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군터는 또 다시 저물어가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늘을 물들인 붉은색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같지도 않았다. 그래. 분명히 다르다. 내일은 또 다를 테고, 그 다음에도 쭉 다를 것이다.
여유가 될 때 이렇게 나와 하늘을 보는 것은 군터의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취미지만 이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는 군터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흘러가는 구름이나 뜨고 지는 해를 볼 때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왜일까 하고 고민도 해보았지만 곧 관두었다. 괜히 진지해졌다가 이런 사소한 즐거움마저 놓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아무려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즐겁다는 것이다. 그거면 됐다. 마른 땅이 물을 갈구하듯, 그 역시 자극을 갈구한다.
“장군.”
익숙한 목소리가 즐거움을 깨뜨렸다. 억지로 꿈에서 깬 듯, 군터는 현실로 돌아왔다.
장군. 성주님. 기타 등등.
부르는 말들이 너무 많다. 저것들이 모두 그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 많은 이름 중에 어느 것 하나 그의 마음에 닿는 것은 없었다.
‘또 잡생각을.’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엉뚱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것은.
점점 미쳐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로 아직 그렇게까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하잘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빠르군.”
“그만큼 저쪽도 급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사실 궁금했었다. 캄브라이의 장…아니, 차남인가? 아무튼 캄브라이 가문의 신임 총독과 동부 권세가들 중 어느 쪽이 더 빠르게 접촉해올지. 그리고 내심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다 할 수 있는 동부의 권세가들이 먼저 다가오지 않을까 했었는데…….
살라스의 말처럼 급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단력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군터는 설령 전자라고 해도 후자의 이유가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자신의 본분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 빠르게 접촉해온다는 것은 결단력이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니까.
물론, 이 접촉이 이번 일을 트집 잡기 위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으나…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각하께서 전하시는 서신입니다.”
밀봉된 서신을 받은 그 자리에서 읽었다.
내용은 간단했으며, 정중했다. 적어도 서신만 놓고 보면 트집을 잡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나?”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하잘로 가도록 하지.”
“총독 각하께서 기쁘게 맞이하실 겁니다.”
군터에게서 긍정적인 답을 들어서인지 총독의 사자로 온 귀족은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고맙소.”
“별 말씀을.”
아무래도 총독이 보낸 사자인 데다 그 자신도 귀족이었기에 살라스가 직접 병사를 이끌고 성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부디 가시는 길 조심하십시오.”
“오는 길도 순탄했는데 가는 길이라고 다르겠소.”
“모르는 일이지요.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습니까. 특히나 요즘 같은 시절은 더더욱 그렇지요.”
총독의 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어수선한 시절이지. 이런 때일수록 믿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 법. 혼자라면 두렵지만 함께라면 기꺼이 험한 시절을 헤쳐나갈 수 있을 터.”
“…….”
살라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총독의 사자가 그런 것과는 달랐다. 끄덕인 것이 아니라, 가만히 숙였다. 동의가 아닌 침묵. 자신이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은연중 드러낸 것이다.
“하하. 아무튼 고맙소. 그대도 하잘로 오시는가?”
“그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살라스는 군터의 부재 시 그를 대리한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군터와 함께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하잘로 가는 일 또한 그러리라 짐작했다.
“그렇군. 그럼,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봅시다.”
“예. 살펴 가십시오.”
사자와 그의 무리가 멀어져갔다. 살라스와 그의 병사들은 한동안 멀어져가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토어릭이 입을 뗐다.
“아랫사람을 보면 윗사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던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사자를 마중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않고 있던 그였다. 어차피 떠나는 이를 마중하는 것이니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마저도 살라스가 다 했기에 그는 총독의 사자를 관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보기에는 어떻던가?”
“괜찮더군요. 어리석지 않고, 그렇다고 과하게 나서지도 않으니 딱 적당합니다.”
“그렇다면?”
“그 총독이라는 자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쓰는 재주는 괜찮은 것 같더군요.”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네. 그리고 하나 더. 그는 진심으로 장군과 손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캄브라이 가주가 변덕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무난하게 가문을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은 아니지 않나.”
“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무난하게’ 이어받기는 틀렸으니까 말입니다.”
“음. 그래. 그렇군.”
흔히 권력이라는 놈은 혈육끼리도 나눌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권력의 마력이 강하다는 것인데, 토어릭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권력이라는 것이, 애초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권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덩어리. 본래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눌 수 있다 믿으니 탈이 나는 것이다.
‘피바람이 불겠구만. 뭐, 흔한 일이지만.’
멀쩡하던 가문이 혈육 간의 권력 다툼 때문에 박살이 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몇 대를 이어온 명문가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후계구도를 깔끔하게 정리하곤 한다. 캄브라이 가문도 여태 그리 해왔으나, 이번만은 애매해졌다. 따지고 보면 현 가주의 실책이라고 봐야 할 터. 뒤늦게나마 후계자 문제를 정리하려는 듯한 조치를 취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조치는 충분치 않아 보였다.
테리브란에서 쫓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겼던 것일까. 혹시 또 다른 ‘조치’를 취할지도 모르지만,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캄브라이의 판단은 안일한 것 같았다. 쫓겨난 캄브라이의 차남은 꽤 유능해 보였고, 야심도 있었다. 그는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야스메티 공은 언제쯤 온다던가.”
“글쎄요. 금방 올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공자의 혼사까지는 책임지고 마치시겠다 하더군요.”
“작은 일이 아니니까. 책임감을 느끼는 거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후계자의 혼사이며, 우슈무르 가문과 혼맹을 맺는 일이니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번에 한 번 솔롬으로 움직이게 되면 한동안은 테리브란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라 중앙 조정과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으니 떠나기 전에 최대한 이런저런 관계들을 신경 써야 한다.
“이쪽의 일이 순조로워서 다행이군. 벨룩스는 어떤가?”
“쥐죽은 듯이 있지요. 그 자는 지금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걸 압고 있습니다.”
“불만을 드러내는 자들은?”
“없습니다.”
“그래? 의외로군.”
“있다 해도 금방금방 없어지니까요.”
“너무 겁 많고 수동적인 자들만 남아도 곤란한데.”
“자리가 없어 문제지, 많아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능력 있는 자들은 꽤 있습니다.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모르지요. 자리가 나면 그들을 그 자리에 올리면 그만입니다.”
“조심하게. 굳이 모자란 자들을 억지로 쓸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솔롬 출신들을 차별한다는 인상을 줘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물론입니다. 잘 조절해야겠지요.”
이것저것 신경 쓰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하다. 이 성은 앞으로 그들의, 크렘보르 가문의 근거지가 될 테니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손안에 들어오겠지만, 처음부터 신경을 써서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최대한 신경을 쓰는 것이 옳다.
“티브리악 가문에서 1차로 전사들을 보낸다더군.”
살라스의 말에 토어릭이 인상을 찡그렸다.
“꽤 빠르군요.”
“생각보다 지원자들이 많았다는 모양이야.”
“솔직히…그리 반갑지는 않군요.”
“하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일찍이 군터는 티브리악 가문에 초원의 전사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었다. 부족한 기병 전력을 충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합류한다면 전력이 늘어나니 다른 때였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다른 때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 가뜩이나 파헨델의 병력과 솔롬의 병력이 섞이지 못하고 위화감이 감돌고 있는데, 거기에 제국민도 아닌 초원민족까지 끼어든다?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토어릭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미리 정리를 해둬서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렇지. 동요하지 않도록 미리 말을 해두게.”
“그래도 이곳이 바크렌과 멀찍이 떨어진 곳이라 초원인에 대한 거부감은 조금 덜하겠군요.”
판니른은 바크렌은 물론, 리바스트라나 본다인. 데이븐랏지와도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만인’에 대해 우호적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쪽은 북방의 초원민족에게 시달린 역사가 없으니 초원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앞서 언급한 북부 3주보다는 훨씬 적을 터.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예?”
토어릭은 순간 살라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되물었다.
“싸울 상대가 많이 있지 않나.”
“아아.”
그렇다. 살라스의 말처럼, 판니른은 아직까지 도처에 도적들이 심심찮게 난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판니른 밖으로 나가면 더하다. 서남부의, 복속되지 않은 렌과 폴츠에는 제대로 된 저항군이 아직도 자신들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고.
후자를 상대하려면 따로 명이 떨어져야 하지만, 판니른 내에 존재하는 도적들은 얼마든지 이쪽이 자율적으로 토벌할 수 있다.
“좋군요.”
“좋지.”
최고의 훈련은 실전이다. 또한,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우는 것은 병사들의 결속력을 끌어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장군께서 따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아직은. 허나 곧 시작하시지 않겠나? 총독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말일세.”
“그렇겠지요.”
이것은 기회다. 뒤숭숭한 분위기의 판니른을 싹 한 번 쓸어버리고 나면 적어도 판니른 내에서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게 될 것이다. 그의 위명이 판니른을 뒤흔들고 나면 판니른 내에서 그의 입지는 튼튼하게 굳어진다.
“그런데…걸리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들 말인가?”
“예. 그들은 장군께서 총독과 먼저 만나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장군께서는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더군.”
“물론 장군께서는 그러시겠지요. 허나 저희까지 그래서는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따로 생각이라도 있나?”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꾸준히 주의를 기울이고, 장군께 간언할 밖에요.”
솔롬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군터가 직접 마음을 먹고 움직인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장군께서 저들을 너무 얕보시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물론 토어릭은 그의 주인을 믿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는 ‘그들’을 경계했다. 그것이 신하로서 자신의 책무라고 믿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