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길을 재촉한 군터 일행은 예정보다 하루하고 한나절 정도 일찍 테리브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군터는 테리브란에 들어서자마자 궁으로 향했다. 테리브란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미리 입성할 것을 알렸고, 황자는 오자마자 입궁할 것을 명했다.
“바쁘게 달려온 모양이군.”
“괜히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고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황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많이 잡아봐야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저 외모와 50대의 중년인을 어찌 연상할 수 있을까. 황제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인간 아닌 것들을 증오한다는 그지만, 정작 그 자신도 별로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부임하자마자 화려하게 일을 벌였어. 덕분에 나만 곤란해졌다네.”
“송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게. 가증스러우니까.”
“…….”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 터. 군터는 황자의 속내를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황자는 조정에서 여러 파벌의 다툼을 다스리는 조정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직접 전면에 나서지는 않으면서 권력자들의 다툼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원하는 바를 얻는다. 야스메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매우 효율적인 정치가였다.
“귀족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귀족다운 모습이 보이는군.”
“꾸지람입니까?”
“아니. 칭찬이다. 권력의 때가 타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
이게 정말 칭찬인가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황자는 아직 웃는 낯이었다.
“그런데, 제레이스 가주와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자네에게 썩 감정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네. 제레이스와 자네가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으르렁댈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제레이스 가주가 자네에 대해 이상하게 예민하더군.”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일전에 그는 다이시리 제레이스를 한 번 감정적으로 몰아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당시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당황하면서도 크게 노했었다. 그때의 감정이 남은 것이라면 그가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됐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제레이스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배신자라고 할 수도 있다. 객장이었던 이가 가문의 정적 비슷한 것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새로운 임지는 어떻던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빈말로도 좋다고는 안 하는군.”
“…….”
황자가 피식 웃었다. 제법 변한 것 같으면서도 이런 면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건 부작용 때문이 아니라, 본래 사람 자체가 이리 생겨 먹은 것이라 봐야 한다.
“뭐, 좋아. 자네가 그곳에서 누구와 어떻게 어울리건 나는 관여치 않는다. 그러나 맡은 일은 제대로 해주길 바라네. 자네에게 중임을 맡긴 것은 그 일을 제대로 해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요는 너무 ‘귀족놀이’에 심취하여 임무를 잊지는 말라는 뜻. 그 점은 군터 본인도 충분히 생각했던 것이기에 황자의 당부에 담담히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축하하네. 자식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어떤가?”
“떠나보낸다 하심은.”
“언제까지나 내 품에 있을 것 같았던 녀석이 품을 빠져나가 가정을 일구게 되면, 그 기분은 정말 설명하기 어렵지. 자네도 느끼고 있나?”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크든 작든 느끼게 될 것이야. 혼례를 치르면서, 낯선 타인을 세상 전부인 것처럼 쳐다보는 자식을 눈에 담으면…느끼게 될 수밖에 없네.”
그러고 보면 황자에게는 자식이 여럿 있었다. 그 자식들 중에는 벌써 혼인을 하여 아이를 본 자들도 있었고. 당연한 일이다. 겉으로는 젊은이처럼 보여도 50대가 넘어가는 중년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경험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군터는 황자가 이야기하는 ‘무언가’가 궁금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말처럼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다.
* * *
“아버지.”
궁을 나오자마자 보리스가 군터를 맞이했다. 그 뒤로 모페이브, 야스메티 등 군터의 가신들이 줄지어 있었다.
“기다렸구나. 바쁜 몸일 터인데.”
“제가 바쁠 일이 있겠습니까.”
보리스가 멋쩍게 웃었다. 티브리악 가주가 선물한 검을 등에 찬 그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층 더 성숙해진 것 같았다.
“우슈무르 가문에서도 언제든 이쪽이 편할 때 찾아뵙겠다고 했습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일정을 잡아라. 어차피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역시 네가 알아서 해라.”
“아…예. 알겠습니다.”
외부 인사들을 접대하는 일은 모두 맡기겠다는 뜻이다. 보리스는 처음에는 얼떨떨해 했지만, 곧 책임감을 느끼는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식사가 준비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군터가 저택으로 들어가고, 가신들은 가주의 휴식을 위해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공자.”
야스메티가 다가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축하는 무슨.”
“어찌 보면 장군께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가주 수업을 미리 받는다고 생각하십시오.”
“가주 수업……?”
전혀 생각도 않던 말을 들었다. 보리스의 표정이 대번에 묘해졌다. 그러자 야스메티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뭘 그리 반응을 하십니까. 당연한 일 아닙니까. 장군께 아들이라고는 공자 하나인데, 장군의 뒤를 이을 사람이 공자 말고 더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보리스는 크렘보르 장군 가의 후계자다. 세상이 다 알고, 당연히 장본인인 보리스 역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주 수업이니, 뒤를 잇느니 하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 한 번도 부친의 뒤를 잇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부친의 뒤를 잇는다. 즉, 크렘보르 가문의 가주가 된다는 것은 부친인 군터의 사후에 일어날 일이다. 즉, 부친의 죽음을 전제하는 것.
물론 사람은 모두 죽는다. 하지만…보리스는 그의 부친이 죽는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칼에 맞아 죽는 것은 물론, 세월에 굴복하여 죽는 것 역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제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날이 올까요.”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공도 아시지만…제 아버님이 범상한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전 그 분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군요.”
“음…….”
야스메티는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군터의 죽음은 그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지만, 그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모페이브가 부린 신이한 술법의 역할이 크긴 했지만, 죽음을 경험하고도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군터 역시 분명 평범한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늙지도 않으시지요. 어머님께서 종종 한탄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세월이 아버지만을 비껴간다고 하셨지요.”
군터도 적은 나이가 아니다. 아직은 현역이지만, 앞으로 20년. 아니, 15년 정도만 지나도 무인으로서의 전성기는 꺾인다. 사실 그것도 보통의 이야기지, 군터처럼 거칠게 전장을 누벼온 이들은 40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몸이 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군터는 멀쩡했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의 존재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확실히 장군께서는 언젠가부터 그 모습 그대로셨지. 부인께서 한탄하실만하다.’
야스메티는 작고한 장군 부인의 마음을 이해했다. 세월이 흐르며 자신의 얼굴에는 주름이 지는데, 반려의 모습은 그대로라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법도 하다. 그런 박탈감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여인의 원초적인 욕망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비극도 그런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궁금하긴 하단 말이지. 한 번 죽음을 겪으셔서 그런 것인가.’
야스메티는 술법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이론이나마 배워보려면 배울 수도 있었지만 그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에게 술사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손에 쥐지도 못할 것에 눈길을 주는 미련한 사내가 아니었다.
“흐음. 그래서 공자께서는 상심하고 계십니까?”
“상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보리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특별하신 분이고, 따라서 평범한 인간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분이지요. 저는 머리 아프게 고민하기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뭐, 혼인도 하게 된 마당인데 아이라도 빨리 낳아서 잘 키우면 그것이 가문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니겠습니까?”
“현명하십니다.”
“하하. 너무 띄워주지는 마십시오. 그런다고 뭐 나올 것도 없으니까요.”
야스메티는 보리스가 어리석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권력자의 자식들은 엇나가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손에 들어오니 방만하고 나태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욕망 없이, 쾌락에 빠져 세월을 보낸다. 의미 없고, 한심하기 그지없는 삶이다.
허나 크렘보르 가문의 공자는 어려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그런 한심한 자들과는 비할 수 없이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사과나무 아래서 가만히 입을 벌린 채 사과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스스로 나무를 오르고, 작대기를 찔러 사과를 떨어뜨릴 줄 안다.
이 얼마나 기특한가. 야스메티는 군터가 쓰러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 해도 크렘보르 가문이 무너질 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뿌리가 튼튼하니, 바람 한 번 세차게 분다고 나무가 뽑혀 나가겠는가.
“공은 곧 떠나신다지요?”
“예. 그리 하기로 했습니다. 공자의 혼례가 끝나고 나면 장군과 함께 솔롬으로 갈 계획입니다.”
“아쉽군요. 공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었는데 말입니다.”
보리스가 아쉬워하자 야스메티가 잔잔하게 웃었다.
“공자는 이제 제 조언이 필요치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우둔하다는 것은 저 자신이 잘 압니다.”
“인간은 모두 우둔합니다. 예외 없이 모두요. 그러므로 거기서 더 우둔한 자는 자신이 우둔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입니다. 자기가 똑똑한 줄 알고 오만하게 행동하지요. 내 생각이 옳다고 맹신하여 신중하지 못하고, 남의 조언을 가벼이 여겨 일을 그르칩니다.”
보리스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말솜씨가 좋으십니다. 듣기에 좋군요.”
“듣기 좋으라고 드린 말이 아닙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공자께서는 스스로 부족함을 아시고 여러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니 일이 닥쳤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혹 실패한다 해도 크게 실패하는 일은 드물 테지요. 그러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얼간이들은 한 번 넘어질 때 크게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스메티가 몇 걸음 앞서가며 마저 말을 이었다.
“최대한 귀를 열고, 최대한 많이 들으십시오. 아, 물론 듣기만 하고 정작 움직이지 못해서는 안 되겠으나…공자께서 그러실 일은 없겠지요.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 또한 공자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닙니까.”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보리스가 공손히 예를 표하자 야스메티가 아니라는 듯 손을 저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디 급하게 가실 곳이 있으십니까?”
“하하. 이제 곧 떠나게 되면 한동안은 돌아오지 못할 텐데, 떠나기 전에 원없이 즐겨놔야지요.”
가볍기 그지없는 웃음에 보리스가 실소를 흘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