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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75화 (575/1,064)

575화

“분위기 한 번 끝내주는군.”

“어찌 아니 그렇겠나. 자기들 목이 간당간당하다고 생각할 텐데, 잠이나 설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캥기는 구석이 없다면 불안할 이유도 없지.”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아드리안이 할렌을 힐끗 보며 말했다.

“아직도 풀 죽어있는 건가? 적당히 하지 그래.”

“네놈이 내 입장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나?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글쎄. 네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이건 뭐 위로를 하려는 건지 놀리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악의는 없는 것 같아 할렌은 한 번 이를 부득 갈았을 뿐, 더 성을 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풀 죽어있을 생각이냐? 보고 있기가 영 힘든데.”

꾹꾹 눌러 참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다. 할렌은 결국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폭발했다.

“왜 자꾸 가만히 있는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냐. 한판 붙어보자는 거냐?”

“붙어볼 용기는 있고?”

“못할 것도 없지.”

두 사람 사이에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누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기라도 한다면 바로 검을 빼 들 것 같았다.

짝! 짝!

난데없는 박수 소리.

“훌륭하군. 훌륭해.”

언제 왔는지 모를 토어릭이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만 하게. 자네들끼리 그렇게 언성을 높이면서 싸우고, 검까지 뽑아서 누구 한 명의 목도 날아가면 장군께서 크게 기뻐하실 테지. 아주 좋아. 계속하게나. 아! 난 신경 쓰지 말게나. 나는 가만히 여기서 구경만 할 테니까.”

“으음.”

반쯤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던 할렌이 침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입매를 비틀며 도발하던 아드리안도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이보게 토어릭. 이 녀석을 보게. 이 한심한 꼴을 좀 보라고. 자네가 말을 잘하니 한 마디 좀 해주게나.”

토어릭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닌가? 정말 칼부림이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적당히 죽이지 않고 패주면 돼.”

“허튼소리 말고. 하여간 자네는 그 성미 좀 죽여야 해.”

아드리안이 불이라면 할렌 역시 불이다. 아드리안의 저돌적인 성격을 받아줄 사람은 원래 드물지만, 할렌은 특히 좋지 않은 상대다. 조금도 숙이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들이받아 버리니 둘이 부딪친다 하면 좋게 끝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술 한 잔을 하든, 서로 욕 한 번 시원하게 쏟아붓든 해서 어떻게든 풀리는 모양이지만.

“할렌이 장군께 갖는 죄의식은 당연한 걸세. 제3자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이 못 돼.”

“그렇지만.”

“할렌 자네도 적당히 하게. 자네가 죄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미 장군께서 덮겠다 하셨어.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자네답지 않게 기죽어 있을 텐가? 장군께서 뭐라고 생각하실 것 같나?”

“…….”

토어릭의 조곤조곤한 말에 할렌이 침묵했다.

사실 그가 전에 비해서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회의자리에서 말 수가 줄어들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해졌을 뿐.

그런 할렌이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시간이 해결해주겠거니 하고 넘기려면 못 넘길 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드리안이 굳이 이리 나오는 이유는 그가 평소 할렌과 투닥거리긴 해도 내심 그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자신의 기준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할렌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겠지.

“눈치나 보며 위축되어 있느니 차라리 공을 세울 기회나 모색하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공을 세워서 장군께 속죄하면 되지 않겠나.”

“말은 쉽군.”

“자네가 품고 있는 죄의식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크면 클수록 그 속죄도 쉬워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그래. 맞는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자네가 한 번 나서서 공을 세워보는 것이 어떤가?”

“무슨?”

토어릭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간만에 자네 성격대로 한 번, 제대로 보여주란 말이네.”

* * *

군터는 살라스가 파헨델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하자마자 미뤄두었던 인사를 단행했다.

그의 측근들, 살라스를 필두로 한 장교들이 솔롬의 요직들을 대거 차지했다. 솔롬을 벗어난, 판니른 남부 쪽의 자리는 명목상으로라도 총독과의 협의가 있어야 하기에 당장 손을 쓰지는 못하지만 솔롬의 관직은 군터가 얼마든지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었다. 솔롬의 성주인 그의 말은 솔롬에서 곧 법이기에.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너무하는군.”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 그것도 아주 급하고 거칠게. 각오는 했었지만, 그래도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고위직일수록 관직이 한 단계에서 두 단계, 심하면 그 이상까지도 떨어졌다. 더 심한 건, 그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자리를 지킨 이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수는 극히 드물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부대의 편제부터가 바뀌었다. 파헨델의 병사들을 솔롬의 병사들과 섞는 것이야 화합을 위해 그럴 수 있다 치지만, 그 지휘관들이 대부분 파헨델 출신 인사들이라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기존에 각 부대를 이끌고 부대장들은 부대가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보직 해임이 되었고, 새로 부대장을 맡은 이들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직접 끄집어내린 것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면 눈 가리고 아옹도 안 될 수준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졸지에 자기 자리를 눈 뜨고 빼앗긴 이들은 연일 이럴 수는 없다며 이번 인사에 대한 불만을 성토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은밀하게 말이다. 감히 성주의 앞에 가서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담이 큰 이는 없었다.

“놈들의 방자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 할렌이라는 놈 말입니다! 아주 대놓고 한 번 걸리라고 눈을 부라리고 다니는데, 이거 참!”

“참아야 하네. 빌미를 주면 안 돼. 놈과 푸닥거리를 하면 그게 바로 놈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꼴이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는 게지요. 그래서.”

사실은 조금 다르다. 할렌이라는 놈이 눈을 부라리거나 거친 음성을 토할 때마다 조금씩 위축되곤 했다. 대들려고 해도 대들기 힘들다. 대차게 한 번 소리를 질러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두려움이 목구멍을 옥죄어 그럴 수가 없었을 뿐.

두렵다. 주인을 닮았는지, 그 수하 놈들도 하나같이 만만한 놈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위험해 보이는 놈들 중 하나가 바로 할렌이었다. 듣기로는 저 북쪽 초원 출신의 야만인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따금 놈이 살기를 드러내면 절로 등줄기가 축축해지곤 했다.

“하지만…이대로 계속 참고 있기는 힘듭니다. 벌써부터 아랫것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찍소리도 못하게 계속 밟히고만 있다가는…….”

병사들과 일선 하급 장교들은 흐름에 민감하다. 그들은 단순하여 힘 있는 자들을 따른다. 정확히는, 자신들을 챙겨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이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휘둘리고만 있으면, 특히 할렌 같은 놈이 대놓고 설쳐대는데도 시원하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기가 죽어있으면 그들은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힘을 보고 따르기 시작한 이들이 힘 잃은 주인을 계속 따를까? 그럴 의리가 있는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힘을 보고 따르기로 마음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앉아서 당할 뿐입니다. 어차피 당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악 소리라도 한 번 내보는 것이…….”

상대는 황자가 직접 임명한, 적법한 솔롬의 성주다. 솔롬의 모든 것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니, 그의 의도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을 내놓아야만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보여줘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면 저쪽도 재미없을 거라는 걸.”

“내가 한 번 이야기해보겠소. 그러니 일단은 움직이지 말고 계시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벨룩스도 더는 그들에게 인내를 강요할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신임 총독에게 선을 댈 때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지만, 저쪽의 몰아세우는 정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덕분에 총독에게 선을 댈 때까지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이쪽의 인내심이 벌써 바닥이 나버렸다.

벨룩스는 성주를 찾아갔다. 그러나 성주에게 기별을 넣기 전에 그가 맞닥뜨린 것은 묘한 표정을 한 군관이었다.

“토어릭 공.”

“벨룩스 공. 무슨 일입니까.”

“성주님을 뵈러 왔소.”

“성주님께서는 피로 때문에 쉬고 계십니다.”

“피로?”

“공은 모르겠지만, 성주님께서는 그간 정말 쉼 없이 달려오셨습니다. 특히 솔롬의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신 이후에는 크게 기력이 쇠하셨지요.”

말도 안 된다. 그 성주가 피로?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에게서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핑계다.’

이쪽을 만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예상하고, 듣지 않겠다고 문을 닫아 건 것이다.

‘이건…정말 너무하는군.’

타협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이건 숫제 입에 칼을 물고 죽으라는 식 아닌가.

“다만…….”

벨룩스가 표정 관리에 힘겨워 하고 있을 때, 토어릭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성주님께서는 당신이 휴식을 취하시는 동안, 성내의 일에 대해서 이 사람에게 일임을 하셨습니다.”

“…그대에게?”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실 말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하십시오.”

“그대가 다룰 수 없는 일이라면?”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성주님과 독대해서라도 답을 들으면 될 일.”

“…….”

벨룩스는 토어릭에게 말을 할지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성주에게 직접 답을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대리인에게라도 답을 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간교한 자.’

토어릭을 보고 처음 했던 생각이다. 그 생각은 시일이 지나고, 토어릭이라는 자를 알아가면서 점점 더 굳어졌다.

“그리 말씀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하십시오.”

“너무 몰아세우는 것이 아닙니까?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성내의 모든 일은 성주님의 재량으로 이루어집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너무 급격한 변화는 여러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벨룩스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에 대한 토어릭의 반응은 심드렁함 그 자체였다.

“삐져나온 것은 쳐내면 그만이오.”

“쳐내지는 이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안 있으면? 잡초가 제아무리 꼿꼿하게 서봐야 칼질 한 번이면 충분하지.”

벨룩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이보시오. 이보시오. 벨룩스 공. 아니, 벨룩스. 어찌 이러는가?”

“무슨…….”

“성주님께서 왜 아직까지 네 목을 붙여놓았다고 생각하지? 그쪽의 입만을 대변하는 것이 네 놈의 일인가?”

벨룩스는 급변한 토어릭의 태도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는 차갑게 변한 토어릭의 눈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본분을 잊지 마라. 네놈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생각을 할 줄 모르는 머리통을 붙여놓을 이유는 없을 테니.”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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