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먼저 로드니 캄브라이에게 묵례한 뒤 군터를 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렘보르 장군. 비오르 몰던이라 합니다.”
말끔한 인상이었다. 키는 꽤 컸는데 체구는 작은 편. 거기에 얼굴은 선이 가늘고 수염은 전혀 없었다. 내시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하긴, 스스로 거세를 했다 하니 내시와 다를 바 없지만.
“이미 나는 크렘보르 장군과 이야기를 나눴네. 허나 장군은 그대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 모양이더군.”
과연 비오르 몰던은 이 흉험한 사내의 삐딱한 태도에 대해 눈치를 챘을까? 그러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한 번 자리가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돌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좋은 시작이다. 한 번 접촉했었다고 하더니, 그때 쓴 물을 마시면서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일까.
“제 형님께서는 두 분과 함께 큰 성공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로드니 캄브라이는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주어 붙들었다.
“큰 성공이란?”
“몰던은 이 땅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 형님은, 가문이 조금 더 높이 올라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다.”
“중앙의 귀족들이 곱게 보고 있지 않으며, 외적의 위협 또한 존재하지. 그런 상황에서 내란을 일으킬 셈인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 그러나 비오르 몰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꾸했다.
“난세에는 난세의 이유가, 치세에는 치세의 이유가 있지요. 시기를 논하고자 한다면 환경보다는 상황을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잘하는군.”
“잘 들어주시는 덕분이지요.”
로드니 캄브라이는 둘의 대화에서 빠져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군터의 무뚝뚝한 말을 이리저리 받아치는 비오르 몰던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대리인으로 삼을 만하군.’
단순히 혈육이라서, 바꿔 말하면 몰던의 직계이기에 무게감을 가지기 때문에 대리인으로 보낸 것이 아니었다. 가주의 동생이라는 명분을 제하더라도, 말재주만 놓고 보면 이 사내에게는 대리인을 맡을 역량이 충분하다.
‘미리 이야기라도 나눠볼 것을 그랬군.’
비오르 몰던이 하잘에 도착한 것은 이틀 전. 간단하게 통성명은 했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당장 하잘에 산적한 급한 사안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나질 않았고,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몰던 가주와 직접 서신으로 몇 차례 나누었던지라 굳이 대리인과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몰던이 바라는 것은 뭔가.”
“구체적으로 말씀입니까.”
“그러면 좋겠지.”
“해들리르의 몰락. 그리고 폴츠로의 진출입니다.”
“몰락? 들은 것과는 조금 다르군.”
비오르 몰던에게 들은 몰던의 의도는 군터는 조금 전에 들은 것보다 훨씬 더 나간 것이었다. 단순히 해들리르의 세를 갉아먹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몰락이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이건 이권 다툼 수준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해들리르에게는 구원(仇怨)이 있습니다.”
“구원?”
“가문의 내사인지라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그렇군요.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총독 각하야 중앙으로 돌아가실 테지만,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솔롬을 중심으로 기반을 잡으실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세 가문이 판니른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인데…그러면 너무 비좁지 않겠습니까.”
당돌하다. 내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철회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시들에게 이런 배짱이 있을 리 없으니.
“난 솔롬의 성주로서 짊어진 책무가 있네.”
“어찌 모르겠습니까.”
“몰던과 손을 잡더라도, 그 책무에 반하는 행동은 할 수 없다.”
“물론입니다. 저희 모두 테리브란에 계신 전하의 신하가 아닙니까.”
“그건 가주의 생각인가?”
“저는 몰던의 대리인입니다.”
자신의 말이 곧 가주의 말이며, 몰던의 뜻이라는 소리다.
“좋아.”
비오르 몰던의 시원한 대답에 군터는 마음을 정했다.
누군가에게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겠지만, 그에게는 아니다. 조금 전 젊은 총독에게 했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군터는 정말로 그들의,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그는 솔롬의 성주. 따라서 성주로서 책무를 다하면 그만이다. 외부에서 견제가 들어온다면 받아치면 그뿐. 솔롬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격하게 칼을 휘두를 수는 없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수를 쓸 수 있다.
‘괜찮지.’
결국은 이 모두가 더 큰 권세를 가지기 위함이다. 누구도 가진 것을 내려놓기는 원하지 않으니, 얻고자 한다면 빼앗아야 한다. 당장 이 몰던 가의 대리인도 판니른에 셋은 너무 많다지 않나.
‘전쟁과 다를 바 없다.’
가지기 위한 투쟁. 권세 자체에는 흥미가 없지만, 그를 쥐기 위한 치열한 다툼에는 눈길이 간다. 물론 권세도 필요하다. 힘이 있어야 나중에 일이 틀어지더라도 황자의 칼날을 피할 수 있을 테니.
짝!
“자, 그럼 결정됐군.”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로드니 캄브라이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우리의 뜻이 모인 것을 기념하기에 앞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소.”
시원하게 손을 부딪친 것과는 달리, 말을 잇는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우리의 작은 동맹은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오. 아시다시피, 우리가 뭉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이들이 너무나 많소. 그렇기에 우리는 연기를 해야 할 거요. 특히 크렘보르 장군과 이 사람은 더더욱.”
총독과 성주. 중앙 조정에서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는 것이다. 소리만 내는 수준을 넘어 아예 물어뜯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계획이 있소?”
군터가 물었다.
로드니 캄브라이는 일찍부터 이런 상황을 그려왔다. 그렇다면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도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추측이었다.
“일단은 해들리르부터 처리해야겠지. 판니른을 깨끗하게 정리해야 밖으로 뻗어 나가기가 쉬워지지 않겠소?”
“방도는?”
“구상하고 있는 것이 있소.”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은 구상에 머물고 있는 계획인 듯했다. 더 캐물으면 답을 할 것 같았으나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이야기 할 테니까.
“서두르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당연히 신중을 기울일 것이오.”
보아하니 로드니 캄브라이는 그의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지만…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럼, 이쯤에서 일어나겠소.”
“벌써? 가볍게 식사라도…….”
“공무가 밀려 있소. 식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지.”
그 말을 끝으로 군터는 자리를 떠났다.
“…….”
그가 떠난 후. 로드니 캄브라이와 비오르 몰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탈하게 웃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오르 몰던이었다.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만…정말 파격적인 분이군요.”
“나도 놀랐네. 짐작했던 것 이상이야. 세상에 저런 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
지독할 만큼 오만하고 무례하다. 그런데 그런 오만불손함이 어울리기도 했다. 좋게 말해,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듯했다. 통념, 규율, 예의 등등.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자기 입으로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 지껄이는 자이니.
솔직한 심정으로, 비오르 몰던에게 거침없이 제 할 말을 하던 그를 보면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자신에게만 그토록 오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는 원래 사람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거였다.
“괜찮겠습니까?”
“글쎄. 신의가 없어 보이는 자는 아니었네. 자네는 그리 생각지 않는가?”
“음…….”
그럴 자로는 보이지 않지만, 만에 하나 배신을 한다고 해도 괜찮다. 책 잡힐 부분을 만들지 않으면 되니까. 어차피 음지의 동맹 아닌가? 자신도 그렇지만, 몰던 역시도 꼬리를 잘라야 하는 순간을 대비하기는 마찬가지일 터.
“어쨌든 일은 잘 풀린 셈이지 않나.”
“그렇지요.”
“어떤가?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상식 밖의 과격한 장군도 그렇지만, 이 비오르 몰던이라는 사내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겼다.
“각하의 후의를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비오르 몰던은 흔쾌히 식사 초대를 받아들였다. 아마 상대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손을 잡게 된 젊은 총독이 어떤 인물인지 헤아려보고자 하겠지.
‘한 번 볼까.’
이런 식의 탐색전은 익숙하다. 주고받는 웃음 속에서 로드니 캄브라이는 비로소 그의 세계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 * *
“기분이 어떠십니까?”
“싱숭생숭합니다.”
모페이브는 멋쩍게 웃는 보리스를 보며 덩달아 웃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온 도련님이다. 그 도련님이 이제는 그보다도 더 커져서 혼인을 앞두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참 빠르군요. 유모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혼인이라는 것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하.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보리스가 모페이브에게 느끼는 정 또한 모페이브가 보리스에게 느끼는 정 못지않았다. 모페이브는 단순한 집사가 아니었다. 보리스도 실비아도, 그를 거의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공자님.”
모페이브가 말끝을 흐렸다.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저…아쉬워서 말입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어미를 잃은 자식의 마음이 어디 아쉽기만 하겠는가.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니, 상실감은 여전히 가슴 속에 잠들어 있을 터. 어찌 잊었겠는가. 애써 돌아보고 있지 않을 뿐이겠지.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모페이브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어설픈 위로보다는 침묵을 지키기로 답을 내렸다.
“하아. 죄송합니다. 괜한 말을 했군요.”
“아닙니다.”
“솔롬에서 전갈은 아직입니까?”
“예. 허나 곧 올 것입니다.”
크렘보르와 우슈무르의 혼사가 한 달 하고 스무날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슬슬 황자에게 청을 넣어야 한다. 하나뿐인 아들의 혼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이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비록 임지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가문의 후계자가 처음 치르는 혼사인 만큼 가주가 참석하는 것이 억지스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그런 긍정적인 전망은 열흘 전, 솔롬에서 있었던 혈사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뒤틀렸다. 아바시스와 내통한 역적들에 대한 처벌이라지만, 썩 믿음이 가는 구실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한 숙청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조정에서는 성주를 직접 불러다 문책하지는 않더라도, 엄중한 경고를 해야 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던가.
“별일 없겠지요.”
“괜찮을 겁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모페이브의 말에도 보리스는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