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화
기수가 붉은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신호다! 따르라!”
아드리안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그의 호령에 열을 맞춘 보병들이 일제히 앞으로 발을 뻗었다. 방패를 이어붙인 채 걸음을 맞추니, 멀리서 보기에는 단단한 껍질을 가진 한 마리 거대한 짐승이 걸음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훌륭하군.”
성벽 위. 병사들의 행진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감탄했다. 그의 얼굴은 살짝 불그스름했다. 포도주 한 잔에 취기가 오른 것인지, 아니면 정연한 병사들을 보고 흥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방패 내려! 궁수 준비!”
쿵!
전열에 있던 방패병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방패로 땅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그 뒤로 활시위를 당긴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쏴!”
슈슈슝!
수백 발의 화살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렸다. 짚으로 세워둔 인간 형태의 목표들에 화살비가 쏟아졌다. 엉뚱한 곳으로 빠지는 화살은 거의 없었다.
“산개!”
한 덩어리처럼 뭉쳐있던 보병이 일제히 양옆으로 퍼졌다. 성벽 위에서는 다시 한 번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병사들이 빠르게 흩어지면서도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인 탓이었다. 멀리서 보기에, 수천 병사들의 빠른 움직임은 물결이 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기병 돌격!”
보병들이 길을 터주자 뒤에서 기병들이 튀어나왔다. 할렌이 선두에서 기병들을 이끌었다. 그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면서도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흩어지지 마라!”
한데 뭉쳐 돌진하는 기병들. 자욱한 먼지구름이 그들의 뒤를 쫓는 듯했다. 보병들 사이로 빠져나온 그들은 순식간에 화살 비를 맞아 너덜너덜해진 짚더미들을 휩쓸었다.
“기동사격 준비!”
똘똘 뭉쳐있던 기병들이 갑작스레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뾰족한 창이 활처럼 펼쳐지며 후열의 병사들이 허리를 틀었다.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활이 들려 있었다.
“쏴!”
슈슈슝!
화살은 이미 다 무너져 있던 짚더미 위로 날아갔다. 이번에도 역시 크게 빗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회!”
기병들은 좌우로 나뉘었다. 원을 그리며 질주하는 동안 활을 든 기병들은 활시위를 네 번 더 당겼다.
“오오!”
성벽 위에는 이제 일어나 있는 이들이 반 이상이었다. 앉아있는 이들도 몇 번씩 탄성을 질렀다.
“내 저런 저런 기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것이 갈색초원의 기병인가?”
성벽 위에 있는 귀빈들 중 바크렌에 가본 적이 있는 이는 드물었다. 또한 바크렌에는 가본 적이 있더라도 갈색초원까지, 혹은 그 근처까지라도 가서 초원인들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렇게 능숙하게 기사(騎射)를 할 수 있는 기병을 본 적이 없었다.
‘말로는 들었지만…훌륭하군.’
점잖게 의자에 앉아있었지만 놀라움에 가슴이 뛰는 것은 뮬리츠 몰던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군의 움직임도 훌륭했지만, 저 기병들은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다. 전장에서 저런 기병들을 적으로 마주한다면 어떻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보병으로는 진을 치고 수비에만 전념하는 게 아닌 이상 절대 불가할 테고, 기병으로 상대하려 해도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면서 활을 쏴대면…….
‘휘하에 이런 강군이 있었기에 숱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거겠지. 아니, 그 반대인가?’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했다. 강군이 승리를 가져다주기에 지휘관을 명장으로 만들어주는가, 명장이기에 휘하 군졸을 강군으로 만드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말이 되지만.
‘상관없지.’
중요한 건, 솔롬의 성주가 저런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저런 군대를 보임으로써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제대로 통한 모양이군.’
서 있는 자가 반. 앉아있는 자가 반. 모두가 감탄하고 있지만 정말 순수하게 놀라기만 하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흔들리는 눈빛이 드러나는 이들이 몇 있고, 겉으로 내색은 안 하지만 지금쯤 심사가 복잡할 이들이 또 몇 있다. 그리고 둘 모두에 해당이 되지 않더라도, 강한 이웃을 두게 되어 기쁜 이들은 없다.
뮬리츠 몰던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군. 장군의 병사들이 참으로 뛰어납니다. 이런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전장에 나가는 것이 두려울 일이 없겠소.”
“전장에 나가면 걱정이 없지만, 전장에 나가지 않으면 걱정이 많소.”
“음?”
“좋은 기병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좋은 전마가 필요하지. 보병 역시 마찬가지. 병사들이 사용하는 무구부터 시작해서, 돈 들어갈 곳이 좀 많은 게 아니니 유지하기가 빠듯하다오.”
뮬리츠 몰던은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입가엔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지독하군.’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솔롬 성주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가라앉아 있었지만 성벽 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다. 슬쩍 살피니 역시나 표정이 굳어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차례 대놓고 의중을 드러냈음에도 솔롬 성주는 만족하지 못한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부담이 안 된다면 거짓이겠지. 허나 아바시스도, 아말로페 트라소프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들었소. 강한 적들이 언제 판니른에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아니 그렇소?”
누구에게 물은 것인지 모른다. 답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가 할 말,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옳은 말씀입니다.”
누군가 대답을 했다. 답을 한다기보다는 추임새를 넣는 느낌이었다. 뮬리츠 몰던은 방금 답한 자가 미리 언질을 받은 자이리라는 데 그의 애마를 걸 수도 있었다. 짜고 치는 것이 보여도 너무 뻔히 보인다. 다른 이들도 모르지 않을 테지만 모른 척한다. 하긴, 모른 척을 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딴지라도 걸까? 이곳에서? 저 강군을 앞에 두고?
아마 그들은 점잖은 대화라든지, 술잔을 기울이며 가식적으로라도 웃으면서 서로를 떠보는 식의…전형적인 귀족의 회합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철저한 무력시위였다. 심히 과격하고, 저돌적인.
‘사열식이라고 했을 때 짐작했어야지.’
군대를 보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깨달았어야 했다. 그리고 의심했어야 했다.
판니른은 이제 국경이다. 적들과 인접한 이 땅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은 힘. 그 힘을 가진, 방위군의 군단장.
‘뭐, 이게 어딜 봐서 사열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과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정도면 사열식이 아니라 실전 훈련이 아닌가. 이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겁을 주면 일부는 굴복하겠지만, 일부는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이만한 군대를 거느린 자다. 심지어 이게 전부도 아니다. 저 아래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는 군대는 솔롬의 병력. 판니른 곳곳에 퍼져 있는 병력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솔롬 성주는 드러난 곳에서의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의 위협은 어떨까. 귀족의, 특히 권력을 가진 귀족의 사인 중 가장 많은 것이 불명(不明)이다. 나이를 먹어 자연사했다고 알려진 경우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연찮은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다. 권력가의 귀족 중에 제 명대로 사는 이는 드물다.
‘두렵지 않은가 보군.’
돌덩이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보면 도저히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낄 사내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황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일신의 무공은 백 사람을 상대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라 한다. 휘하에는 2만의 병사가 있고, 성 하나를 온전히 수중에 넣고 있다. 그 정도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을 법도 하다. 허나 그 모든 것은 지금의 이야기일 뿐.
세월이 흐른다면 어찌 될까? 어떤 이유에서건 황자의 총애가 거두어지고, 강건한 육신 또한 나이를 먹어 쇠약해지며, 영지에도 독초가 자라기 시작하면. 그리 되었을 때도 저 돌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현재의 그는 강하다. 그러면 됐다. 동맹이 강한 것은 꺼리기보다는 기꺼워해야 할 일.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거들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의 동맹은 드러나지 않아야 하며, 3대 가문을 위시한 동부의 유력 세력은 솔롬 성주와 아직까지 다소 경직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여기서는 한 번쯤 나서서 대립해주는 것이 그림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보다 앞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전하께서 성주께 방위군의 군단장 자리를 내려주신 게 아니겠습니까. 성주께서는 솔롬의 성주이시면서 전하를 섬기는 위장이십니다. 성주께서 성주님의 책무를 다하신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총독을 대리하여 온 자였다. 운바소르 아실. 그가 살짝 굳은 얼굴로 솔롬 성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성주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물론 난 책무를 다할 것이나…말은 바로 해야지.”
“예?”
“나의 책무가 아니오. 우리의 책무지. 판니른을 적에게서 지켜내는 것이 어찌 나 한 사람의 일이겠소. 아니 그러한가?”
논쟁을 벌이는 것 같은 그림이 되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운바로스 아실은 이제 완전히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으나, 더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총독의 대리인이 기가 꺾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는 이가 보기에는, 한 편의 잘 짜인 연극과 같았다. 끼어드는 시점부터 주고받는 말들. 마지막의 반응까지도.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그 일은 이 자리에서 논할 주제가 아니로군요.”
또 한 사람, ‘모르는 이’가 끼어들었다. 그를 본 뮬리츠 몰던의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좋은 자리가 아닙니까. 여기 있는 분들 모두 저마다 할 이야기들이 많으실 터인데, 바람을 맞으면서 나누기에는 적절치 않겠지요.”
젊은 사내다. 웃음 짓는 얼굴에서 자신감이 엿보인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있는 성주와도 잠깐잠깐씩 눈을 마주친다.
‘아들놈을 보내다니. 늙은이가 오늘내일한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간사한 늙은이라서 믿지 않았었는데, 이런 자리에 직접 나서지 않고 아들을 보낸 것을 보면 병이 깊다는 소문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조심성이 많은 늙은이라도 솔롬의 성주가 어떤 자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지는 않을 테니.
‘아쉽게 됐어.’
죽어가는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못 보았으니 어쩌면 그 늙은이와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쉽군. 아쉬워.’
그는 아쉬움을 몇 번 소리 없이 되뇌고서 털어냈다.
세상사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인데 손이 닿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지막까지 운도 좋군 늙은이.’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편할 거다. 살아서 가문이 처참하게 짓밟혀 무너지는 꼴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