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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89화 (589/1,064)

589화

괴물의 저항이 소극적으로 변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달아나려 하는군.’

군터는 번들거리는 눈알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괴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놈이 도망치려 한다. 막아라.”

“예!”

병사들이 괴물의 뒤를 막아섰다. 군터는 괴물이 움찔하는 것을 보며 괴물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더 가까이 다가섰다.

괴물의 다리는 무릎 관절이 살짝 튀어나와 있는 것이, 척 보기에도 앞으로 달리는 데 적합한 생김새였다. 반면 뒤로 움직이려 한다면 뒷걸음질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즉, 놈이 돌아서지만 못하게 하면 놓칠 일은 없다는 거다.

쿠룩! 쿠룩!

불안하게 흔들리던 괴물의 눈빛이 한순간 변했다.

쿵! 쿵!

괴물이 씩씩거리며 달려들었다. 도망가는 것은 포기한 듯,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괴물에 군터는 입매를 비틀었다.

“장군!”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보다 빠르게 앞으로 달렸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할렌과 병사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렸다. 아무리 군터라고 해도, 체구를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한 거대한 괴물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말이다.

콱!

그러나 군터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서로 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이쪽이 튕겨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기울여 세운 창으로 괴물의 턱 밑을 찔렀다. 창끝이 괴물의 단단한 턱을 찌른 순간, 창대가 부러질 듯 출렁였다. 그냥 창, 아니 평범한 철창이었다면 단번에 흉물스럽게 구부러지거나 부러졌을 것이다.

키에에에에-!

괴물의 몸이 출렁였다. 창은 꺾이지도, 부러지지 않았다. 군터는 창을 쥔 채로 힘껏 밀었다. 두 발이 땅을 파고들며 밀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버텼다.

“흐읍!”

괴물의 머리, 목, 몸통이 크게 들렸다. 괴물이 더 이상 힘을 주지 못했고, 군터도 더 이상 밀려나지 않았다.

“쳐라!”

할렌과 병사들이 멈춰선 괴물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괴물을 난도질하여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야스메티가 걱정되어 죽여서는 안 된다고 소리칠 정도로, 그들의 칼질은 인정사정없었다.

* * *

“괜찮으십니까?”

할렌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괜찮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괴물의 힘이 빠지기 전이었다면 조금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정면으로 부딪쳤어도 팔이 살짝 저린 것이 전부였다.

‘정말 튼튼한 몸뚱이군.’

짐작한 것 이상이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했지만, 이렇게나 멀쩡할 줄은 몰랐다. 분명 그 자신의 몸인데도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크게 놀랍지는 않다. 듣기로 군주 줄카는 칼 하나 들고 불을 뿜는 용의 목을 쳤다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흉물스러운 도마뱀 하나 잡은 것쯤이야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나.

“장군. 아무래도 쇠사슬이 아닌 이상 저놈의 꼬리를 묶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병사들에게 일러 괴물을 포박하라 하였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꼬리가 말썽인 듯했다. 짧은 다리야 몸뚱이와 같이 묶어버리면 그만이고, 주둥이 역시 다무는 힘에 비해서 벌리는 힘은 약한 것인지, 굵은 밧줄로 여러 차례 감아버리니 무리 없이 묶을 수 있었지만 저 길고 굵은 꼬리는 평범한 밧줄로는 어찌 하기가 힘든 듯했다.

쇠사슬이라. 그 정도라면 가능은 할 것 같지만, 이런 벽지에서 어찌 그런 것을 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괴물의 꼬리를 묶을 정도면 특수하게 제작을 따로 해야 할 터인데, 쇠를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는 도시가 아닌 이상 찾기 어렵다.

“잘라라.”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것은 무엇이냐.”

괴물의 꼬리는 크지만, 몸뚱이는 그보다 더 크다. 꼬리 일부를 잘라낸다고 해서 과다출혈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혹 죽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너무 눈에 띄지 않습니까. 저걸 어떻게 옮길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할렌의 마음이 그의 마음과 같았다. 수레가 몇 개나 필요할지 모를 금도 금이지만, 저 괴물은 정말 어떻게 옮겨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이제 곧 솔롬에서 병사들이 올 테지만, 그들이 온다고 한들…….

“한 번에 옮기지는 못합니다. 금은 최대한 옮길 수 있을 만큼 옮기되, 괴물은 솔롬에서 적당한 수레를 가져올 때까지 병사들을 시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야스메티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남들의 눈을 피해 저것들을 나르려면 번거롭더라도 다른 수가 없다.

“장군.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만…….”

솔롬의 병사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도착했다. 전투라도 치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잔뜩 날이 서 있었는데, 수북이 쌓인 금덩이를 본 그들은 긴장이 풀려 입을 떡 벌렸다.

야스메티가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과장 좀 보태서, 이 황금의 언덕을 보고 나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정상이다.

“모두 옮겨야 하오. 서두릅시다.”

“아, 예.”

금을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금이 크기에 비해 무게가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은 원래 이렇게 가볍습니까?”

할렌이 제 몸뚱이만한 금덩이 하나를 든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까지 꽉 찬 게 아니라 그럴 거요.”

“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겉만 봐도 대충 알 것 같지 않소? 구멍이 숭숭 뚫렸잖아.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걸 녹이면 크기가 반 정도로 줄어들지 않을까?”

“흐음. 그러면 녹여서 가져가면 더 수월하지 않겠소?”

“그러면 좋지. 헌데 어디서?”

“그야…….”

마을에도 화로는 있다. 농사를 하려면 농기구가 필요하고, 그런 것을 다루려면 대장간은 몰라도 화로는 필요하니까. 거기서 금을 녹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마을 사람들이 금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것.

“입을 다 막을 게 아니라면, 귀찮은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소.”

사실 지금도 충분히 의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변변찮은 곳에 장군님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벌써 열흘이 넘게 뭉개고 있으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냥 의심만 하는 것과 번쩍이는 물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뭐, 깔끔하게 입막음하는 것이 편하긴 하겠군.”

“쯧!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의외구만. 공은 여태 숱하게 피를 봐오지 않았소?”

“그래서 뭐, 기왕 피 묻은 거 좀 더 묻어도 상관없지 않냐 이거요?”

“아니. 그런 말은 아니오.”

할렌이 살짝 낯빛을 굳혔다.

“그대가 이 사람을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군인이오. 분별없이 칼질을 해대는 무뢰배와는 다르다고 자부하고 있소.”

“…음. 내가 실언을 한 것 같군. 미안하오.”

야스메티가 정중하게 사과하자 할렌도 표정을 풀었다.

“괜찮소. 그보다, 벌써 꽤 오래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데…명분이 필요하지 않겠소?”

“명분? 무슨 명분?”

“마을 사람들이 의심할 거 아니오.”

“그렇겠지. 허나 상관없소. 그들이 의심을 하든말든.”

“음?”

“확신도 없이 무슨 짓을 할 정도로 대범한 이들이 아니오. 그저 평범한 촌민들에 불과하지. 신경 쓸 필요 없소. 금을 직접 눈앞에 대고 보여주지 않는 한, 그들의 탐욕이 두려움을 넘어서지는 못할 테니.”

* * *

1차로 금을 수레에 싣고 옮겼다. 수레 몇 대가 더해졌지만 솔롬으로 가는 길은 평안했다. 군터는 솔롬에 도착하자마자 수레에 실은 금들을 성내 안쪽 창고에 옮기게 했다.

“장군. 금이라니, 어찌 된 일입니까?”

솔롬에 있던 수하들은 대충 듣기는 했어도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다. 군터는 그들에게 짤막하게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다들 쉽게 믿기 힘든지 고개를 저었다.

믿기 힘들지만, 창고에 수북이 쌓인 금덩이들을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거 참. 세상이 넓다지만 그런 신기한 괴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쨌든 경사로군요. 안 그래도 슬슬 군비 때문에 재정에 신경이 쓰이던 차였는데…….”

두 번째는 살라스가 한 말이었다. 군터를 대신해 솔롬의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던 그는 막대한 군비 때문에 이래저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전에는 판니른의 귀족 가문들을 비롯해 이런저런 유지들이 일부 비용을 지불해 주었는데, 군터가 새롭게 솔롬의 성주로 취임한 뒤로는 그런 지원이 딱 끊긴 상태였다. 덕분에 머릿수는 이전에 비해 더 늘었음에도 예산은 오히려 더 줄어들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군터도 그런 사정은 잘 알고 있었다.

“몰던에서는?”

“물론 몰던에서 적잖이 힘을 보태주고 있습니다만…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당장은 솔롬의 병력뿐이지만, 판니른의 국경에 퍼져 있는 방위군 역시 그의 관할인 만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허나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어찌 개인이 책임질 수 있겠나. 판니른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가 그와 손을 잡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동맹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공식적으로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는 없다. 결국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그 지원은 물밑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몰던도 마찬가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으로 솔롬 인근 지역의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아무리 비옥한 땅이라 한들 그곳에서 나는 것만으로 2만 병력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방도는 하나였다. 판니른의 부유한 귀족들과 상인들에게 후원을 받는 것. 새롭게 등장한 권력자에게 경계심, 혹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그들을 협박하든 회유하든 하여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제는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괴물의 금은 급한 숨통을 트여주었다.

“허나, 장군을 따를 이들을 끌어모으기는 해야 합니다. 금이 숨통을 틔워주기는 하였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살라스 공의 말이 옳습니다. 금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괴물을 통해 금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들 그 생산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야스메티가 살라스의 말을 거들고 나왔다.

그에 군터가 야스메티를 보며 물었다.

“허면?”

“그들을 청하십시오. 거창하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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