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579화 (579/1,064)

579화

하잘.

판니른의 주도.

군터는 예전에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 2황자 바라누르 트라소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을 때, 룬차이의 군대를-정작 룬차이는 업었었지만-패퇴시키고 뒤늦게 판니른에 발을 디뎠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판니른은 철저하게 망가진 뒤였다. 2황자가 자신의 근거지로 삼을 만큼 번영했던 대도시는 전쟁의 불길을 직격으로 맞았다. 거기에 더해 영문 모를 기사(奇事)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민심은 더욱 흉흉했었다. 상주인구가 십만이 훌쩍 넘어가는 대도시가 유령도시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군터는 그때 처음 알았었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많이 나아졌군.”

할렌이 작게 중얼거린 말이 군터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 말처럼, 하잘은 그때의 끔찍했던 모습을 털어대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았다.

흉물스러운 성벽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으로 복구되었고, 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감돌았다.

“그렇기는 한데, 영 어수선하군.”

“판니른 전체가 어수선한데, 이곳이라고 어수선하지 않고 배기겠나.”

모두 옳은 말이다. 하잘의 모습이 곧 판니른의 모습이었다. 군터 일행이 미리 마중 나온 이들과 함께 성문을 지나고 대로를 이동하는 동안 도시 내부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두려워하는군요.”

토어릭의 말처럼, 좌우로 길을 비켜서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관리를 어려워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 반응은 과한 수준이다. 하잘의 관리들이 어지간히 시민들을 쥐어짠 것이 아니라면 이러기는 힘들다.

“신임 총독이 머리가 아플 것 같군요.”

“…….”

“그는 장군의 힘이 필요할 겁니다.”

신임 총독이 생각보다 빨리 사자를 보냈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아무래도 저울의 균형이 생각보다도 심하게 기운 것 같았다.

토어릭은 총독이 허세를 부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나온다 해도 신경 쓰지 말 것을 조언했다.

‘허세라.’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군터는 토어릭의 조언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 * *

“어서오시오 장군. 아니, 성주라 불러드려야 하나.”

“편할 대로 부르시오.”

판니른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군터를 맞이했다.

군터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조금 실망했다. 직접 만난 그에게 서신에서 느꼈던 단단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은 없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지만 몸이 살짝 굳어있었다. 긴장한 것이다.

‘아, 그렇군.’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군터는 곧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이 젊은 총독은, 말 그대로 젊었다. 그의 나이가 얼마였더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대충 겉으로 보기에는 많아봐야 서른 초반 정도로 보였다.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할 만한 나이도 아니다. 특히 제대로 후계자 자리를 쥐지도 못한 채, 가문 내에서만 세월을 보냈을 사내에게는.

‘그런 것치고는 괜찮은 편인가.’

군터도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기세를 버거워한다는 것을. 신경 써서 조절하지 않으면 그를 처음 보는 이들 열 중 아홉은 말 한 마디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이 젊은 총독은 꽤나 괜찮은 편이었다. 그리 단련되지 않은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육신을 단련하면 정신 역시 강해진다. 바꿔 말하면 육신이 굳건하지 못한 이는 정신력 역시 대단치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예외도 얼마든지 있지만, 보통은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로드니 티브리악은…샌님까지는 아니어도 특별히 몸을 단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군터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든, 겉으로나마 당당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정신력은 비루한 몸뚱이가 발할 수 있는 이상이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다. 명백히, 이 젊은 총독은 앞서 이야기한 ‘예외’에 속한다.

강한 정신력.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일 수도 있고. 뭐가 되었든, 로드니 티브리악이라는 사내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놀랐소.”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그 말도 맞군. 어쨌든 나로서는 기쁜 일이오. 음…장군도 알다시피, 판니른의 정세가 썩 좋지 않지. 전후의 혼란이 채 수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불온한 것들이 활개를 치고 있소. 전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뜻도 거기에 있는 것이 분명하니, 우리는 조속히 우리의 충심과 능력을 보여야 할 것이오.”

“난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내게 할 말이 있다면 똑바로 해주는 것이 좋겠소.”

군터가 슬쩍 불편함을 내비치자 기어이 젊은 총독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좋소.”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지만, 로드니 티브리악은 곧바로 침묵했다. 이제부터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니 입을 열기 전에 할 말을 정리하는 것이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인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보다 더 심하군.’

야만인 출신이라 그런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냥 사람 자체가 이렇게 생겨 먹은 거다.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으면서도 이토록 투박할 수 있을까.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거겠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이 군터라는 사내는 스스로 전공을 쌓고 또 쌓으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다. 황자의 총애가 있었다지만, 그 총애는 어찌 얻은 것인가? 결국 스스로 능력을 증명했기에 가능했던 일 아닌가.

‘그래도…내 이야기를 들을 의사는 있다.’

군터, 이제는 군터 크렘보르라고 불러야 할 이 자는 굉장히 독특한 인물이었다. 로드니 캄브라이는 이제껏 이런 부류의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사내는 마치 욕망이 없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철저한 군인. 싸우라는 명이 떨어지면 싸우고, 아니면 임지에서 병사들을 조련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낸다.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냐고 묻는다면, ‘이상적’인 것이 문제라고 답할 것이다.

‘이상’이 왜 ‘이상’인가? 현실에서 있을 수 없기에 ‘이상’이다. 즉, 군터 크렘보르는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권력을 쫓지 않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있을 수도 있지.’

그래. 세상은 넓고 인간은 많으니 어쩌면 욕심 없는 인간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지위와 힘을 지닌 이들 중에서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힘을 탐하지 않는 이는 없다. 그런 자는 존재할 수가 없다. 탐하지 않으면 유지조차 못하고, 결국 몰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내 역시 마찬가지. 그가 아무리 잘났든 상관없이,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면 그는 언제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뀐 거겠지.

‘동부 귀족들의 태세 변환은 뜬금없었지. 누가 봐도 서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꽤나 괜찮은 수완이었다. 그러나 캄브라이를 포함한 중앙의 귀족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 수완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런 상황 자체가 그들의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전혀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내가, 뜬금없이 동부 귀족들과 손을 잡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던 거다.

‘그때는 놀랐지만…결론적으로는 내게는 좋은 일이 되었어.’

상대가 바라는 것이 없다면 거래를 할 수 없다. 지금의 군터 크렘보르에게는 틀림없이 야심이 있다. 그렇다면 주고받는 거래가 가능하다. 비록 내쫓긴 신세라지만 그는 엄연한 캄브라이의 직계인데다, 판니른의 총독이었으니까.

“크렘보르 장군. 솔직히 말합시다. 장군도 내가 왜 이곳의 총독으로 부임했는지 알고 있을 거요.”

“짐작은 하고 있지.”

“그 짐작이 맞소. 난 그대의 감시자이며, 견제자요. 사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오. 제국의 속주들을 보면 어떤 곳이든 머리는 두 개요.”

그 말대로다. 바크렌도 그랬고, 그 어떤 곳이든 행정부와 군부의 수뇌는 나뉘어 있었다. 물론 그 균형이 깨져서 쌍두정치의 의미가 퇴색된 곳도 적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제국의 속주들에는 두 개의 머리를 두는 것이 기본이었다. 두 개의 머리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힘을 지니는 것을 경계하는 것. 그것이 제국이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를 총독의 자리에 앉힌 것은 그대도 짐작하겠지만, 제레이스를 필두로 한 5개 가문의 뜻이오. 그대가 동부 귀족들과 손을 잡았으니, 마땅히 견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내 임무는 그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거요. 그러나 장군도 알고 있겠지? 내가 어떤 신세인지.”

“알고 있소. 동생과 다투는 중이라던데.”

로드니 캄브라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내가 다투는 대상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동생이 아니라 내 아버지요. 그분은 내가 아니라 어린 동생이 가문을 잇기를 바라시거든.”

“하지만 그대는 포기할 생각이 없지.”

“물론. 어느 누가 캄브라이의 가주 자리를 쉽게 포기할 수 있겠소?”

“…….”

“비록 나는 이곳으로 쫓겨났지만, 아직도 테리브란에는 내 사람들이 많이 있소. 세력만 놓고 보면 아직도 나는 내 동생 이상이지. 하지만 언제까지 지금의 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오. 내가 이곳에 이렇게 유배되어 있으니까.”

총독씩이나 되는 자리에 앉았으면서 그것을 유배라 칭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말에 위화감은 전혀 없었다.

“장군. 난 그대를 도와줄 수 있소. 그리고 그대도 날 도울 수 있지. 우리는 서로를 도우면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찌 알고?”

“글쎄. 이 땅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것? 혹은 그 이상? 뭐라도 좋소. 내가 이 판니른의 총독인 이상, 나는 그대에게 갖가지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

“그 대가로 원하는 건?”

“협조요. 때로는 협력이 될 수도 있고.”

“협력이란?”

말이 통한다고 생각한 로드니 캄브라이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럽게 풀렸다.

“동부의 귀족들은 많지만, 그 중 최고 권세가라 할 수 있는 것은 몇 되지 않소. 그게 어떤 자들인지 알고 있소?”

“크레이크, 몰던, 브랜우드. 아닌가?”

“맞소. 조금 더하자면 해들리르와 갤리어 정도겠지. 아무튼 그 정도인데…그들은 지난 전쟁에서 2황자의 편을 들어 우리와 대적했지.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잃고, 지금도 위축되어 있고. 이건 장군도 잘 알겠지?”

“…….”

“그들은 중앙 귀족들의 위협을 견뎌내고자 장군을 끌어들였소. 장군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들은 안심하겠지. 사실 지금도 안심하고 있을 거요. 장군에 대한 전하의 총애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을 테니까.”

“본론만.”

“마냥 안심하고 숨을 돌리는 자들도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도 있소. 위태로운 이때, 덩치를 불려서 더 큰 힘을 손에 넣고 차후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위협에 굳건히 서고자 하는 이들이지.”

“…그 말은.”

“사실, 이 자리에 청한 손님이 더 있소. 지금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장군만 괜찮다면 그들을 불러들이고 싶소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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