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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94화 (594/1,064)

594화

군터의 허락을 얻은 야스메티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물이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할 것이라면 늦장을 부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 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 대단하구만.”

“…….”

기껏 칭찬을 해주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사람 무안하게 입을 딱 다물어버린다.

‘재미 없단 말이지.’

대장을 닮은 것일까? 하지만 그들의 대장인 니클라스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어도, 이들처럼 대놓고 과묵하지는 않다.

‘뭐, 능력은 있으니까.’

항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점점 실력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예전 같았으면 닷새는 걸렸을 일을 이제는 이틀 정도면 해치운다.

“역시.”

정보원이 조사해온 내용은, 역시 그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돈이 흐르는 곳에는 사람이 꼬인다. 세상의 진리지.’

그는 무언가를 믿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아주 불확실한 것 때문에 고민하기를 포기하고 마음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경우 중 하나다.

진리라는 것도 마찬가지. 당연히 그러하리라 단정 지어버렸다가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어찌하나. 그렇기에 야스메티는 진리라는 것, 정확히는 남들이 진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구정물에 벌레가 꼬이듯, 돈이라는 놈의 주변에는 그것을 탐하는 인가들이 꼬인다는 것이다.

“데려올까요?”

“음. 아니야. 그건 자네들의 몫이 아니지. 자네들의 일은 끝났네.”

“예. 허면……”

“지시할 일이 생기면 내 따로 부르지. 당분간은 감시 임무에만 전념하도록.”

“알겠습니다.”

사실 그대로 맡겨도 되지만, 구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번거로움을 자처했다. 당장은 약간 번거롭더라도, 미래를 위해서는 이리 하는 것이 맞다.

‘경계는 뚜렷해야지.’

세력이 커지면서 해야 할 일은 늘고 있다. 드러난 일도 그렇고, 드러나지 않은 일도 그렇다. 그의 주인이 적포장군이 되고, 귀족이 되고, 솔롬의 성주가 되면서 그의 수하들은 늘어갔지만 음지에서 일해줄 인원은 여전히 한정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니클라스와 그 수하들의 역할이 점점 커졌다. 아직은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설령 그들의 충성심이 굳건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구조는 바꿔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 야스메티는 새로운 정보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아직은 구상에 머물고 있지만, 곧 시작할 것이다.

‘슬슬 버거워지는군.’

몸은 하나인데 해야 할 일은 많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사실 지금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그의 형, 바오룸에게 이런 말을 하면 아마 역정을 낼 것이다. 아직 한참 어린놈이 벌써부터 그런 소리를 한다고.

허나 타고나기를 허약하게 타고난 몸이다. 그런데 특별히 몸을 살피지도 않았으니, 세월을 좀 더 험하게 맞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다.

‘흐흐. 살피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되는대로 막 굴렸으니.’

술과 여자. 그 밖에 즐거움을 주는 것은 뭐든 탐닉했다. 그 대가로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몸이 더 망가져버렸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잃은 것 이상으로 충분히 즐겼으니까. 그럼 된 거다.

“부르셨습니까?”

일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토어릭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무관들 중에서는 살라스 이상으로 말이 잘 통하는 친구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종종 그를 통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바쁜데 부른 것 아닌지 모르겠군.”

“바쁘다 한들 야스메티 공에게 비할 바겠습니까.”

토어릭의 눈길이 책상 위, 정확히는 책상 위에 쌓인 수북한 종이 뭉치를 향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닌지.”

“지금 바짝 일해놔야 제대로 쉴 수 있거든. 앉으시오.”

“예.”

토어릭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야스메티가 보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주무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힘에 부치시는 모양입니다.”

“하하. 아무래도 일은 점점 많아지는데, 몸뚱이는 하나라서 말이오.”

웃음소리에 힘이 없다. 눈 밑에 진 거뭇한 그늘이 아니라도 그가 지쳐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람을 쓰시지요.”

“믿을만한 자가 있다면 당연히 그랬겠지.”

“알아보고는 있으신 겁니까?”

“물론이오. 아직 별 성과는 없지만.”

“너무 기준이 높으신 것은 아닐지요.”

“어설픈 놈을 데려다 써봐야 짐밖에 안 되오. 쓸 거라면 제대로 된 놈을 써야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걱정마시오. 요즘은 전과 달리 필요성을 제대로 느끼고 있으니, 본격적으로 알아볼 참이오. 설마하니 이 넓은 땅에 인재 두엇이 없겠소.”

“그건 공의 희망사항입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사실 진짜 희망사항은 그대가 그 갑옷을 벗고 내 일을 도와주는 것인데……. 어째, 같이 일해보시겠소?”

야스메티가 씩 웃으면서 책상 위의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에 토어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입을 놀리는 일을 주로 하고는 있으나, 그래도 책상 앞보다는 말 위가 더 좋습니다.”

“아쉽군.”

“그보다, 어인 일이십니까? 이렇게 따로 찾으셨다면 뭔가 굵직한 용무가 있으신 거겠지요.”

“음. 장군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소만, 국외로 눈을 돌릴 일이 좀 생겼소.”

“국외요? 무슨 말씀이신지.”

“장군께 들은 바가 전혀 없소?”

“예.”

“하아. 믿어주시는 것은 좋은데, 가끔은 조금 부담스럽구만. 그런데 아무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다고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하는 모양이오?”

토어릭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국외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대강 짐작한 것일까.

“일전에 말씀하시기를, 기반을 잡았으니 제대로 일구어야 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에 관한 것이겠지요.”

“맞소. 크게 보면 그렇지. 그런데 일단은, 성 지하에 있는 괴물 때문이오.”

“괴물이요?”

“녀석이 골골대고 있는 건 알고 있으시겠지?”

“예 뭐…….”

“녀석이 최대한 오랫동안 금을 많이 낳아줘야 할 텐데, 좀처럼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소. 그런데 녀석을 어떻게 관리를 하려 해도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듣자 하니…아바시스에는 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온갖 이종(異種)에 관한 지식이 있다더군요.”

“그대와 대화를 하면 길게 말을 할 필요가 없어 참 좋소.”

다시 한번 토어릭이 걸친 갑옷이 안타까워졌다. 그가 옆에서 일을 거들어준다면 한결 편해질 터인데.

하지만 어쩔 것인가. 본인이 갑옷을 입는 게 좋다는데.

“사정은 대충 이해했습니다만, 제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군요.”

“아바시스가 대협곡에 진을 쳤다고 해도 판니른과는 거리가 머오. 직접 사람을 써서 그들과 접선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지. 어떻게 대협곡까지 간다고 해도 그들과 잘 이야기가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아바시스는 긴 세월 제국의 주적이었으며, 그들과의 접촉은 법으로 엄금되어 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숱한 접촉이 있었을 테고, 지금도 그럴 테지만…어찌 되었든 방위군의 군단장이 직접 그들에게 손을 뻗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하여, 다른 방법을 쓰려 하오.”

“직접 사람을 쓰지 않는다면, 간접적으로 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렇소.”

“상인…입니까?”

야스메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 빌어먹을 갑옷 정말 안 벗으실 거요?”

“말을 타는 것이 힘들어지면 그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겠소.”

“무슨 그런 농담을.”

야스메티가 툴툴대며 말을 이었다.

“국경을 넘어 다니며 상행위를 하는 족속들이 있소. 신출내기들도 있지만, 대협곡이 뚫리기 전부터 남부와 이어지는 자신들만의 교역로를 가지고 있던 놈들도 일부 있지.”

“그렇다면, 접근해야 할 것은 후자입니까?”

“아니. 전자요.”

“어째서?”

“그놈들은 이미 전부터 자력으로 국경을 넘어 아바시스를 오갔소. 나름대로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 그놈들의 뒤를 봐주는 유력자도 있을 테고. 그러니 우리가 끼어들어 통제하기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오.”

“반면 신출내기들은 그렇지 않아서 우리를 필요로 할 것이고, 그런 만큼 통제하기도 용이할 것이란 말씀이시군요.”

“어렵지 않은 일이지. 장군께서 국경을 관리하시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놈들을 쥐락펴락 할 수 있을 거요.”

야스메티가 책상 위에 있던 종이 몇 장을 토어릭에게 건넸다.

“여기 적힌 자들을 데려오면 됩니까?”

“거칠게 해도 상관없소. 아니, 적당히 거칠었으면 좋겠군.”

“아드리안을 시킬까요?”

“그건 너무 거칠고. 너무 두려워해도 곤란하니까 적당히만 해주면 되오. 머리는 굴릴 수 있도록.”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헌데, 이런 일은 저희보다는…….”

“그들은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있지. 너무 그들에게 기대고 싶지는 않아. 그대라면 이해할 것 같은데 말이오.”

“음. 이해했습니다.”

역시 머리가 돌아가는 자다. 쓸데없이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릴 자도 아니고.

‘이 자가 적격인데.’

지력과 담력. 거기에 군부의 인망까지. 그늘에서 니클라스가 움직인다면 드러난 곳에서는 토어릭이 움직여주는 것이 이상적이다. 허나 본인은 아직 군인의 삶에 미련이 남은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본인이 내켜 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효율이 나올 리 없으니.

“열흘 안에 모두 대령하지요. 일부는 내일 당장에라도 데려올 수 있겠군요.”

“기다리고 있겠소.”

아쉽다. 그러나 세상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또한 그중 하나일 터. 야스메티는 되지 않는 일에 미련을 갖지 않는 사람이었고, 이번 역시 그러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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