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그들은 기다렸다. 하루, 열흘, 한 달이 지났다. 생각보다 늦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사람이 올 거라고 믿으며 기다렸다. 그러나 한 달이 아니라 두 달이 지나도 변화는 없었다. 들려오는 소식이라고는 솔롬의 ‘쥐’들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뿐.
설마 첩자들 심어놓았다고 기분이 상한 것일까? 아니, 그런 유치한 감정에 휘둘릴 자라면 애초에 테리브란에서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터.
“이상하군.”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솔롬의 성주게 될 수 있게 해주었고, 판니른의 군권을 거머쥐게 해주었다. 서로의 필요 때문에 손을 잡은 것이지만, 일개 요새의 사령관을 이 정도까지 올려주었으면 그것은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앞으로의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이쪽의 힘이 필요할 터인데…어찌 이리 뻣뻣하게 군단 말인가.
“설마하니…우리와 갈라서기라도 할 작정인가?”
엄밀히 말해, 그들이 직접 대면하여 술잔을 기울이면서 같은 길을 갈 것을 선언한 적은 없다. 일이 급하게 돌아가던 때에 서신 몇 통을 주고받으며 입을 맞춘 것이 전부. 따라서 그들의 동맹이라는 것도 사실은 불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협력 관계를 맺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관계가 지속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하듯, 그 또한 그들을 필요로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태도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심이 싹텄다. 하여 그들은 혹 솔롬의 성주가 사실 처음부터 중앙의 귀족들과 결탁하고서 이쪽을 속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앙 귀족들이 지금도 조정에서 솔롬에서의 잔혹한 숙청을 빌미로 솔롬 성주를 벌해야 한다며 성토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런 의심을 접었다.
“우리와 기싸움이라도 하려는 건가.”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아쉬운 위치에 서게 되는 법. 그것을 의식하고서 이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일까?
흔히 동부의 3대 가문이라 불리는 곳의 가주들은 어찌 대응해야 좋을지를 고민했다. 정확히는, 몰던 가를 뺀 나머지 두 가문의 가주들만.
“어떻더냐?”
“총독은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야심이 있고, 신중한 자로 보였습니다. 원래 그랬던 것인지, 아비에게 축출을 당하고서 그렇게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두고 보면 알겠지. 벼랑 끝에 몰린 자가 아니냐.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끝난다는 걸 알 테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지.”
“그런 와중에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까. 신중하면서 대범함까지 갖췄습니다.”
“그래. 그도 그렇군.”
몰던 가주, 뮬리츠 몰던은 동생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말한 대로, 로드니 캄브라이는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를 적대하는 동생의 무리는 물론, 그의 아비까지도 그의 작은 실수 하나라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는 와중에, 견제해야 할 대상인 솔롬의 성주와 손을 잡았다. 위태로운 줄 위에 스스로 올라선 것이다. 동생의 말처럼, 어지간한 대담함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라는 데 뮬리츠 몰던 역시 동의했다.
“그래. 총독은 그렇다 치고, 솔롬의 성주는 어떻더냐?”
“오만한 자였습니다.”
“오만하다?”
“예. 저는 물론이고, 총독까지도 아래로 보는 것 같더군요. 스스로 일가를 이룬 자인 만큼, 당연히 어느 정도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습니다만…그 자의 오만함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런가.”
자부심이 오만으로 변질되는 건 꽤 흔한 일이다. 특히 무부들, 그 중에서도 전장을 해치며 공을 쌓은 이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왜인지는 모른다. 칼로 얻은 공명(功名)과 달리 얻은 공명이 다르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자체로 오만이다.
“멋대로 폭주하면 곤란한데.”
“그럴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오만하기는 해도, 어리석은 자로는 보이지 않더군요.”
“네 눈이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의 하나뿐인 남자 형제는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다. 사람을 보는 눈 역시 탁월하다. 그런 재주가 없었더라면, 비오르 몰던은 그의 하나뿐인 남자 형제가 되지 못했겠지.
“그들은 어찌 나올 것 같습니까?”
“글쎄. 꽤 몸이 닳은 것 같기는 한데…….”
해들리르와 캘리어, 그 외의 유력한 가문들이 함께 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3대 가문이다.
세 가문의 가주는 중앙 귀족들의 노골적인 압박이 시작된 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열흘에 두세 번은 친필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조금은 더 기다리겠지.”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그리되도록 만들 터였다. 뮬리츠 몰던은 세 가주들 중 가장 젊었으나 그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다른 두 가주들 못지않았다. 그 수완 역시 마찬가지.
“조심하십시오. 형님 역시 벼랑 끝에 서 계신 겁니다.”
뮬리츠 몰던이 피식 웃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게냐?”
“형님.”
“그래. 알겠다. 조심해야지. 네 말대로…나 역시 마음 편히 여유 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이제 슬슬 총독과 솔롬 성주는 적당히 부딪치는 시늉을 시작할 것이다. 테리브란의 조정을 속여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그는 조율을 해야 한다. 솔롬 성주와 총독, 그들과 동부 귀족들 간의 조율. 특히 솔롬 성주.
‘오만한 자라.’
그래서 일전에 이쪽의 접촉을 무시했던 걸까.
‘말이 통하는 자였으면 좋겠군.’
동생의 사람 보는 눈을 믿지만, 그와는 별개로, 뮬리츠 몰던은 뭐든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남의 말은 참고만 할 뿐, 오직 직접 보고 내린 자신의 판단만을 신뢰한다.
‘한 번 보기는 해야 하는데 말이지.’
구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는 판니른 제일의 권력자고, 솔롬의 성주는 판니른의 방위군을 맡았으니 그들이 회동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솔롬 성주의 아들이 혼사를 치른다고 했었나?”
“예. 우슈무르 가문의 여식과 연을 맺는다더군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솔롬 성주도 곧 테리브란으로 떠나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빨리 만난다고 해도 한 달, 아니 어쩌면 두 달 정도 후다. 되도록 그때까지 다른 두 가주들을 잘 달래야 하겠지.
* * *
황자의 허락이 떨어졌다.
아들의 혼례를 위해 테리브란으로 와서 열흘 동안 체류해도 좋다. 호위 병력은 최대 백 명으로 제한하며, 열흘이 지나면 테리브란을 떠나 임지로 복귀해야 한다.
“듣자 하니 조정이 시끄럽다던데, 그래도 잘 풀렸군요.”
“애초에 명분 없는 모함이었지. 안 그런가?”
엄밀히 따지면 명분이 없지는 않다. 성주로서 휘하 관리들의 인사를 어찌 처리하는지는 성주의 재량이지만, 그들을 아예 처형해버린 것은 구설수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적과 내통이라는, 사형에 적합한 죄목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수가 적지 않았고, 임지에 부임하자마자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정당한 처벌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숙청이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군터의 수하들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하는 일 없이 조정에서 밥만 축내는, 소위 ‘높은 분’들이 그들의 상관에게 이를 드러내는 데 대해 분개했다.
“그놈들이 뭐라고 짖어대든 소용없을 것이야. 장군에 대한 전하의 신뢰는 굳건하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장군?”
그렇게 말을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몇몇은 테리브란의 조정에서 군터에 대한 안 좋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불안한 기색을 비쳤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황자로부터 테리브란에 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지금처럼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군터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아무리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가 센 무인들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다. 그들은 7황자가, 조정의 고관 귀족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고 있다. 입으로는 아무리 허세를 떨어도, 그들 하나하나가 옛 베이고르의 국왕에 준하거나 그 이상가는 권력자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들이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군터를 죄인으로 만들어 테리브란으로 압송할 수도 있다. 명분? 이제는 무식한 무부들도 다 안다. 명분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힘 있는 자들은 명분 따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이번에 군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나저나 백 명이라니.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살라스는 다른 것보다 수행 인원이 너무 적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이제 군터는 솔롬의 성주였으며, 판니른의 군권을 쥔 방위 군단장이었다. 그런 인사의 호위가 고작 백 명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테리브란은 몰라도, 판니른의 치안이 아직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말이다.
“맞습니다. 백 명은 너무 적습니다.”
할렌도 한 마디 거들었다. 솔롬에서 잔뜩 피를 본 이후, 나름대로 공을 세운 할렌은 전보다 말 수가 많아졌다. 예전처럼 사사로운 말까지 다할 정도는 아니어도, 지금 같은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정도는 됐다.
“조정에서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
군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혹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지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장군! 별도의 병력이 뒤따르게 해주십시오. 수행 인원을 백으로 제한한다지만, 따로 움직이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하다못해 판니른 내에서만이라도…….”
군터는 수하들의 우려를 일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오나 장군.”
“이미 명을 받았다. 약은 수를 쓰면서 솔롬을 나선다면 저들이 나를 어찌 생각하겠느냐.”
작게는 판니른의 여러 귀족, 관리, 백성들. 크게는 판니른 밖, 특히 테리브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인사들. 그들은 그가 꽁무니에 부하들을 줄줄이 붙이고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를 비웃을 것이다. 겁쟁이, 혹은 의심 많은 자로 여기겠지. 그 의심이 합리적인 것인지, 얼토당토않은 것인지는 상관없다. 얕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설령 너희의 말대로 음모가 숨어 있더라도 상관없다.”
정예 기병 백 기. 그 정도라면 천 명의 암살자가 와도 돌파할, 아니 섬멸할 자신이 있다.
‘그렇게 나와준다면 고맙지.’
칼을 들고 덤벼준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어지간한 칼로는 덤벼봐야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가시다. 그들은 그들이 자신 있어 하고, 이쪽이 자신 없어 하는 쪽으로 덤벼올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