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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93화 (593/1,064)

593화

“만족스러우십니까?”

“글쎄. 너는 어떠냐.”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압박은 결국 압박이지요. 정도 이상으로 몰아세운다면 그들도 거부감을 보였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선이 있다. 윽박지르거나 어르고 달래면 그 선까지는 물러나지만, 그 이상 밀어붙이려고 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발을 하게 된다.

그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이용하는 것이 바로 협상. 이번에 군터가 판니른의 귀족들을 상대로 한 것이 그런 협상이었다.

군터는 그들에게서 판니른 방위군에 대한 지원을, 분담금을 약속받았다. 아예 그 자리에서 문서화 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얻어낸 분담금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수준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기대치의 8할 정도는 충족했다. 두 달 안에 약조한 대로 분담금이 들어온다고 하면 자금 문제는 대부분 해결될 터.

“네 수완 덕분이다.”

“제 말에 귀 기울여주신 장군과, 장군을 따르는 용맹한 군대 덕분이지요.”

“공치사는 됐다. 그보다, 창고에 쌓아놓은 금은 어찌 처리해야 하겠느냐.”

본래 괴물의 금은 군대를 정비하고 유지하는 데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분담금으로 그를 대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초의 계획에도 수정이 필요한 상황.

“저들이 내놓기로 한 돈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군을 유지하는 것은 그럭저럭 가능하겠으나, 장군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선이다. 모든 군졸이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어야겠지.”

야스메티가 헛웃음 지었다.

“장군의 기준은 너무 높습니다.”

말로는 한 사람 몫이라고 하지만, 그의 눈에 찰 정도라면 그 자체로 강군이다. 너무 혹독한 기준이지만, 그의 말처럼 이 판니른은 전선이다. 언제 적들과 일전을 벌이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군대는 강할수록 좋다.

“아무튼, 장군의 말씀에는 동의합니만…거기서 한 가지를 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를 더한다? 무엇을 말이냐.”

“단지 강하기만 한 군대는 쓸모가 없습니다. 장군께 충성을 바치는 군대여야 합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솔롬의 병사들은 어느 정도 장악이 끝났다고 하지만, 판니른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군대는…아직 장군의 것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방위군을 사병화하라는 말인가?”

“그렇게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럴 수 있다면 그러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테리브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인데.”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천천히, 은밀하게 진행해야지요.”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자신만을 따르는 2만의 군대를 그 누가 사양하겠나. 그 정도의 군대가 있다면.

‘만에 하나, 황자와 틀어지더라도…….’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 아닌가. 대비는 미리 해놓는 것이기에 대비다.

“가능하겠나?”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좋아. 그게 전부인가?”

“아닙니다.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고 해도, 괴물의 금은 상당한 양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재물이 필요한 일은 계속 생길 테니 마냥 창고에만 쌓아두는 것은 아쉽지요.”

“허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수입이 날 수 있는 곳에 투자를 하는 겁니다.”

즉 사업을 벌이라는 말이다. 그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야스메티가 간간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장을 다시 운영하는 것은 어떤가.”

“음…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쁘지 않습니다만, 말을 키운다는 것이 재물을 벌어들이는 데는 썩…….”

사실 군터도 수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강한 기병을 보유하려면 좋은 전마가 필요하고, 멀리서 어렵게 구해오는 것보다는 직접 관리를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이야기를 꺼낸 것일 뿐.

“크렘보르 가문이 솔롬을 기반으로 삼았으니, 사업 역시 솔롬을 중심으로 진행해야겠지요. 생각해놓은 것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조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살펴봐야 한다고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면 이미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판단이 섰을 것이다. 다만 아직 그 판단이 확신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괴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직접 확인하지 않았나?”

“이래저래 바빴던지라…….”

“썩 좋아 보이지는 않더군.”

그럴 수밖에 없다. 수십, 수백 번의 칼질을 당하고 꼬리까지 잘려나간 채로 구속이 되어 있으니…상태가 좋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뭐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얼마나 더 숨이 붙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그거 참, 곤란하군요.”

“그 괴물에 대해 달리 아는 바는 없나?”

“예. 직접 상대해보셨으니 아실 테지만, 얌전한 놈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예전에 부족에서도 수십 전사가 달라붙어 간신히 목을 쳤다고 합니다.”

“흐음.”

기껏 힘들게 옮겨 왔는데 바로 죽어버린다면 곤란하다.

“실은 모페이브 공에게 사람을 보내 괴물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 물었습니다만…그 역시 모른다고 하더군요. 최대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만, 별로 기대는 되지 않습니다.”

제국에서 인간이 아닌 것들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물론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할지 모르나, 아무튼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이종(異種)에 관한 선대 황제의 혐오는 유명해서, 그것들에 대해 연구를 하거나 호기심을 갖는 것마저 금기시 되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괴물에 대해 알아보려 해도 무언가를 건지기는 힘들 터.

“듣기로, 아바시스에서는 온갖 생물들을 다스린다고 하더군요. 제국에서는 끔찍한 마물로 알려진 것들을 전투에 동원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나도 들어보았다.”

아바시스는 카라누르 제국의 숙적이다. 혹자는 황제가 마음만 먹었다면 아바시스마저 정복하였으리라 말하지만, 그 말이 황제에 대한 과도한 경외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제국은 일찍이 아바시스와 거대한 전쟁을 몇 차례나 치렀었고, 그때마다 양국은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수십만이 죽었고, 죽어서는 안 되는 이들도 여럿 죽었다. 그런 전쟁을 통해서도 기어이 결착을 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단지 황제의 의지 부족으로 정의하는 것은 너무 오만한 사고다.

어쨌거나 아바시스는 카라누르의 숙적이며, 양강이라 불리는 대국이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불릴만한 충분한 힘이 있다.

인외의 존재들을 다스리는 기이한 힘 역시 그중 하나. 야스메티의 말처럼 제국에서는 보이는 족족 말살시키는 마물들을 전쟁 병기로 이용한다던가, 그 외에도 온갖 방식으로 활용한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제국과 아바시스의 가장 큰 차이다. 제국은 모든 것을 짓밟고 정복하지만, 아바시스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

“제국에서는 구할 수 없겠지만, 아바시스에서라면 가능할 겁니다.”

“적국이다.”

“적과의 교류가 꼭 내통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판니른 내에…아니, 테리브란에도 아바시스의 무리와 은밀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굳이 내통 같은 거창한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적국에 사람을 보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때로는 첩자, 때로는 사자, 심지어는 사사로이 운영하는 암상까지.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속해 있지만, 그 울타리가 안에 있는 모두를 규제하지는 못한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이들이 저마다의 생각대로 행동한다. 발각되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리되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면 다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전쟁이 나면 병사들이 죽지만, 지휘관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난전이 벌어져서 눈먼 칼에 맞는 게 아닌 이상, 크게 패하더라도 그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후에 합당한 몸값을 내면 그들은 멀쩡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즈음이면 휘하의 병사들은 이미 땅속에 묻혔거나 머리만 잘려서 어느 수레에 실려 가고 있을 테지만,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왜? 그들은 살았으니까.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휘하의 군졸들을 자식처럼 여기며,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군터는 그런 자들을 여럿 보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흔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테리브란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로는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이는 군문이 아니라도 같다. 귀족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의 발에 불똥이 떨어질 때는 오직 같은 귀족, 혹은 더 높은 이들과 분란이 생길 때뿐이다.

“이곳에서 누가 장군께 트집을 잡겠습니까. 총독과 가장 유력한 귀족마저도 장군과 손을 잡지 않았습니까. 괴물의 일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할 경우가 꽤 생길 터인데…….”

“불가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 역시 그의 휘하다. 국경을 넘어 사람을 쓴다고 해도 눈치를 보지는 않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었을 뿐.

“그렇다면 새로 병력을 보내야겠군.”

“예. 동쪽 국경 쪽의 군대를 불러들이시지요.”

솔롬의 군대는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된다. 병사들의 훈련은 아직 마음에 차는 수준은 아니지만, 장교들은 온전히 그의 사람이라고 봐도 좋으니까.

“다만…이번에는 너무 강경하게 나가시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장군의 소문을 들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솔롬에서 있었던 것 같은 대대적인 숙청은 한 번이면 족하다. 이미 두려움을 심어주었으니, 이후로는 적절하게 당근을 내밀면서 길들여야 한다.

“재물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금을 쥐고서 최대한 포섭한다. 끌어들일 수 있는 자들은 최대한 끌어들이고, 그럴 수 없는 자들은 조용히 처리한다. 단번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것이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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