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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77화 (577/1,064)

577화

“이놈들!”

얼굴이 새빨개진 사내가 노성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단 병졸들에 불과한 잡것들이 감히 자신의 몸을 붙들고 있다.

“놓지 못하겠느냐!”

“아 거, 좋게 가자니까 통 안 도와주는구만.”

한숨 섞인 목소리.

그리고 명치에서부터 퍼지는 끔찍한 고통.

“커, 컥!”

그는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맞는다? 그것도 버러지 같은 잡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는 지금도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지독한 악몽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왜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아, 대장님. 이놈이 ”

숨이 막혀 컥컥대던 와중,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듯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희망에 차 눈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 할렌…….”

조금 전, 잠들기 전까지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던 얼굴이 눈앞에 있다. 만나면 호통 한 번 시원하게 질러주리라 다짐한 것이 여러 번이었는데, 정작 이렇게 대면하게 되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이오? 대체 이게…….”

“무슨 일일 것 같소?”

“할렌 공.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된 거요. 오해가 있는 거외다.”

“오해?”

“그, 그렇소.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이 분명하오.”

“글쎄. 난 모르겠군. 일단 갑시다. 가서 직접 해명해보시오.”

“해명이라니? 대체 뭘 해명하라는 거요?”

“벨룩스 공이 말하길, 그대와 몇몇 무리가 아바시스의 간적들과 내통하였다더군.”

“뭐, 뭐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내 병사들이 다소 거칠게 대했더라도 이해해주시오.”

“이보시오 할렌 공! 내통이라니? 아바시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나는 내 선친 때부터 대를 이어 솔롬에 종사해왔소. 그런 내가 무엇이 아쉬워 아바시스에 붙는단 말이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난 들은 대로, 명 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니까.”

“이보시오!”

“끌어내라.”

“할렌! 할렌 공!”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동안에도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다. 설마 자신이 뭔가 도움이라도 줄 거라 기대하는 걸까? 할렌은 그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자 기어이 고개를 돌렸다.

“할렌 공…나는, 나는 억울하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똑똑한 척을 하더니, 왜 정작 머리를 굴려야 할 때는 이렇게도 멍청해지는 걸까. 결국 이 자는 이 정도의 머저리였던 것이다.

“정말 딱하군.”

할렌은 몸을 낮추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도 감이 안 잡히시오? 선대부터 대를 이어 솔롬에서 행세를 하셨지. 그런 대단한 위치에 계신 분이 어찌 그리 상황 판단이 안 되시오.”

“나, 난…….”

“이해하오. 그대는 선택을 한 거지. 그럼 그 선택에 대한 대가도 달게 받으시오.”

“이, 이이……!”

“다시 볼 일 없을 거요. 잘 가시오.”

떨리는 두 눈에 담긴 감정이 두려움에서 분노로 바뀔 즈음, 할렌은 몸을 일으켰다.

* * *

밤사이 십여 명의 고위 군관들이 하옥됐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 전부. 성주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탓에 목표가 된 대부분이 별다른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잡혀들어갔지만 몇몇은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저항은 비극적인 결과만을 불러왔다.

“아바시스와 내통한 역적들이다. 저항한다면 사정 봐주지 말고 처리해라.”

성주의 병사들은 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밤사이 울려 퍼진 비명은 그들의 칼이 자아낸 것이었다.

피가 흘렀다. 영문 모르는, 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이라도 짐작한 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부디 자신들의 차례는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벨룩스와 몇몇 인사들이 입을 맞춰주었습니다. 덕분에 드러난 가지들은 모두 쳐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어릭은 살라스에게 보고했다. 이제 잠시 후에는 살라스가 다시 군터에게 가서 보고할 것이다. 아마도 지금 잡아들인 자들을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올 테고, 그러면 일단 급한 불은 다 끄는 셈이다.

“벨룩스 그 자가 그렇게 열심히 움직여줄 줄이야. 기대 이상이군.”

“이왕에 목숨을 부지한 김에 한 발자국 더 내밀어보고 싶다는 거지요.”

떠밀리기만 하면 겁쟁이가 될 뿐이다. 자발적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다. 벨룩스는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기에,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이들은? 동요하지는 않나?”

“동요하고 있지요. 간밤에 성을 빠져나가려고 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성을 빠져나가려 한 자들 중에는 제 발 저린 이들도 있었지만, 특별히 캥기는 구석이 없음에도 그냥 겁에 질려서 몸을 빼려던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 모두 성을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미리 성문을 지키게 한 병사들이 그들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할렌이 잘해주었습니다.”

“마음 써주는 것인가?”

“그런 셈 치지요. 듣자 하니 간밤에 직접 목을 열 개도 더 쳤답니다.”

“그것도 장군께 말씀드리지.”

살라스는 할렌에게 마음을 써주는 토어릭이 기꺼웠다.

대담하고 냉혹한 것 같으면서도 주변 사람을 챙길 줄 안다. 피아구분이 분명하다고 해야 할까. 같은 편인 입장에서는 토어릭이 든든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친구가 아니었는데.’

할렌 만큼은 아니지만, 토어릭도 오랫동안 봐왔다. 햇수로만 따져도 10년이 훌쩍 넘는다. 토어릭이 파릇파릇한 젊은이였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때의 토어릭은 말수가 그리 많지 않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내였다. 뛰어나지도, 못하지도 않은 평범한 군관이랄까? 그때의 토어릭과 지금의 토어릭은 보고 있으면서도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다르다.

‘변한 것인지, 본래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인지.’

사람은 변하는가? 살라스는 본래 그 질문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하는 쪽이었다. 사람이 대한 그의 생각은 후자였다. 본래 그런 기질이 있던 자가 어떤 계기를 통해 기질을 개화하는가에 화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다름 아닌 그 자신으로 인해 바뀌었다.

새로운 팔을 얻은 후, 그는 변했다. 그 스스로도 변화를 체감했다.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토어릭 같은 인재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 기회를 찾지 못해 재주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리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살라스는 자신의 수하들만이라도 한 번 세심히 살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 아는가? 토어릭 같이 숨어있던 인재가 있을지.

“그럼 난 이만 장군을 뵈러 가겠네.”

“예.”

살라스는 곧장 군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른 시각이지만 군터는 진작에 그의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살라스는 군터가 해가 뜨기 전부터 일을 보고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그의 상관은 잠을 자기는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잠이 적은 사람이었으니, 하루의 대부분을 연무장 아니면 집무실에서 보내곤 했다.

“장군.”

“간밤에 꽤나 소란스럽더군.”

“일이 순조롭게 풀렸습니다.”

“얼마나 잡아들였나?”

“눈에 들어온 자들 모두입니다.”

“자리가 많이 나겠군.”

“당초 계획했던 대로 모두 참하리까.”

“왜 굳이 묻느냐.”

묻지 않고 본래 정한 대로 처리해도 된다. 그럼에도 살라스가 굳이 물은 것은, 혹 그 짧은 사이에 군터의 마음이 변했을까 싶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당사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일족까지 모두 참한다. 족히 수백이 되는 인원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후환을 두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다음번에 이런 일이 다시 있게 되면, 그때는 다시 묻지 마라.”

“예.”

다시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군터가 권력자가 된 이상, 그의 것을 탐하는 승냥이들은 언제고 달려들 것이다. 어쩌면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그때마다 피는 흐를 수밖에 없을 터.

‘새삼 망설일 필요 없지.’

전장에서 뿌리는 피나 궁중에서 뿌리는 피나, 결국은 다르지 않다. 쓸데없이 괜한 의미를 부여하여 마음의 짐을 사서 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얹힌 것 같던 속이 조금 편해졌다. 살라스는 그 이후에 자잘한 보고를 한 뒤, 관리들을 소집해 간밤에 잡아들인 자들의 처형을 명했다.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다. 시체가 된 것처럼 창백해진 벨룩스와 그의 무리는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토어릭이었고, 살라스는 토어릭이 ‘엄벌’을 주장할 때마다 가볍게 동조해주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솔롬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이들 수십 명이, 그들의 가족과 함께 목이 날아갔다.

“명심하시오. 이곳 솔롬은 국경이오. 언제 적들이 암수를 뻗어올지 모르는 곳에서 흐트러짐은 용납할 수 없소. 우리 모두는 성주님 아래 굳게 단결해야 하오. 모두들 항상 그것을 잊지 말고 솔롬의 성벽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오.”

“예.”

고개 숙이는 이들 중 진심이 아닌 이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복종할 것이다. 그들을 짓누른 두려움이라는 그림자가 결코 걷히지 않을 테니까.

* * *

“각하. 들으셨습니까?”

로드니 캄브라이는 다급하게 뛰어오는 수하를 보고 혀를 찼다. 어찌나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수하는 정작 그의 앞에 와서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솔롬의 일 말인가? 그래. 들었네.”

“잔혹한 자입니다. 숙청을 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무식하게 저지를 줄은…….”

“구실은 있지. 아바시스와 내통을 했다잖나.”

“말 그대로, 억지로 가져다 붙인 구실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구실은 믿지 않을지라도, 그의 힘과 잔혹함은 믿게 되겠지. 그게 중요한 것 아닌가?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누가 그에게 따질 수 있겠나? 크레이그? 몰던? 브랜우드?”

“음…….”

“그들은 그 자에게 함부로 하지 못해. 솔롬의 신임 성주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그들은 정말 지푸라도 못 잡는 신세가 되어 버릴 테니까.”

물론 그들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갓 부임한 솔롬의 성주를 날려버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중앙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자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늑대를 몰아내면 그 자리를 노리는 호랑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터. 그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아무튼 놀랐어. 그렇게 시원하게 저질러버릴 줄은 몰랐거든.”

“각하. 그 자와 손을 잡는 것은 재고해보심이 어떨지요. 그런 막무가내를 끌어들인다 한들…….”

“일처리가 급하고 잔혹하기는 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아. 난 그가 영리했다고 보네.”

“허면…….”

“때가 되었어. 사람을 보내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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