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화
“손님?”
“앞서 이야기한 자들. 그들 중 하나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요.”
친구라. 낯간지러운 소리를 제법 뻔뻔하게 한다. 군터는 시답잖은 말장난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자가 어떤 자일지, 정확히는 어느 가문에서 온 자일지 살짝 궁금해졌지만 곧 관심을 거뒀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능숙하군.”
“…….”
칭찬이라면 칭찬일진대, 로드니 캄브라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무뚝뚝한 한 마디에는 일말의 호의도 비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부정적인 감정이 드러난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왠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거 설마.’
그의 불길한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생각 대로, 지금 군터는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화를 자연스럽게 주도하면서 자신의 바람대로 이쪽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질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
“착각?”
“나는 그대의…아니,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소.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지.”
“이보시오 장군.”
로드니 캄브라이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리 까칠하게 나온단 말인가?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이다. 이쪽이 조금 더 주도적으로 움직였기로서니, 그게 그리 큰 문제인가? 설마하니 군터 크렘보르에게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걸까?
순간적으로 그런 황당한 생각까지 할 만큼, 로드니 캄브라이는 크게 당황했다. 이런 반응은 그의 계산에 없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바깥의 ‘손님’이 들어오고, 그런 후에 앞으로의 일을 긍정적으로 논하게 될 줄 알았다.
“난 그대가 아무렇게나 다룰 수 있는 말이 아니오.”
“오해요. 내 어찌 장군을 그리 여길 수 있겠소.”
“내가 그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판니른의 군정(軍政)을 이끌어야 하는 만큼 그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를 위해서였소. 그 밖에 다른 것을 기대하지는 않아. 그대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렇소.”
“…….”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직접 말을 하시오. 충분한 존중을 표하면서.”
군터의 말이 끝나고, 침묵이 흘렀다.
로드니 캄브라이는 몇 번 달싹거리던 입을 끝내 꾹 다물었다.
‘오판했군.’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 그는 설마 이 사내가 이토록 자존심이 강한 자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이쯤 되면 자존심이 강한 게 아니라 그냥 오만하다고 봐야 하리라.
‘아무리 내가 이런 신세가 됐다지만…….’
대등한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의 제안은 그에게도 좋은 것이었으니까. 야심 있는 자라면 거절할 리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존중?’
이만하면 충분한 존중을 보이지 않았나. 이 이상을 바란다는 건, 원하는 게 존중이 아니라 굴종이라는 뜻이다.
‘이 자의 협력이 필요한가?’
무섭게 치민 회의감에 한 번 자문해보았다.
답은 금방 나왔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했을 뿐이니까.
‘필요하다. 반드시.’
그는 냉정하게 되짚어 보았다.
‘도움이 필요치 않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총독인 자신이 그와 으르렁거린다면 그도 어느 정도 곤란함을 겪겠지만, 그게 전부다. 실질적으로 이쪽이 줄 수 있는 ‘곤란’함은 기껏해야 군비에 대한 이런저런 간섭이나, 그 밖의 사소한 트집 정도가 전부다. 반면에 저쪽은…….
‘이미 솔롬에서 시원하게 칼춤을 췄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과격한 행사였다. 덕분에 벌써부터 이런저런 안 좋은 말들이 나오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로 인해 군터 크렘보르는 솔롬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눈을 쳐낸 것뿐만이 아니라…경고까지 했던 건가.’
어쩌면 솔롬에서 춘 칼춤의 동기는, 생각보다 더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맹세컨대, 장군을 불쾌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소.”
자존심이 상한다. 가문에 있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었다. 비록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적이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이런 굴욕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받아들여야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캄브라이의 유력한 후계자라고, 그러니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가문에서 축출당하고, 이 오지로 유배된 자신의 처지다. 이 오만한 자의 도움이 없으면 가문으로 개선하기는커녕, 이 자리에서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터놓고 이야기하리다. 장군도 이 사람의 처지를 알고 계시겠지. 난 가문으로 돌아가 가증스러운 적들을 벌할 것이오. 그리고 마땅히 내 것이 되어야 할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잠시 굽히는 것이 뭐 어려울까. 제아무리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거목이라고 할지라도,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가지를 흔드는 법 아닌가.
“그를 위해, 장군의 도움이 필요하오. 중앙에 있는 자들은 우리가 상잔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소. 장군은 내 협력이 필요치 않다고 했지만, 분명 도움이 될 거요.”
“아직도…….”
“도와주시오.”
“…….”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면 그의 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가라앉아 있었다. 무료하다는 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이제야…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군.”
“나이가 어리고, 세상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실수를 하고 말았소.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당연히 본심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말해야 한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처지에 맞는 처세가 필요하니까.
* * *
“내가 손을 잡으려는 쪽은 몰던 가문이오.”
동부의 귀족 가문 셋을 뽑으라면 들어가는 명문 가문이다. 크레이그, 브랜우드와 함께 흔히 3대 가문이라고 불리며, 판니른이 제국령에 속하게 되었을 때부터 권세가로 이름을 떨쳐왔다.
“어째서 몰던이오?”
“몰던의 가주, 뮬리츠 몰던은 야심이 있는 사내요. 젊어서 그런지 몰라도 결단력과 행동력도 갖췄지. 그는 작금의 상황을 위기이자 기회라고 여기고 있소. 어느 정도냐 하면, 내가 판니른에 정식으로 부임하기도 전에 접촉해올 정도로.”
“경솔한 것 아닌가?”
동부의 귀족들은 그들의 것을 넘보는 중앙의 귀족들에 맞서 단결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면 그들이 곱게 볼 리 없다. 자칫 잘못하면 공적의 낙인이 찍혀버릴지도 모른다.
“경솔함과 대범함은 종이 한 장 차이지. 그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더군.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소. 나름대로 충분히 계산한 후에 움직였다는 뜻이지.”
“몰던은 내게도 접촉했었소. 역시 내가 솔롬에 채 부임하기도 전에.”
로드니 캄브라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조금 경솔했군.”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퇴짜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할 필요는 없지만, 오늘이 되기 전까지도 일언반구 없었다는 것은…….
‘역시 야심이 크군.’
뮬리츠 몰던은 그보다 두 살이 더 많다. 그러니 동년배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전대 몰던 가주가 단명한 탓에, 그는 몰던의 가주 노릇을 벌써 10년 가까이 해왔다. 젊으면서도 경륜을 갖춘 것이다.
“아시다시피 몰던은 판니른에 뿌리를 두고 있소.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거요.”
“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
“대가라고 해도, 별로 대단치는 않을 거외다. 기껏해야 다른 두 가문을 압박해주는 정도? 아, 해들리르는 조금 경우가 다르겠지만…그거야 장군과 이 사람이 마음만 먹는다면 손쉬운 일 아니겠소.”
해들리르 가문 역시 판니른에 뿌리를 둔 가문. 그들은 몰던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권세가다.
“그들은 해들리르를 짓누르기를 원하는군.”
“짓누르는 것만으로 끝날지, 그 이상일지는 모르겠지만…일단은 그런 것 같소.”
판니른은 결코 작은 땅이 아니다. 면적으로만 따지면 바크렌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인구나 부는 바크렌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 괜히 2황자가 본거지로 삼았겠는가. 비록 전쟁으로 인해 그 성세가 크게 꺾이기는 했지만, 얼마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이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판니른은 그 정도로 저력이 있다.
거대한 두 가문이, 아니 그 이상이 자리 잡아도 충분한 땅이다. 그러나 몰던의 가주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무리 땅이 커도, 인간의 야심은 그보다도 큰 것일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자는 몰던 가주 본인이오?”
“아니. 그가 보낸 사자요.”
그렇게 답한 로드니 캄브라이는 혹 군터가 불쾌해할까 싶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허나 평범한 사자는 아니오. 그의 친동생이면서, 몰던 가주가 가장 신뢰하는 수하이기도 하오. 그의 대리인라고 봐도 무방하지.”
“의외로군.”
가주의 친동생이라면 계승권을 가진 자일 터. 권력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외적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혈육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자기 동생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범인이 아니오. 독한 자지. 그는 형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소. 당연히 자식도 없고.”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건가?”
“달리 방도가 없었을 거요. 그러지 않았다면 죽었을 테니까. 실제도 그 외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죽었고.”
“독한 자는 뮬리츠 몰던이군.”
“권력은 비정한 자를 좋아하지. 그 정도의 일은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드문 것도 아니오. 아, 물론 저 밖에 있는 자 같은 경우는 특별하지.”
아무리 살기 위해서라지만 스스로 거세를 하고 고개를 조아리다니. 자존심 높은 귀족으로서는…아무래도 하기 힘든 일이다. 당장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온갖 조롱의 대상이 될 테니까.
하지만 로드니 캄브라이도, 군터도 그를 비웃지 않았다.
왜 비웃겠는가. 어찌 비웃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시겠소? 장군의 뜻에 따르리다.”
“들라 하시오.”
젊은 총독은 비로소 제대로 된 존중을 보이고 있고, 저 밖에 기다리고 있는 자에 대해 호기심도 생겼다. 고로, 몰던의 사자를 만나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