수 있을 줄 알았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으면 발견 즉시 참형이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주면? 네 목숨을 살려주면 넌 그 대가로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무엇이든지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소인, 이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토하듯 뱉은 말 뒤로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정적이 이어질수록 숨이 막혀왔다. 잠시 멎었던 식은땀이 다시금 얼굴 곳곳에 맺히기 시작했다.

“좋아. 두고보지.”

“감사합니다.”

살았다. 이후도 문제지만, 일단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온 몸에 번졌다.

“짐작했겠지만,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말씀드렸듯, 무엇이든지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걱정마라. 칼 물고 죽으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충분히 보상도 해줄 것이다.”

무작정 윽박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당근까지 제시한다. 시킬 일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 쓸모있다 여기는 것이다.’

일단은 그것으로 됐다. 쓸모가 다하지 않는 한 목숨이 달아나는 일은 없을 테니.

“길게 끌 것 없지. 바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장난기가 감돌면서도 왠지 나른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저주받은 날이구만.’

* * *

“괜찮은 놈을 하나 구했습니다.”

군터는 야스메티를 쳐다도 보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에 고정되어 있었다. 기름을 먹인 천이 칼날 위를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천 위의 손 끝에 서늘함이 스쳤다.

“어떤 놈일지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

“네가 적당한 놈으로 잘 골랐겠지.”

“목숨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한 놈입니다.”

“그게 장점인가?”

“겁이 많은 것과는 다릅니다. 놈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놈들의 텃새를 이겨내고, 오히려 놈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겠지요.”

“마음에 든 모양이군.”

“솔직한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솔직해?”

“욕망에 솔직합니다. 이것저것 재는 것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요. 살기 위해서 엎드렸고, 이익을 약속하니 눈을 반짝였습니다. 놈이 원하는 것을 이쪽에서 쥐고 있는 한, 다른 마음을 품지는 못할 겁니다.”

철컥.

칼이 칼집에 들어갔다. 그제야 군터의 시선이 야스메티에게로 옮겨갔다.

“거창한 말은 필요없다. 그래봐야 쥐구멍을 드나드는 쥐새끼일 뿐 아니더냐.”

“그렇긴 하지요.”

“그놈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놈으로 끝이냐?”

“그럴 수는 없지요. 못해도 서넛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소를 하겠다고?”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필요한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재물은 드러난 것에 버금가게, 어쩌면 그보다 더 클 겁니다. 그런 이권을 쥐새끼들에게 던져주기는 아깝지 않습니까.”

“솔롬을 코누다이안으로 만들 참이냐.”

“그렇게 크게 벌일 수는 없을 겁니다. 영지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영주의 마음이지만, 방위군단장은 다르지 않습니까. 꼭두각시를 내세워서 어느 정도의 이득을 취하는 것 정도가 한계일 테지요.”

과한 욕심은 대부분 화를 부른다. 아무리 쥐새끼들이라도 막다른 길로 몰면 이를 드러내기 마련이니, 괜한 소란을 피워 눈길을 끌 필요는 없다.

“최대한 빨리 적당한 놈들을 추려서 아바시스로 보낼 생각입니다.”

금을 낳는, 아니 금을 싸는 도마뱀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한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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