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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85화 (585/1,064)

585화

“경하드립니다.”

“고맙네.”

그가 테리브란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다. 하루면 소식이 퍼질 것을 알고 있었고, 결혼식 전에 찾아올 이들이 적지 않을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찾아온 이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언제 오게 되었나?”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장군께서 판니른으로 부임하신 기간과 살짝 겹쳤었지요. 바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 했었는데, 참 공교롭게 됐지 뭡니까.”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됐지 않나.”

“그 말씀이 옳습니다.”

홀로 군터를 찾아온 사내. 그는 시어문드였다. 일전에 바크렌에서 그와 연이 있던 자로, 잠깐이나마 함께 전장을 누비기도 했었다. 한 번은 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본래 시어문드는 베이고르군에 속했었으나, 7황자의 군대가 베이고르를 무너뜨리고 바크렌을 탈환할 때 군터의 투항 권유를 받아들여 제국으로 전향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대로 베이고르에 남았었는데, 이번에 테리브란으로 자리를 옮겨오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장군을 따를 것을 그랬습니다.”

“앞날을 아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군터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시어문드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저는 제가 남아서 할 일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지요.”

서론은 길었지만, 결국 흔한 이야기였다. 전쟁에는 능하지만 정쟁에는 미숙한 군인이 노련하고 욕심 많은 정치가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회의만 잔뜩 느끼고 마음이 꺾였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시어문드 본인에게는 좀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듣는 입장인 군터에게는 딱 그 정도였다.

“미련은 없나?”

“예. 없습니다.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그 날, 모두 다 털어버렸습니다.”

“그런가.”

시어문드는 바크렌에서 누리던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그를 따르는 몇몇 수하들과 함께 군터에게 의탁하기를 청했다.

군터로서는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시어문드는 뛰어난 군인이었고, 훌륭한 지휘관이었으니까. 그는 기꺼이 시어문드와 그의 수하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제 자리는 있는 것입니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어문드가 농담조로 웃으며 말했다.

“자리는 구하는 게 아니라 얻어내는 것 아닌가. 자신 없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군터는 시어문드가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결국 그의 수하들과 잘 어우러지리라 믿었다. 시어문드의 실력은 그가 잘 알았고, 성격에도 크게 모난 부분이 없으니 오래지 않아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군터가 맞이한 뜻밖의 손님은 시어문드만이 아니었다. 한동안 소원했던, 앞으로도 자주 보기 힘들 것 같았던 지인이 그를 찾았다.

“장군. 그간 잘 지내셨소.”

“보시다시피. 사이주 공은?”

“나 또한 무탈했소이다.”

사이주 제레이스는 군터가 개인적으로 교분을 나눈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도 과거의 일로, 군터가 제레이스 가문과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는 간간이 서신으로만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 직접 만난 일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이주 제레이스가 직접 그를 찾아온 것이다. 물론 명분이야 있다지만, 가주의 눈 밖에 날 수도 있는 일인데 이렇게 찾아오다니.

“어째, 내가 찾아온 것이 썩 반갑지 않은 모양이오?”

“그럴 리가. 반갑긴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되는군.”

“형님의 눈총을 살까봐서 말이오?”

사이주 제레이스가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장군은 기회를 잡은 것뿐이고, 우리 가문은 우리 가문 나름의 사정에 따른 것뿐이니.”

“그리 생각해주면 고마울 뿐.”

“그러나…그대와 형님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참지 그랬소? 내 형님은, 동생된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그리 속이 넓은 분은 아니라오.”

군터가 물끄러미 그를 보니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돌았다. 그에 군터도 옅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오. 그때는…글쎄, 조금 감정적이었소.”

“흐음. 내가 장군을 아는데 장군이 경솔하게 행동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사실 내가 방금 형님의 흉을 보았지만, 원래 그런 분은 아니었소. 물론 그 전에도 딱히 아량이 크거나 한 분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또 속이 좁은 분은 결코 아니었지. 그러나 형님이 가주가 되신 후에는…조금 변하셨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 말이 맞지. 후계자라고는 해도 일개 귀족 권신이었을 때와 제레이스의 가주가 되고 나서가 같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조금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구려.”

“힘든 모양이오.”

“내가?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럴지도…….”

몸은 테리브란을 떠나 있었지만, 그간 야스메티에게서 꾸준히 테리브란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나 정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어왔다. 그 주에는 당연히 제레이스가 가문에 대한 것도 있었다.

‘가주의 의심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더니.’

권력자는 의심이 많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진 게 많을수록 탐하는 자는 많아지니,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특히 제레이스 가문의 가주 정도가 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사이주 제레이스는 현명한 자라서 예전부터 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일체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처신은 효과가 있어서, 현 가주인 다이시리 제레이스도 다른 이들은 몰라도 사이주 제레이스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나 요 1년 사이, 그런 과거의 신뢰는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가주의 의심은 기어이 몸을 낮추고 있던 사이주 제레이스에게까지 닿았다. 거기에는 군터와의 친분도 한몫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야스메티는 그럴 것이라 추측했고, 군터도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이렇게 직접 찾아오다니. 이왕 눈 밖에 났으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군터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차로 입술을 적시던 사이주 제레이스가 담담히 말했다.

“이제 다 내려놓으려 하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형님께서 나를 의심하시니 어쩌겠소. 아예 속에 있는 것을 다 보여드리고, 원하신다면 다 털어버려야지. 하하.”

말은 쉽게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가진 모든 것을,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는 그저 제레이스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쉽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허나 어쩌겠소. 살려면 그리 하는 수밖에.”

“…….”

“조카 녀석이 그렇게 간 후에 형님은 예민해지셨소. 그럴 만도 하지. 가문 내에서 조카 녀석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아니,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 일에 대해서는 군터도 들은 바가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 4개월 전이었던가?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장남이 말을 타고 도시 밖으로 나갔다가 낙마한 뒤에 의식을 찾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뒀다고 했다. 낙마 사고야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고, 중상을 입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는 경우는 꽤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제레이스 가문 내에서는 가문의 후계자가 독살을 당한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주의 의심병이 더 크게 도졌던 것이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사이주 제레이스의 입장에서는 괜한 불똥을 맞은 셈이다. 그 역시 제레이스의 혈족으로, 계승권이 있는 몸이었으니까.

“아마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소. 이후로는 외부의 행사에 얼굴을 비출 일이 없을 테니까.”

“유폐라도 당하는 거요?”

“자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사이주 제레이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소. 내 한 몸만 건사하는 거라면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딸린 가족들이 있으니 그럴 수는 없지.”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아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날. 군터는 사이주 제레이스와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 * *

“경하드립니다.”

“축하하오.”

군터는 그에게 다가온 이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그가 이 결혼식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하객을 아무나 받지 않았다. 따지고 따져 초대장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만 보냈다. 그런데도 준비한 연회장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무수한 인파가 몰렸다.

“흐으. 정신없군요. 자리를 조금 더 넉넉하게 준비할 것을 그랬습니다.”

잠시 여유가 생겼을 때, 야스메티가 다가와 말했다.

“보리스는?”

“모페이브 공이 옆에서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우슈무르 쪽은 어떤가.”

“그쪽의 손님도 꽤 되니, 나름 바쁘지요.”

크렘보르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우슈무르 가문 역시 선대의 연이 있는 가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우슈무르와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이런 날 기꺼이 찾아와 얼굴을 비출 정도는 되었다. 물론 초대를 받아 온 김에 크렘보르 가문과 연을 맺으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니, 우슈무르 가문에게 초대를 받은 이들은 빠짐없이 모두 결혼식에 참석했다.

“바글바글하군. 크렘보르 가문의 위세가 대단한걸.”

“왔군.”

“초대를 받았으니 와야지.”

두 사내가 웃으며 다가왔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몇 발자국씩 물러나 그들이 군터에게 다가갈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군터 또한 그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비스칼 구르얏트와 빌리치 아조프였다. 각각 가문을 대표하여 결혼식에 참석한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군터와 함께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야스메티가 다가와 또 다른 손님들을 맞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들과 좀 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얼마간 접객을 하고 나니 준비가 끝났다. 군터가 자리에 앉으니 곧 오늘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보리스 크렘보르와 엘리야 우슈무르. 그들은 여명교단 사제의 앞에 가 나란히 섰고, 사제는 그들을 번갈아 보며 미소짓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축사를 시작했다.

군터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듯하지만 두 뺨의 홍조를 지우지 못한 보리스를 보면서, 군터는 황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말했던 것과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행복한 얼굴로 우슈무르의 여식과 눈을 마주치는 보리스를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도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문득, 실비아가 앉아있는 옆자리가 눈에 밟혔다. 본래였다면 벨리사가 앉아있어야 할 그 자리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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