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화
“사열식?”
“예.”
로드니 캄브라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사열식이라.’
아무리 성주로 부임한 직후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지만,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이 무슨 뜬금없는…….
‘아니. 아니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냥 뜬금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위세를 드러냄으로써 노릴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가?
‘지지세력의 확보. 지금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것이겠지.’
더군다나 솔롬의 성주이면서 판니른 방위군의 군단장 아닌가. 막대한 군비가 필요할 테고, 그 때문에 얼마 전에도 지원 요청을 위해서 한 번 사람이 왔었다. 손을 잡은 처지에 그냥 물리칠 수가 없어서 적당한 지원을 약속했지만, 아무래도 그걸로는 부족할 터.
‘그래. 그렇군.’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로드니 캄브라이는 턱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초대를 받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답은 해줘야 하는데, 직접 가자니 걸리는 점이 있다. 대외적으로 그와 군터 크렘보르는 사이가 좋아서는 안 되는데, 이런 자리에 참석을 한다는 것은…….
‘보기에 썩 좋지 않겠지.’
중앙에 있는 여러 권력자들은 판니른의 총독과 솔롬의 성주가 서로를 물어뜯기를 바란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들의 의심을 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니, 일단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긴 뭘 어찌하나. ”
“초대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알잖나. 난 가지 못해. 자네가 내 대신 얼굴이나 비추고 올 텐가?”
“소신이 어찌.”
“문제 될 것은 없네. 어차피 그쪽도 내가 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서신이나 한 통 전하면 될 터. 그나저나…꽤나 소란스럽겠군.”
“아마도 그렇겠지요.”
솔롬의 신임 성주는 판니른의 군권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그런 자가 이렇게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면 판니른 뿐만 아니라, 인근 주의 권력자들도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명목은 판니른 방위군의 사열식인 만큼 그들에게까지 초대장이 배부되지는 않았겠지만…….
“궁금하기는 하군. 몰던 가주만 재미를 보겠어.”
“그 역시 처신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로드니 캄브라이가 테리브란 조정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몰던 가주 또한 다른 3대 가문과 그 외 권력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보다는 사정이 낫지. 나처럼 목줄을 잡힌 건 아니지 않나.”
“각하. 어찌 그런 말씀을…….”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자조하는 것은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일그러진 수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충직한 사내다. 가문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이곳으로 올 때 그를 대동했던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보다 이런 충성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쓸만한 자 보다는 믿을만한 자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네가 나 대신 다녀오게나. 그리고 그곳에서 본 것들을 내게 이야기해주게. 우리의 동료가 될 자, 적이 될 자. 신경 써야 할 자와 그러지 않아도 될 자들을 분간하여 눈여겨보게나.”
* * *
사열식 준비는 순조로웠다. 어차피 방위군 사열식이라고 해도 솔롬의 주둔병력으로만 치르는 것이라 따로 병력을 불러모을 필요도 없으니, 어떻게 보면 공개 훈련일 뿐이다. 물론 대외에 판니른 방위군을 선보이는 것인 만큼 그 훈련은 조금의 부족함도 허용할 수 없다.
“장군. 총독의 대리인이 당도했습니다.”
“결국 사람을 보냈군.”
“테리브란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는 해도, 그렇다고 너무 움츠리고 있을 필요도 없다는 거겠지요.”
“누가 왔나.”
“운바소르 아실이라는 자입니다. 아십니까?”
“일전에 한 번, 하잘에서 본 적이 있다.”
그의 기억으로, 로드니 캄브라이의 곁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맡아 하던 자였다. 로드니 캄브라이가 직접 소개까지 시켜주었기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테리브란의 본가에서부터 함께한 수하라던가.
“들여라.”
“예.”
잠시 후. 눈에 익은 자가 야스메티와 함께 들어왔다. 그는 군터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습니다 성주님. 운바소르 아실입니다. 일전에 하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만, 기억하시는지요.”
“기억하오. 총독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다고?”
“예. 각하께서는 직접 오실 수 없으시기에, 저를 대리인으로 삼아 이번 사열식을 참관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여기, 각하께서 성주님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야스메티가 서신을 받아 군터에게 전했다.
군터는 그 자리에서 봉인을 뜯고 서신을 읽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하기 바라며, 대신 수하를 대리인으로 보낸다는 것. 그리고 이번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란다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식은 엿새 후로 예정되어 있네. 그때까지 여독을 풀면서 쉬고 있도록 하게. 이틀 뒤부터는 연회가 열릴 테니 참석할 수 있다면 좋겠지.”
“예.”
“야스메티. 그를 안내해주게.”
“알겠습니다.”
운바소르 아실은 비교적 늦게 온 편이었다. 사열식은 엿새 후였으나 초대장을 받은 이들 중 삼분지 이 가량은 벌써 다들 도착해 있었다. 그중에는 명망 높은 귀족들도 있었고, 부유한 상인들도 있었다. 군터는 그들 중 일부와 독대했고, 일부는 수하들을 시켜 응접하게 했다.
“오트의 상인들이 방위군을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저녁. 야스메티가 싱글싱글 웃으며 소식을 전했다.
“그런가. 빠르군.”
“어차피 그들도 도착하기 전부터 미리 마음을 정한 상태였을 겁니다. 어느 정도의 믿음만 주면 답을 얻어내기는 어렵지 않지요.”
판니른의 상황은 혼란스럽다. 도처에서 아직도 활개를 치는 도적들도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되지 않은 상태다. 2황자가 판니른을 다스릴 때는 분명한 질서가 있었지만, 그 질서는 2황자의 패배와 몰락 이후 송두리째 무너졌다. 비록 줄을 바꿔 잡은 귀족들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그들의 영향력 역시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테리브란에 있는 황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하잘과 솔롬에 새로운 권력자들이 등장했다. 권력자들에게 선을 댈 수밖에 없는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그런 와중에 솔롬에서 대규모 사열식이 열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노라 자리를 마련해준 것과 같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다시 말해 선을 댈 용의가 없는 상인들은 애초에 이 자리에 발걸음을 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전에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별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탄압하지 않을 것. 그 지역의 병사들로 하여금 가도의 치안을 확보해줄 것. 뭐 그 정도지요.”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군.”
“그 당연한 것마저 당연하지 않은 것이 현 판니른 아니겠습니까.”
“하옵고…금괴의 주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서두른 보람이 있군.”
괴물의 둥지에서 찾아낸 금덩이들을 솔롬으로 옮겨온 순간부터 그것들을 녹여 금괴로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금의 양이 적지 않은 데다, 몇 차례에 걸쳐 옮겨오느라 그것들을 모두 금괴로 주조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사열식이 끝나면 내성의 금고로 옮기시지요. 그 동안은 기존의 창고에 두되, 감시병을 더 늘리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해도 좋다. 몰던 가주는?”
“아직입니다. 내일 낮쯤에 도착할 것 같더군요.”
“일부러 늦장을 부리는 거겠지.”
“무게감이 있는 인사가 아닙니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겠지요.”
유치하지만 효과적이다. 군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병사들의 준비는?”
“완벽합니다. 아드리안 천부장의 말로는 내일 당장 전장에 나가도 될 정도라더군요.”
그가 부임한 직후 솔롬 성은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잠시 혼란에 빠졌었지만 지금은 이전의, 아니 이전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애초에 숙청도 장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병사들에게는 큰 영향이 없기도 했고.
군터는 병사들에게 박하게 굴지 않았다. 훈련은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하게 시켰지만, 그만큼 후하게 보상을 해주었다. 봉급을 조금씩 올려주었고, 무장 역시 튼실하게 바꿔주었다. 기존 솔롬의 병사들은 파헨델의 병사들과 어우러져 정예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가 놀랄 것입니다.”
군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야스메티가 자신있게 그리 말할 정도로 솔롬의 병사들은 잘 단련되어 있었다. 엿새 후의 사열식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처음 뵙겠소이다. 뮬리츠 몰던이라 하오.”
“군터 크렘보르요. 처음 뵙겠소.”
몰던 가주는 차분한 사내 같았다. 외관도 외관이지만, 목소리나 말투부터 적당히 가라앉아 있는 것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냉정함과는 조금 달랐다. 강한 느낌 없이, 그저 잔잔한 연못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첫인상만 놓고 보면 이런 자가 형제들을 잔인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뭐라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장군? 성주? 이 사람이 호칭을 어찌해야 하겠소?”
“편할 대로 부르시오.”
“허면 장군이라 부르리다. 왠지 그대에게는 장군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군.”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군터에게 호감을 표했다.
“그대를 만나기를 고대해왔소. 그래서 일전에 사람을 보냈을 때는, 그러니까 거절을 당했을 때는 조금 상심했었지.”
“나를 만나기를 고대했다. 어째서?”
“그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무부에게 관심이 갔지. 아, 물론 귀가 따갑도록 들은 그대의 대단한 전공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고.”
그러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우리가 적이었지 않소.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더이다. 특히 그 룬차이를 상대로 일궈낸 승리는…아주 감명 깊었소.”
엄밀히 말하면 룬차이를 상대로 승리한 적은 없다. 룬차이가 없는 룬차이의 군대에게 승리했을 뿐. 허나 군터는 굳이 몰던 가주의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한때는 적이었으나 이제는 동지가 되었지. 그리고 이렇게 만났소. 뜻깊은 순간이라고 생각하오.”
저 말에 얼마만큼의 진심이 섞여 있을까. 군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차분한 눈을 보며 생각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