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살라스는 앞으로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젊은 사내가 누구인지는 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귀빈이지만, 그 중에서도 진짜 귀빈으로 분류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저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퀄릭 해들리르.’
해들리르 가문의 장남이며, 후계자다. 듣기로 현 해들리르 가주가 70이 넘은 고령이라 하니 어마어마한 늦둥이인 셈이다. 위로 누이가 여섯, 아니 일곱이 있다던가?
‘의욕이 넘치는군.’
척 보기에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이쪽의 환심을 사려고? 뭐가 되었든, 살라스의 눈에는 열심히 화제를 주물러대고 있는 그가 우습게 보였다.
이미 덫에 걸린 줄 모르고 열심히 몸부림치는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말, 행동. 어느 것 하나 아무 의미도 없다.
“확실히 몰던과 뭔가 있는 모양이군.”
“한 산에 주인이 두 명이었으니 두 가문이 화목할 리 없지요.”
살라스의 조용조용한 말에 토어릭도 역시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 그래도 대외적으로는 두 가문의 사이가 썩 나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진 모양입니다. 허나 드러나지 않은 사정은…꽤나 살벌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듣기로는 몰던에서 해들리르에 원한이 있다는 것 같지만, 해들리르라고 몰던에게 원한이며 악감정이 없겠는가.
‘몰던 가주는 조용하군.’
해들리르 가문의 공자는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는 반면에, 몰던 가주는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씩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해들리르의 공자를 쏘아보기는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우리 해들리르는 분담금에 대해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몰던 가주가 그렇게 눈길을 보내면 보낼수록 해들리르의 공자는 더 어깨를 펴고 당당해졌다. 몰던의 가주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걸까.
“좋군요.”
“뭐가 말인가.”
“일도 잘 흘러가고, 저 해들리르라는 애송이도…보아하니 별 것 아닌 것 같으니 좋을 수밖에요.”
“얕잡아봐서는 안 되지.”
“당연히 얕잡아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요.”
살라스는 헛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하여간 말재주 하나는 대단하다.
‘나쁘지 않아.’
해들리르의 젊은 후계자가 어떤 자이건 간에, 그가 나서서 설쳐준 덕에 분담금 문제는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논의가 되고 있었다. 세부적인 조율이야 당연히 시간을 들여서 하겠지만, 그의 주인이 딱딱한 말솜씨로 다른 이들을 겁박하는 형태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만 보면 우리의 동맹이 몰던이나 총독 쪽이 아니라 해들리르인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며, 살라스는 회의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자기들끼리 귓속말이나 눈빛 등을 주고받는 몇몇 이들을 눈여겨보았다.
* * *
늦은 밤. 퀄릭 해들리르는 그를 찾는 한 사람과 마주했다.
“저를 찾으시다니, 어인 일이신지.”
“몰라서 묻는가?”
“모르겠습니다만. 혹 제가 가주께 실례를 범하기도 했습니까?”
목소리에 시퍼렇게 날이 섰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제법 위협적이다. 퀄릭 해들리르는 표정 관리에 집중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아서였다.
‘몰라서 묻냐고? 그럴 리가.’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다. 뿐만아니라, 뮬리츠 몰던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물론 내색은 절대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날 놀리는 건가?”
“송구합니다. 후배를 깨우쳐 주시지요.”
“무슨 생각이지?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그렇게 설쳐대다니. 설마 솔롬 성주에게 붙어먹기라도 한 건가?”
“설쳐대? 붙어먹어? 아무리 몰던 가주시라지만, 말씀이 조금 심하십니다.”
몰던과 해들리르를 비교하자면,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몰던이 더 명성이 높다. 판니른 내에서의 권세 역시 마찬가지. 허나 그 차이가 결코 면전에서 막말을 해도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는 아니다. 그건 설령 가주와 후계자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더라도 다르지 않다.
“보름 뒤. 내가 양가의 가주들에게 어찌 말할 것 같나?”
양가(兩家)라 함은 당연히 3대 가문인 크레이그와 브랜우드를 말함이다. 퀄크 해들리르는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너무 과민반응을 하시는군요. 솔롬 성주는 적으로 삼을 필요는 없는 자 아닙니까.”
“그렇다고 우리와 뜻을 함께한 것도 아니지. 적어도 아직은 아니야. 그의 환심을 사고 싶었다면 너무 노골적이고, 서툴렀다고 말하고 싶군.”
“방위군의 분담금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솔롬 성주가 테리브란에 상신했다면 중앙 조정에서도 그의 손을 들어주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그렇다고 이쪽에서 먼저 배려를 해줄 일은 아니었네. 당연한 것이라 해도 최대한 쥐고서 거래를 하는 형식으로 나아갔어야 해.”
“솔롬 성주는 완고한 자입니다. 오늘 보아 아실 것 아닙니까? 필히 불쾌해 했을 것입니다.”
“그걸 왜 자네가 신경 쓰지? 자네는 마치…그의 눈치를 보는 것 같군. 정말 그와 붙어먹기라도 한 건가?”
“거듭 말씀드립니디만, 말씀을 가려 해주시지요. 전 그저 어차피 이뤄질 일이라면 굳이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비록 당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으로 생색을 낼 수 있다면 좋다고…….”
“순진하기 짝이 없군. 어설픈 계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장차 해들리르를 이어받을 후계자라면 조금 더 진중하게 행동하는 게 어떤가?”
“그리 생각하십니까? 어차피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야기를 꺼냈을 겁니다. 저는 필시 나섰을 누군가보다 한발 앞섰을 뿐입니다. 주제만 나왔을 뿐. 구체적인 조율도 오가지 않았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주께서 너무 과민하신 것 같습니다.”
과민하다는 표현조차도 많이 순화한 것이다. 퀄크 해들리르는 사실 괜히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리 말했다가는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니 후끈해진 감정을 속으로 삭였다.
‘그 입으로 뱉는 말들은 다 핑계일 뿐. 실은 내가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겠지.’
이곳에 오기 전에 부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솔롬의 성주를 눈여겨보는 것도 보는 것이지만, 몰던 가주를 경계하라고 말이다. 음흉한 자이니 조심 또 조심하라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네. 시간이 늦었군. 이만 들어가 쉬게. 나도 쉬어야겠으니.”
“예.”
퀄크 해들리르는 속으로 조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은 뮬리츠 몰던은 반쯤 남은 잔을 비우며 피식 웃었다.
‘늦둥이 독자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하더니…확실히 그런 티가 나는군.’
조금 전 의욕 넘치는 애송이에게 한 말 중 하나만은 진심이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어.’
솔롬 성주가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사는 위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동부에서 일을 하려면 이곳의 세력들과 연수하지 않고는 힘들다. 그것을 알기에, 결국 크램보르 가문이 3대 가문을 위시한 동부 귀족들의 무리에 들어올 것이라고 봤겠지. 그러니 미리 솔롬 성주와 친분을 도모하여, 몰던을 견제하려는 생각이었을 터.
뻔해도 너무 뻔하니, 그 속을 어찌 모를까.
허나 애송이는, 해들리르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바로 솔롬 성주의 오만함. 그는 자신이 먼저 손을 내미는 사내가 아니다. 그에게 다가서려고 했다면 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총독과 자신보다 더 빨리.
‘애송이의 독단일지, 아비에게 언질을 받은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애송이의 무모함이 생각 이상이거나, 늙은이가 판단력조차 흐려질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일 테니.
“가주님.”
“음?”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의 수하가 조용히 다가와 서신을 건넸다.
“솔롬의 병사가 전하고 갔습니다.”
“달리 말은 없었고?”
“예.”
주변의 눈이 있다. 말을 전하려면 나중에 걱정할 필요가 없을 때 전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지금 눈치를 봐가면서 서신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급한 용무가 있다는 것일 터.
“…….”
뮬리츠 몰던은 그 자리에서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을 훑었다.
‘진심이었던 모양이군.’
서신을 다 읽고 나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내용은 간단했고, 그래서 더 진실되게 느껴졌다.
‘애송이가 바람을 잡았으니 편승하라 이건가.’
뭐라고 해야 할까. 이번 기회에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죄다 챙기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욕심을 부려도 너무 노골적으로 부리니, 굉장히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긴 한 모양이지?’
하긴, 낮의 사열식 아닌 사열식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다. 병사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무장도 튼실했다.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그리고 물론, 그 ‘공’에는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돈도 포함되어 있다.
낮에 그 스스로 이야기했던 것처럼, 솔롬 성주는 자신의 책무에 충실한 것 같았다. 휘하의 군대에 그렇게까지 공을 쏟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 따라주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미 판은 해들리르의 애송이가 벌려 놓았으니, 못 이기는 척 편승하면 그만이다.
‘마냥 우직한 줄만 알았는데…영리하게 머리를 굴릴 줄도 아는군. 밑에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있는 모양이야.’
당연한 일이다. 솔롬 성주 본인은 우직한 군인일지라도, 그 밑에서 머리가 되어주는 자가 없다면 아무리 황자의 총애가 있었다 한들 현재의 자리까지 오르지는 못했을 테니.
* * *
“야스메티 공.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뭐가 말이오?”
“음…….”
몰라서 묻는 건가? 살라스는 신나게, 또 한 통 서신을 적어 내려가는 야스메티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야스메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장군의 위엄이 손상된다는 생각은 접어두시오.”
“어째서 그리 단언하십니까?”
“체면은 차려야 하는 상대 앞에서만 차리면 되는 거요.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장군께서 체면을 차려야 할 상대는 없소.”
“…….”
“반면에, 이득은 취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취해야 하는 것이니 내가 글을 적는 것을 망설일 이유가 없지.”
“탈이 나지는 않겠습니까.”
“탈? 하하. 그럴 리 없소. 지금 저들은 위축되어 있고, 해들리르의 어리숙한 공자가 바람까지 잡아준 덕에 마음까지 어느 정도 열린 상태지. 내가 하는 건 이미 타오르는 불씨에 기름 몇 방울 뿌려주는 것에 불과하니, 어찌 탈이 나겠소?”
살라스는 싱글거리는 야스메티가 어쩐지 꽤나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