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크렘보르 가문과 우슈무르 가문의 혼사는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다.
식이 끝난 후. 군터는 임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자식 부부와 시간을 보냈다. 새롭게 크렘보르 가문의 일원이 된 엘리야는 그를 깍듯이 대했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는 티가 많이 났지만 군터가 신경 써서 그녀를 대해주고, 엘리야 역시 시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나름대로 노력을 하니 가족 식사를 할 때 어색한 분위기가 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노력 외에, 실비아의 영향도 컸다. 실비아는 엘리야와 이미 전부터 친분을 쌓았는지, 식사자리에서 끝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엘리야 역시 활기찬 시누이에게 친절하게 대하니 결혼식이 끝난 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았지만 한 가족이 된 지 몇 년이나 지난 것처럼 사이가 돈독했다.
“이번에 떠나시면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글쎄. 지금으로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아무래도 1, 2년 내로는 힘들겠지.”
보리스의 물음에 담담히 답한 군터는 곧이어 한 마디를 더했다.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문의 본가는 이제 솔롬이라는 것을 잊었느냐.”
“아…그랬지요. 허면 저희는 언제쯤 솔롬으로 옮겨 갑니까?”
“그 또한 지금으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구나.”
보리스와 실비아. 그리고 엘리야까지. 본가가 솔롬에 있으니 그들 모두 솔롬으로 옮겨오는 것이 좋지만, 그러려면 황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런데 황자가 순순히 허락을 해줄까? 변경의 권력자들은 그 가족을 수도나, 그게 아니라도 중앙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앙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변경에서 힘을 휘두르는 자들이 자칫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잘라 말해 인질. 즉, 목줄인 것이다.
군터가 황자에게 신임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능력에 대한 신임이지 충성에 대한 신임이 아니다. 또한 충성을 의심받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손에 쥔 목줄을 놓아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일단은 이곳의 일에 신경 쓰고 있어라. 모페이브가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구나.”
“그 분은 제가 뭘 하든 항상 칭찬해주십니다.”
“그래도 없는 말을 하지는 않아. 내가 없어도 네가 알아서 잘하니 내가 마음이 놓인다.”
부친의 칭찬을 들은 보리스가 멋쩍게 웃었다. 듣기로 수하들에게나 동료들에게는 상당히 호전적인 성미로 알려져 있다는데 집안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친의 앞이라서가 아니라, 보리스는 집안에서와 밖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군터도 야스메티와 모페이브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로 인해 보리스에 대한 걱정을 더욱 덜어낼 수 있었다.
밖에서와 안에서의 행실을 구분한다는 건 그만큼 이성적이라는 뜻. 보리스가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면 경솔함으로 화를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족 식사가 끝난 후. 군터는 보리스를 그의 방에 따로 불렀다.
“어려운 일은 없느냐.”
“아조프 장군께서 살펴주시는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보리스의 직속 상관은 빌리치 아조프였다. 군터와 친분이 있는 그는 보리스에게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었고, 보리스는 그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으며 그의 총애를 얻었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한 편에, 부하들도 그를 믿고 따르니 군문에서 보리스의 평판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실비아는 어떠냐.”
“예? 그게 무슨…….”
“쯧.”
군터가 혀를 차자 보리스는 그제야 말뜻을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음…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루시님이 몇 번 집에 찾아오셨을 때도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일부러 밖으로 나가더군요.”
벨리사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루시는 크렘보르 가문의 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 벨리사를 바로 옆에서 따르던 시비였던데다, 그의 남편 역시 군터의 측근인 할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루시는 결혼을 하여 크렘보르 가문을 떠난 뒤에도 거의 매일 벨리사를 찾아와 인사를 했다. 자연히 보리스와 실비아 역시 루시를 가족처럼 여겼다.
그러나 벨리사가 죽은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실비아는 루시가 벨리사를 죽였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루시의 부주의함이 벨리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했다. 군터와 보리스가 따로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그녀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루시를 증오했고,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했다. 그러니 자연히 루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크렘보르 저택을 찾는 일도 뜸해졌다.
“실비아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어떠냐.”
“저는…….”
보리스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씀드려서…저 역시 아직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그래도 내색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듯,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누군가를 원망한들 그것이 분풀이 말고 무슨 다른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말이 옳다.”
“하지만 실비는 어립니다. 아무리 말로 타이른들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그 어떤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군터도 보리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생각이 깊어졌구나.”
“남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 또한 자밀에게서 배운 것이냐?”
“현명한 친구입니다. 제게 이런저런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지요.”
어떤 옛 현인이 말하길 좋은 친구는 열 개의 금화보다 값지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적어도 보리스에게는.
“내가 없어도 가족들을 잘 이끌거라. 지금까지도 잘 해왔으니 걱정은 없다.”
“예. 심려치 마십시오.”
* * *
군터는 올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테리브란을 떠났다. 야스메티를 비롯해 시어문드 등의 무리가 합쳐지니 그 인원이 대략 백 오십에 이르렀다.
“아직 같은 생각인가?”
군터가 묻자 야스메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흥미롭지 않습니까.”
야스메티는 판니른으로 들어설 때 군터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갈 것을 권했다. 보다 정확히는 일전에 군터가 하루를 묵었던 그 마을을 들를 것을 권했는데, 다름 아닌 금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말씀해주신 것을 듣고 나름대로 수소문을 해봤습니다. 타 주의 이야기인지라 테리브란에서 정보를 얻기는 힘들었습니다만, 확실히 거짓은 아닌 것 같더군요.”
데이븐랏지에서 판니른의, 그것도 궁벽한 개척촌의 정보를 알아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군터가 판니른에 부임하게 되면서 야스메티가 진작부터 판니른으로 정보원을 보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집한 정보는 광범위했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정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사금이 흐른다는 강에 대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그곳에 금광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느냐.”
“예, 뭐. 그렇지요.”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냐. 어차피 이쪽에서 손을 대기는 어렵다.”
이미 예전에 개척촌 설립을 추진했던 상인이며 관리들이 광산을 찾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찾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
게다가 어찌어찌 찾는다고 해도 문제다. 그 마을과 솔롬까지의 거리가 있는데, 찾는다고 한들 어찌 관리할 것인가. 명분도 없으니 금광이 발견된다고 해도 인근의 유지나 관리들에게 할 말이 마땅치 않다.
“장군께서 염려하시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게 생각이 있으니, 며칠만 내어주시지요.”
“무슨 생각?”
“일단은 가서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괜히 지금 말씀드렸다가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요.”
온 길을 되짚어가는 것이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돌아갈 때는 다른 경로로 이동하며 판니른의 이곳저곳을 살펴볼 생각이었기에 야스메티의 요청이 썩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군터는 야스메티의 뜻대로 해주었다. 확신은 없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보였고, 이제껏 야스메티의 뜻을 따라 손해를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 이번에도 그러기로 했다.
“아하.”
판니른에 들어서고 며칠 후. 일전의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 야스메티는 자그마한 산에서 이어진 물줄기를 보며 눈을 좁혔다.
“흐음.”
몇 번이고 산과 개천을 번갈아 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군터에게 말했다.
“장군. 이곳에서 며칠 머물며 저 산을 탐색해봐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것은 없지만, 무슨 생각인지 이제는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나?”
“제가 어렸을 때, 제 조부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괴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괴물이라고?”
“예. 처음 들었을 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여겼습니다만, 조부께서 이런저런 증거들을 보여주시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요. 아무튼, 그때 들었던 이야기에 나온 지형과 이곳의 지형이 아주 흡사합니다. 아니, 그냥 똑같습니다.”
“제국 내에 괴물 같은 것들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솔직히 모르는 일이지요. 광활한 37개 주에 무엇이 숨어 살고 있을지 어찌 안단 말입니까.”
“…좋아.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지.”
우스운 소리는 해도 헛소리는 하지 않는 야스메티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군터도 흥미가 생겼다.
“그러니까…돌을 먹어치우는 어떤 괴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야스메티가 미리 경고(?)한 것처럼 꽤나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 * *
야트막한 산을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헤집었다. 작은 산이라고 해도 명령을 받은 대로 샅샅이 뒤지려고 하니 꽤 시간이 걸렸지만, 며칠 동안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탐색을 하니 오래지 않아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찾았습니다!”
“확실한가? 이번에도 뱀구멍을 보고 착각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이번엔 확실합니다. 말씀하신 조건에 딱 맞습니다!”
“그래?”
히죽 웃은 야스메티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안내하는 장교를 따라 산을 올랐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을 꾸역꾸역 오르던 중, 안내하던 장교가 중간에 방향을 꺾어 움푹 파인 지형으로 내려갔다.
“이곳입니다.”
“그래. 어디 보자…….”
야스메티는 장교가 가리킨 곳 앞에 주저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자그마한 구멍 같았다. 그러나 뱀이나 쥐구멍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이 파헤쳐 놓아 바로 알 수 있었다.
조금 들어간다 싶더니 희끄무레한 돌 같은 것에 막혀 있었다.
툭툭!
야스메티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것을 두들겼다. 몇 번 그것을 반복하더니 그가 씩 웃었다.
“그래. 이거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