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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88화 (588/1,064)

588화

“…뱀?”

한 병사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과물이 조금 더 고개를 내밀었을 때, 병사는 괴물이 뱀과는 조금 많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뱀처럼 몸이 길지만, 뱀과는 달리 머리가 상당히 컸다. 또한 뱀에게는 있을 턱이 없는 다리가 있었다. 그것도 최소 네 개 이상. 굴에서 다 빠져나오지 않았기에 보이는 것이 네 개, 두 쌍이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뱀이라고 하기에는 괴물이 너무 컸다. 체고(體高)만 해도 족히 성인 남성 이상. 뱀처럼 기다란 몸은 서너 사람이 두 팔 벌려 끌어안아도 남을 정도로 굵다.

“저게…뭡니까 대체.”

누구 하나 당황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숱한 전장을 전전하면서 인간이 아닌 것들과도 여러 번 싸운 경험이 있었다. 정말 괴물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여러 차례 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괴물을 보고 입을 다문 것은, 괴물의 외형이 꽤나 불쾌했기 때문이다. 혐오스럽달까.

쿠룩. 쿠룩.

긴 혓바닥이 낼름거린다. 허공을 휘젓는 혀와 길쭉한 입가에서 끈적해 보이는 침이 줄줄 흘렀다. 그것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괴물의 혐오감을 더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번뜩이는 두 눈이었다.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번들거렸고,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음흉한 느낌을 주었다.

쿠룩?

괴물은 처음에는 당황한 듯했다. 황금을 옮기고 있는 병사들과 군터, 할렌 등을 번갈아 보더니 가만히 혀를 낼름거렸다. 번들거리는 눈알도 데굴데굴 굴렀다.

“뒤로 물러나.”

할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서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무장을 하기는 했지만, 창을 들고 있는 병사는 드물었다. 지하로 내려오는 통로가 좁은 데다 지하의 구조가 어찌 될지 몰라 패용하기 편한 검 위주로 무장을 했던 거다.

하지만 괴물의 덩치와 외형을 보아하니 무턱대고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가는 쓴맛을 보기 십상일 것 같았다.

‘이빨까지?’

낼름거리는 혓바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괴물은 이빨까지 있었다. 그것도 매우 촘촘하며, 부서진 검처럼 작고 날카로운.

‘저기에 한 번 물리면 끝이겠군.’

치악력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저 머리 크기만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장군.”

“내가 명하기 전까지는 모두 대기하라.”

그럴 줄 알았다.

군터는 그의 검은 창을 한 손에 쥐고서 괴물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저 괴물이 얼마나 흉포하고, 어떤 괴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야스메티 공.”

“음?”

“저 괴물에 대해 조금 더 말해주시겠소.”

야스메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것이 있었으면 진즉 말했지요. 내가 아는 거라고는 저 괴물이 돌을 먹으며 금을 만든다는 것과…….”

키에에에엑!

“…꽤나 사납다는 것뿐이오.”

* * *

범상치 않은 놈임은 처음 본 순간 알았다. 굳이 덩치라든지…날카로운 이빨 같은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음험하면서도 흉흉한 기세는 놈이 얌전히 땅속에서만 머무는 생물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빨. 그리고 꼬리.’

날카로운 이빨은 말할 것도 없다. 한 번 물리면 완전히 찢기기 전에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긴 꼬리는 우둘투둘한 돌기들이 돋아 있는 것이 꼭 철퇴 같았다. 틀림없이 이빨만큼이나 위협적인 무기일 터.

반면에 다리는 짤막한 것이 신경 쓸 필요 없어 보였다. 발톱이 있기는 했으나 저 짧은 발로 발톱을 휘두를 수는 없을 테니.

‘생각했던 것보다 크군.’

놈의 배설물들을 치우면서 파온 통로를 떠올려보면, 저런 커다란 몸뚱이가 그곳을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 흔적은 지금보다 더 작았을 때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큰 것일지도.

‘다리가 열 개라.’

괴물이 통로를 완전히 빠져 나왔다. 이쪽을 탐색하듯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인다. 하지만 놈은 곧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가는 놈의 눈을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괴물의 눈에 살기가 번뜩인 순간. 군터는 땅을 박찼다.

키에에에엑!

기괴한 포효. 다섯 쌍의 다리가 땅을 내리찍는다. 커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빠르다. 움직인다 싶은 순간 벌써 거리를 반 이상 줄여왔다.

누군가에게는 반응할 틈조차 없는 쾌속함이었지만, 군터에게는 아니었다. 그의 눈은 괴물의 움직임을 뚜렷하게 포착했다.

푹!

쭉 뻗은 창. 창끝이 괴물의 미간을 찔렀다. 군터는 아슬아슬하게 꽂힌 창을 회수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괴물이 피를 뿌리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괴물이 고통에 포효했으나 제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허공을 질주했다.

‘속도가 붙으면…정면에서 막지는 못하겠군.’

무리할 필요는 없다. 괴물은 확실히 빠르고 강했으나, 그뿐이다. 조금 더 봐야겠지만 특별히 주의해야 할 기이한 능력 같은 것은 없는 듯했다.

키에에엑!

미간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괴물의 덩치를 고려하면 작은 생채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처로도 괴물의 성질을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서걱!

다시 덤벼든 괴물. 이번에도 군터는 창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괴물의 왼쪽 앞다리를 베면서 옆으로 피했다. 괴물이 이번에는 단단한 벽을 들이받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튀었다.

쿠루룩!

괴물은 돌벽에다가 머리를 들이받았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멀쩡하게 몸을 틀었다. 가죽은 그리 튼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나 뼈, 최소한 두개골만큼은…….

“장군!”

할렌의 다급한 외침. 군터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느다란 무언가가 그의 얼굴이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침?’

괴물이 질질 흘려대던 걸쭉한 액체. 지저분해 보이기는 해도 특별히 눈여겨볼 점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방금 그의 눈앞을 지나간 것은 조금 전에 보았던 것과 뭔가 달랐다.

치익!

침이 땅에 떨어지자 침이 닿은 부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녹았다.

“오오. 위험하군.”

“무슨 한가한 소리를…….”

야스메티에게 눈을 흘긴 할렌이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장군께서 명이 있기 전까지는 물러나 있으라 하셨잖소.”

“그러셨지.”

“헌데?”

“볼 것은 다 보았으니 괜찮소. 대장이 싸우고 있는데 수하들이 칼 들고 멍하니 서 있는 것도 꼴사납지.”

“쯧. 난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시구려.”

할렌은 뒤로 물러나는 야스메티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성질을 부리고 있는 괴물과, 날렵한 몸놀림으로 괴물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면서 차근차근 창을 찌르고 휘두르는 군터를 보았다.

“보았겠지! 놈은 덩치에 안 맞게 재빠르니 절대 놈의 정면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해라! 놈의 꼬리 역시 마찬가지! 놈의 측면을 잡고 저 지저분한 침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는 거다!”

“예!”

긴장한 기색은 있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생사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이니, 조금 특이한 괴물 하나 상대한다고 해서 겁을 먹을 리 없다.

“끼어들 참이냐.”

군터는 이제는 거의 발광을 하고 있는 괴물에게서 슬쩍 거리를 벌리면서 할렌 등을 흘겨보았다.

“명을 따르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주인이 일을 하는데 아랫것들이 어찌 손을 놓고 있겠습니까.”

“옆에 놈을 닮아 많이 뻔뻔해졌구나. 좋을 대로 해라.”

군터가 혀를 차며 말하자 야스메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뭘 어찌 했다고.”

할렌과 병사들이 끼어들자 군터는 여유로워졌다.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가까이 붙으면서 괴물의 주의를 끌었다. 병사들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뒤쪽에 있는 꼬리는 어찌할 수 없다 해도, 괴물의 눈길을 붙드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훨씬 더 안전해진다.

와득!

괴물의 이빨이 코앞에서 다물렸다. 지독한 입 냄새가 코를 찔러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군터는 냅다 창을 휘둘러 괴물의 턱밑을 올려 쳤다.

쾅!

뜻밖에도 괴물의 턱밑은 얼굴 쪽과 달리 매우 단단했다. 피부가 없이 통째로 뼈로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흡!”

창날은 괴물의 턱을 깊숙이 베지 못했다. 살짝 틀어박힌 정도였다. 제대로 공격을 먹이지 못했으니 그대로 빠지면 될 것이었으나, 군터는 물러나지 않고 잔뜩 힘을 주었다.

키에에에에-!

괴물의 커다란 머리가 위로 들렸다. 창대가 부러질 듯 휘었고, 괴물의 비명이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왔다. 괴물은 버둥거렸으나 두 다리를 벌리고 선 군터는 전력으로 창을 들었다.

“지금이다!”

군터가 괴물을 꼼짝못하게 붙드니 할렌과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괴물의 양 옆구리를 마음껏 찌르고 베었다.

치익!

“……!”

걸쭉한 침이 피와 섞여 흘렀다. 군터가 재빨리 괴물의 몸뚱이를 걷어차며 거리를 벌렸다. 흘러내린 침이 땅에 닿자 이전과 같이 땅이 녹았다.

‘자연적인 것은 아니군.’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이번에 다시 확인했다. 괴물의 저 침은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위적인 작용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침이 흐르기 전, 기이한 기의 흐름을 느낀 것이 그 증거다.

‘상대하기 어렵지 않아.’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군터의 기감은 고위 술사들 이상. 그러니 괴물이 허튼 짓거리를 하기 전에 미리 알아채고 반응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이빨이나 꼬리 같은 것이야 보고 피하면 그만이고.

쿠루룩.

할렌과 병사들의 일제 공격은 괴물에게 그럭저럭 피해를 입혔다. 괴물의 가죽은 군터의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닐지라도, 사실 꽤 튼튼한 편이었다. 칼이 잘 박히지 않을 정도이니, 확실히 평범한 짐승들과는 비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군터에 의해 완전히 움직임이 봉쇄된 상황에서 작정하고 칼질을 해대니 괴물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상처와 피로 범벅이 되었다.

쿠루-쿠루룩.

괴물은 고통스러워서인지, 아니면 겁을 먹어서인지 꼬리를 크게 휘둘러 대면서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장군. 저 괴물을 사로잡을 수는 없겠습니까?”

“사로잡아?”

괴물에게 천천히 다가서던 군터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장군께서도 보셨다시피, 대단히 쓸모 있는 괴물이 아닙니까. 세상 어디에 돌로 금을 만들 수 있는 생물이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지만, 저것이 그리 순순히 사로잡혀줄 것 같은가?”

“으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여차하면 다리를 싹 다 잘라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움직이지 못하면 무슨 위협이 되겠습니까. 아! 저 침이 문제일 수도 있겠군요. 으음…그렇다면 옮기는 동안 주둥이를 묶어버리면…….”

야스메티는 벌써부터 괴물을 사로잡는 것을 기정사실로 놓고 있는 듯했다. 군터는 혀를 차면서도 야스메티의 말처럼, 괴물을 사로잡는 것이 꽤 이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괴물 아닌가. 저 괴물을 사로잡아 잘 써먹을 수 있다면 큰 이득일 것이다. 물론 괴물이 얼마나 금을 생산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지만.

“한 번 해보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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