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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83화 (583/1,064)

583화

군터는 정확히 백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솔롬을 나섰다. 그는 호위로 할렌과 아드리안을 대동했다. 할렌은 군터의 부름을 받은 것이 기쁜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밝은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어쩌면 조금은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미련한 놈.’

할렌을 원망하는 마음 따위는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벨리사가 죽었을 때는 화가 났지만, 할렌과 루시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 독물에 명을 달리한 귀부인들이 여럿이었다. 건강을 해친 이들은 셀 수도 없었다. 황도에서 유행하는 것이라는 말만 믿고 그대로 따랐던 이들의 말로가 그랬다. 그나마 이것도 나은 편이었던 것이, 듣기로 황도에서는 아예 피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많은 곳에서 그저 아름다워지고 싶었던 여인들이 숱하게 목숨이나 건강을 잃었다고 하고.

심지어 루시조차도 그랬다. 아주 조금,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렸던 그녀는 지금도 잔병을 달고 사는 중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벨리사는 불운했다. 그뿐이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낮보다 느릿하게 말을 몰던 중. 군터는 저 멀리 보이는 한 그루 나무를 보며 입을 뗐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예?”

“벨리사의 일은 네 탓도, 루시의 탓도 아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지.”

“…….”

할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 치밀어 오른 듯,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가 피맺힌 입술을 달싹인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부인께서는 저와 제 아내에게 평생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뭐가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저희는 그런 부인의 은혜를…….”

“벨리사가 이런 것을 원하겠느냐.”

“…….”

“알고 있다면 그 시답잖은 자기 연민은 집어치워라. 억지로 짜내는 눈물이야말로 벨리사에 대한 기만일 것이니.”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잘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이후는 네 녀석의 몫이다.’

해줄 수 있는 말은 다 해줬다. 이렇게까지 말을 해주었음에도 계속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는 그도 할렌에 대한 총애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늘 죽상을 한 채 처져 있는 녀석에게 중임을 맡긴다면 다른 수하들도 불만을 가질 테고, 그것은 군터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 * *

살라스를 비롯한 수하들이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습격은 없었고, 그 어떤 자잘한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하! 이렇게 움직이면 암습자가 따라붙으려고 해도 따라붙지 못할 겁니다.”

아드리안의 말대로 그들의 이동속도가 워낙 빨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백 명 한 명인데 말은 그 두 배다. 타고 있는 말이 지치면 바꿔 타기 위해 한 마리를 더 끌고 온 것이다. 그들은 시급을 다투는 전시인 것처럼 서둘러 움직였다. 딱히 암습자들을 의식한 것은 아니고, 굳이 길에서 시간을 버릴 필요가 없기에 최대한 길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장군! 마을입니다!”

선두에서 길을 밝히던 정찰병이 저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 군터는 그가 외치기 한참 전부터 앞에 작은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해서 제 역할을 다하는 정찰병의 노고를 깎아내리지는 않았다.

“운이 좋군요. 날도 저물었는데 저 마을에서 하루 쉬어가면 되겠습니다.”

아드리안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전장에서 잔뼈가 굵고, 야지의 바람을 맞으며 밤을 보내는 것이 익숙한 그라고 해도 역시 하루라도 편히 쉴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저곳은 누가 다스리는 마을이냐.”

“음…잘 모르겠습니다만, 가서 알아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공식적으로 제국의 모든 도시며 마을은 해당 지역 정부의 관할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곳에 자리 잡은 귀족이나 유지의 손이 닿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갈 길이 바쁜데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이번에 끌고 온 병사들은 군터의 친위병들이었다. 그런 만큼 그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정예인 것과는 별개로 워낙 거친 녀석들인 데다 며칠 동안 고생을 한 탓에 다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여러모로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문제 일으키는 일 없도록 병사들을 단속하겠습니다.”

아드리안이 군터의 속내를 읽고 잽싸게 말했다. 그제야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가서 준비시켜라.”

“예.”

아드리안이 이십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말을 달렸다. 잠시 후. 군터는 마을 밖으로 그를 마중 나온 백여 명의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서, 성주님을 뵙습니다.”

촌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부들부들 떨면서 납작 엎드렸다. 그 뒤의 마을 주민들도 급하게 그를 따라 엎드렸다.

“이야기는 들었나.”

“예, 옛. 하, 하루…….”

“그래. 하루 머물러 가겠다.”

“모시겠습니다.”

벌벌 떠는 촌장을 대신해 아드리안이 군터를 안내했다. 이미 이 작은 마을을 한 번 둘러본 듯, 군터를 안내하는 아드리안의 발걸음은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누추합니다만,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머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촌장의 집인가?”

“예.”

작은 마을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보잘것없었다. 아드리안이 안내한 곳은 그 중에서 그나마 가장 번듯해 보이는 집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관리를 잘했는지 내부는 꽤 깔끔했다. 그럴싸한 가구들도 몇 개 있었고.

“식전이었던 모양이군.”

“예, 뭐.”

거실에 있는 식탁에는 그리 맛있어 보이지는 않는, 뭘 넣었는지 모를 스프와 기름기가 별로 없는 고기, 오트밀, 등등.

보아하니 막 식사를 하려던 차에 불청객의 방문을 받은 듯했다.

“치우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촌장 일가를 불러와라.”

“예.”

곧 파리한 안색의 촌장과 그의 아내, 딸로 보이는 처녀가 들어왔다. 그들은 감히 군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땅에 못 박았다.

“식전이었던 것 같은데, 들지. 아, 한 사람 몫을 더 준비해줄 수 있겠나?”

“예?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지만, 누구의 명이라고 토를 달까. 촌장의 아내는 덜덜 떨면서도 곧바로 음식을 준비했다.

군터는 작은 탁자의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아직도 돌처럼 굳어 있는 촌장 일가에게 자리를 권했다.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예, 옛.”

“들지.”

그 한 마디로 불편한 식사가 시작됐다.

군터는 의식적으로 기세를 갈무리했다. 그의 기운은 촌민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신경을 쓴들, 촌장 일가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무장한 병사 백 명을 이끌고 마을에 들이닥친다면 말이다.

“이 마을은 꽤 외진 곳에 자리를 잡았군.”

“아…….”

군터는 퍽퍽한 고기를 씹으며 촌장에게 흘깃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촌장이`

“아, 예. 본래 이 마을은 개척촌이었습니다. 제 아버님께서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으니, 역사라고 해봐야 고작 사십 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개척촌? 주변에 별다른 것은 없는 것 같던데.”

개척촌이 만들어지는 조건은 여러 가지다.

첫째로는 도시나 성의 인구가 과잉일 때다.

그럴 때는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떠나보내 개척촌을 일구게 하는데, 이 경우는 강압적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고 지원자를 받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둘째로는 특정 지역의 개발을 위해서.

주로 광산이라던가, 목초지 부근이 대상이다. 광산을 개발하거나 가축을 기르기 위해 너무 멀리 사람을 보내야 할 때는 아예 그 부근에 개척촌을 만드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요충지의 거점화를 위해서.

지리적으로 군사나 물류의 요충지인 곳에 마을을 만들어 거점화시키는 거다. 요새를 짓기에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달랑 초소만 세우기에도 애매한 경우에 마을을 세우기도 한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다.

그런데 군터가 보기에, 이 마을은 세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마을이 개척촌이라니? 물론 마을이 세워진 지 40여 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 무언가 변했을 수도 있지만…….

“호, 혹시 마을의 남서쪽에 있던…작은 산을 보셨는지요.”

“본 것 같군.”

촌장의 말처럼 작은 산이었다. 눈여겨볼 구석도 없는, 흔하디흔해 보이는 야산.

“한때 그곳에 금광이 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산으로 이어지는 개천에서 사금(砂金)이 발견되었다고 하지요.”

“금이라.”

“그 이야기를 들은 파빌토의 대상(大商)이 돈을 대고 파빌토의 시민들을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광을 찾기 위해 수 년을 매달렸지만…….”

“찾지 못한 건가.”

“예. 사금 일부를 채취하기는 했지만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지요. 결국 그는 막대한 손해만 입은 채 채광 사업에서 손을 뗐고, 그 후에 이 마을의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왔습니다.”

“농사?”

“예. 보리와 밀, 귀리 등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든 먹고 살 정도는…….”

“판니른의 정세가 썩 좋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이곳은 괜찮은가?”

“예…옛?”

촌장이 당황하며 몸을 떨었다. 어쩌면 트집을 잡기 위한 시험처럼 느꼈을 수도 있다.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다. 이 지역의 상황을 알고 싶을 뿐.”

“아…음.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병사를 이끌고 온 높으신 분이 이런 질문을 하면, 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정상이다. 군터는 조용히 스프를 뜨며 촌장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전쟁 이후로…여기저기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들려오긴 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도적들도 이런 궁벽한 곳까지는 오지 않으니까요.”

“그런가.”

식사가 끝난 후. 군터는 불안에 떠는 촌장 일가를 내보냈다. 그리고 아마 촌장 부부가 쓰는 것일 터인, 제법 큼직한 나무 침대에 누워 짧게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군터는 어젯밤 식사를 했던 작은 탁자 위에 금화 세 닢을 올려두고 집을 나섰다.

“장군. 푹 쉬셨습니까.”

“소란은 없었겠지.”

“죽고 싶지 않으면 감히 누가 장군의 명을 가벼이 여기겠습니까.”

전날 군터의 명이 있었기에 병사들은 일찍부터 일어나 떠날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할렌이 앞장서 길을 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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