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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76화 (576/1,064)

576화

노골적인 협박.

“…….”

벨룩스는 입을 다물었다. 위기감이 그를 지배했다. 두려움이 정도를 넘어서니 오히려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설마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 성주님께서는 이 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자네들이 무엇을 하는지, 무슨 꼬리를 감추고 있는지도 다 알고 계신단 말이지.”

“성주님과 척을 질 생각은 없소. 다만 부당한 숙청의 칼을 맞기는 싫었을 뿐.”

“부당하다?”

“그렇소. 단지 성주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그동안 솔롬에 헌신해온 세월이 부정당한다면, 어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소?”

진중하게 말했으나 토어릭은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말은 좋은데, 너희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

“무슨 말이오?”

“성주님께서 오시기 전부터 이리저리 선을 대지 않았나? 설마하니 새로운 성주가 핍박할까봐 따로 살 길을 찾은 거라 말하지는 않겠지? 그건 변명치고도 너무 비루한데.”

“으음.”

“시간이 있었잖나. 성주님께서는 자네들에게 시간을 주셨어. 파헨델의 병력이 당도하기 전까지 자네들이 알아서 신변을 정리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겠나?”

억지다. 그러나 마냥 틀린 말도 아니다. 확실히 다 알고 있었다면, 성주가 지금 벌인 일들도 이해가 가능하다. 누가 남의 사람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겠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확실히 솔롬의 군관들 중 외부의 후원을 받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허. 피차 다 아는 사실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말장난하지 맙시다. 이보시오 벨룩스 공. 난 공을 보면 참 헷갈립니다.”

“무슨…….”

“사람이 좋은 건지 멍청한 건지 헷갈린다 이 말이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난 지금 공에게 선택지를 준 거요. 그 목을 부지할지, 내어놓을지.”

벨룩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지만, 토어릭은 그가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입은 벌어졌어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를 증명한다.

툭!

토어릭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선택은 그대의 몫이오. 알고 있겠지만, 시간을 길게 줄 수는 없소. 그대에게 허락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질 거요.”

그러니 서두르시오.

뒷말은 삼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 *

“어찌 나올 것 같은가?”

“제 목을 챙기려 하겠지요.”

살라스의 물음에 토어릭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확신하나?”

“머리를 쓸 줄 알지만, 또한 보신에 집착하는 자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 그 정도 자리에 만족하고 있을 리 없지요.”

“그를 꽤나 고평가하는군.”

“대단하지 않습니까. 온갖 잡것들을 다 상대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미움도 사지 않고, 적당히 받아먹으면서도 크게 문제가 될 일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처세술이라고 해야 할까. 휘하 병사들에게 나름대로 인망도 있는 것을 보면 어찌해야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는지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꽤 쓸만한 재주다. 특히 솔롬의 기존 인사들과 좋든 싫든 화합해야 하는 이쪽으로서는 꼭 필요한 것이고.

“살라스님께서는 그 자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글쎄.”

살라스는 말을 아꼈지만 토어릭은 그를 이해했다.

‘안 맞지.’

살라스와 벨룩스. 둘은 척 봐도 결이 맞지 않는다. 조금 고쳐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지식한 면이 있는 살라스와,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벨룩스는…어떻게 봐도 맞지 않는다.

‘그래. 제 한 목숨 건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놈이야.’

겁이 많다. 그 어떤 말로 포장하려 해도 결국 그것이 벨룩스란 자의 본질이다.

“그나저나…계획대로 되면 빈 자리가 많이 생기겠군.”

“자리가 없어 걱정이지, 많아서 걱정일 리는 없습니다. 자리가 비면 눈에 불을 켜고 충성경쟁을 할 이들은 넘쳐납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누군가의 위기가 누군가에게는 기회다. 당장은 저들이 한 몸처럼 뭉쳐 있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벨룩스 그 자가 일을 제대로 해주면 몇 명쯤 올려줘야겠군.”

“그래야지요.”

아직 빈 자리는 많다. 솔롬 밖의 판니른 방위군 같은 경우 신임 총독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기에 인선 쪽에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았고, 솔롬에도 앞으로 생길 몇몇 자리들이 있다.

“장군께는…….”

“이런 일에 장군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토어릭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군터가 직접 나서서 제대로 칼 한 번 휘둘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보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호되게 혼나겠군.’

살라스의 단호한 태도를 보니 살짝이라도 이견을 보였다가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듯했다.

뭐, 그래도 살라스의 말도 일리는 있다. 뒤로 물러나 있으면 보다 신비감과 위엄을 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역시 장군하면 힘인데.’

힘을 보여준다. 지극히 원초적인, 어쩌면 유치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사실 이게 가장 효과적이다. 군터가 직접 칼을 손에 쥐고 몇 명 정도 목을 쳐주면 아주 보기 좋게 조용해질 것이다. 단 얼마간뿐이라고 해도.

공포를 심어주는 거다. 어줍잖은 각오로는 감히 목소리를 낼 생각도 하지 못하게.

‘미적지근하단 말이지.’

군터가 나서지 않고 그 밑의 자신들이 움직이는 것은 그만한 파괴력을 내지는 못한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라스가 군터가 나서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충성심의 발로일 터.

‘변했다고 해도, 이런 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살라스답다고 해야 할까. 이런 고지식한 부분이 그다운 점이지만 이럴 때는 조금 아쉽다.

“할렌이 나서기로 했나?”

“예. 의욕적이더군요.”

“자네가 부추긴 건 아니고?”

역시 날카롭다. 토어릭은 대충 둘러대려 하다가, 가라앉아 있는 살라스의 눈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여기서 괜한 말로 그를 속이려 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시다시피, 일전의 그 일 이후로 할렌 그 친구가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랬지. 그래서?”

“하는 것도 없이 그렇게 힘만 빼고 있느니 차라리 공을 세워서 장군께 속죄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해준 말은 그게 전부입니다. 선택은 그 친구가 했지요.”

“…….”

“심려치 마십시오. 할렌 그 친구, 이런 일에는 소질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할렌이 아니야. 의욕이 넘쳐서 너무 과하게 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지.”

“과하면 과한 대로 좋지 않습니까. 본보기를 보이는 것인데, 어느 정도는 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은 당장 고개를 숙이게 할 수는 있어도, 마음속에서부터 복종시키지는 못해.”

“너무 이상적인 말씀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복종케 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최선이겠으나 그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런 것을 원했다면 시간을 두고서 천천히 다가갔어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나선 이상,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바로 그렇게 머리를 짓눌러버리는 겁니다.”

“그걸로 충분한가? 그랬다가 언제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계속 힘주어 누르면 그만 아닙니까. 그럼에도 고개를 드는 놈이 있다면 목을 치면 되는 일이고요.”

“자네와 나는 많이 다르군.”

“…….”

“하지만, 지금은 자네의 말이 옳은 것 같아.”

“사람이 항상 옳을 수만은 없지요.”

“그런 점을 배워야 하는데, 쉽지가 않군.”

살라스가 옅게 웃었다.

“그래. 자네 뜻대로 하게. 벨룩스가 결정을 내리면, 곧바로 움직여야겠지?”

“예.”

“구실은?”

“적과 내통 정도로 하지요. 내통하여 반란을 획책했다…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총독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군.”

“장군께서는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계십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손을 잡을 마음이 있다면 먼저 나서서 긁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좋아.”

살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간 그는 해가 지는 하늘을 눈에 담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한 손은 허리춤의 칼 손잡이 쪽에 가까워져 있었다.

“피를 보는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살라스님은 적당하게 중심을 잡아주십시오.”

“그래. 그래야지. 알고 있네만…아쉽군.”

“몸이 근질근질하십니까?”

“그래. 실전을 뛰어본 지 너무 오래 된 것 같아.”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자잘한 일 말고, 제대로 된 기회 말입니다.”

“그러길 바라네.”

그러길 바란다, 라. 어찌 보면 살라스답지 않은 말이다. 그는 군인이고 무인이면서도 피를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되도록 그 쪽을 택하는 인물이었으니.

그런 그가 변했다. 아니, 변하고 있다.

‘저 팔 이후야.’

잘려나간 팔 대신 새로운 팔을 얻은 뒤. 그 후로 살라스는 조금씩 변했다. 보다 적극적이고, 호전적으로. 본인이 아는지 모르지만, 토어릭의 눈에는 그 변화가 뚜렷하게 보였다.

‘뭐, 괜찮지.’

2인자로서 신중하고 무게감이 있는 것도 좋지만, 그 아래 있는 자들이 죄다 거친 무부들인 만큼 어느 정도 거칠 때는 거칠어줘야 한다. 이전의 살라스에게는 그런 부분이 부족했다. 때문에 토어릭은 살라스의 이런 변화가 긍정적이라고 보았다.

“오늘. 늦어도 해가 뜨기 전에는 달려올 것입니다.”

“할렌에게 준비하라 이르게.”

“예.”

밤이 깊어갔다.

* * *

“…….”

어두운 방. 벨룩스는 머리를 감싸 쥐고 거친 숨을 토했다.

침착하자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외쳤지만 도저히 토어릭의 경고, 아니 협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안 돼. 안 돼!’

허세가 아니다. 그 잔혹한 살인자는 기어코 스스로 한 말을 지킬 것이다. 자신의 목이 떨어질 것이며, 아내와 자식들까지 시퍼런 칼날을 피하지 못할 거다.

‘시간이 없다. 이쪽에서 어떻게 움직이기도 전에 모든 일이 끝날 것이야.’

지금도 감시자가 붙었을 거다. 수하들에게 호위를 철저하게 하라 했지만, 그게 과연 소용이 있을까? 파헨델에서 온 병사들은 하나하나가 정예다. 그들이 움직인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차라리 그들의 말처럼 진작에 뒤집어엎었어야 했나? 아니야. 무모해. 성공했을 리 없다.’

고민이 깊어갔다. 이마에 맺혀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두려움은 점점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방도가 없어. 방도가…….’

촛불이 꺼졌다. 방 안은 완전히 캄캄해졌다.

‘방도가 없다.’

그는 힘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걸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마저도 그의 몸을 식히지는 못했다.

“오셨소?”

도착한 곳. 그곳은 그의 방과는 달리 환했다. 창백해진 그의 얼굴과는 달리, 상대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이름을…말씀드리겠소.”

“역시 똑똑하시군.”

“지드…….”

토어릭이 손을 들었다.

“아니. 아니지.”

“……?”

“그게 아니지 않소.”

“무슨 말인지…….”

“그대가 불러야 할 이름은 그대가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요. 다 알만한 사람이 왜 그러시오. 피곤해서 그런 건가?”

벨룩스는 눈을 감았다.

깊은 수렁에 빠졌다.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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