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살라스와 파헨델의 병력이 당도했다. 군기 정연한 오천의 군대가 솔롬에 들어서던 순간. 솔롬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위 장교들에서부터 병사들까지, 표정이 굳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사실 병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파헨델에서 오천이 오든, 만이 오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헨델의 군대가 서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윗분들의 알력에는 관심 없다. 그러나.
‘뭐야 저놈들?’
그들도 나름대로 국경에 배치된,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파헨델의 병사들은 심상치 않았다.
척 보기에도 돈깨나 들어갔을 것 같은 뛰어난 무장이야 그렇다 치자. 그러나 지금 막 전장에서 돌아온 듯한, 물씬 풍기는 피 냄새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저들의 기세만 보면 당장 성내에서 칼을 뽑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장군. 용서해주십시오. 늦었습니다.”
살라스가 말에서 내려 군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분히 보여주기식이었고, 지켜보는 이들도 그것을 알았음에도 누구 하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자루 잘 갈린 칼 같은 살라스의 분위기가 그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늦지 않았다.”
군터는 그런 살라스를 보며 흡족함을 느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새롭게 팔을 얻은 후부터 살라스의 기세는 보다 날카로우면서도 사나워졌다. 살라스 본인은 그에 대해 조금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지만, 군터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보았다.
“오는 길에 어려움은 없었느냐.”
“군데군데 가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곳들이 있었던 것을 제하면 특별히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가도야 필요한 자들이 차차 손을 보겠지.”
당연히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이들 중, 지금 하는 말을 전해줄 이들이 몇몇 있을 테니까.
“고생했다. 쉬어라.”
“예.”
쉬라고 말은 했지만, 군터는 자리를 파한 후에 곧바로 살라스를 불렀다. 살라스도 기다렸다는 듯 부름이 있자마자 무장도 풀지 않은 채 군터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장군. 예상하셨던 대로입니다. 총독이 온다는군요.”
살라스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시점에 총독이 내려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냐.”
“캄브라이이의 차남이라고 합니다. 분명 이름이…로드니 캄브라이였던 것 같습니다.”
“캄브라이라.”
조금은 의외였다. 물론 총독이 올 것을 예상했고, 그 인사는 다섯 가문 중 하나에서 나올 것이라 짐작했었지만 캄브라이는 그중에서도 후 순위였다. 동부에 손을 뻗는 데 적극적이었던 카리아 가문 같은 곳이 나설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교적 얌전했던 캄브라이라? 다섯 가문이 어떤 은밀한 교감을 나누었겠지만, 어찌 됐든 캄브라이는 의외다.
“오는 길에 야스메티 공이 보낸 사람과 접촉했습니다.”
“음?”
“서신을 전해주더군요. 장군께 올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살라스가 품에서 비단에 둘둘 싸인 서신을 꺼냈다.
“…….”
군터는 서신을 읽었다. 짧지 않은 글을 읽는 내내 표정의 변화가 없어 살라스를 비롯한 군터의 수하들은 서신의 내용이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장군. 무슨 내용입니까?”
군터가 한동안 말이 없자 참다 못한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용하라는군.”
“예?”
군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수하들에게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서신을 건네 직접 확인하게 했다.
* * *
“얼마나 남았나?”
“이대로라면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틀. 꽤나 멀군.”
“전쟁 이전이었다면 벌써 도착했을 것입니다. 다만 전쟁이 있었고, 그 후에 이런저런 소란이 이는 과정에서 잘 정비되었던 길이 상당수 망가진 탓에…….”
“쯧! 하잘에 당도하고 업무를 시작하게 되면 먼저 이 길부터 정비해야겠군.”
엉덩이가 배긴다. 평소 무술은 등한시했어도 말을 타는 것은 좋아했기에 종종 타곤 했었는데, 그런 그도 수십 일의 이동은 곤욕스러웠다. 차라리 마차를 탄다고 할 것을. 알량한 자신감 때문에 괜한 고생을 자처하고 말았다.
“하잘은 어떤 곳인가?”
“번화한 곳이지요. 화려하고 거대합니다. 단순히 규모 면에서는 테리브란보다도 앞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호오.”
“물론 과거의 일입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전쟁 이후에 하잘에서도 꽤 굵직한 사고가 적잖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아군이 점령한 후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겠으나…그래도 분위기는 여전히 뒤숭숭한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그 전쟁통에 하잘이라고 멀쩡했겠나. 아니, 오히려 하잘이라서 더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겠지.”
“그 말씀이 옳습니다.”
하잘은 부유하다. 판니른의 부가 모여있는 곳이라 해도 무방하니, 그런 곳을 눈 뒤집힌 승냥이들이 가만 두었을 리가 없다.
‘내게는 오히려 그 편이 나아.’
하잘이 혼란스럽다고? 그건 그것대로 좋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에 안성맞춤 아닌가.
“각하. 항시 주의하셔야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하잘의 상황이 썩 좋지 않을 테니 외부에서 손을 쓰기가 쉽습니다. 되도록 어디를 가시든 가문의 호위와 함께 하시고…….”
“알고 있네.”
타당한 걱정이다. 당장 하잘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판니른의 총독으로 부임하는 것을 마뜩찮아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군터 크렘보르.’
만만치 않은 상대다. 가문의 후광이 아니었더라면 마주하는 것조차 버거웠을 거다. 그만한 거물이며, 위험인사다. 가문의 어르신들까지도 그를 종종 언급할 정도로.
‘어떻게 나올까.’
그자의 입장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역시 암살이다. 암살자를 직접 보내든, 다른 수를 쓰든 해서 신임 총독을 해치우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뒷말이야 당연히 나오겠지만 하잘의 소란을 핑계로 대면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어떻게든 둘러댈 수는 있을 테고…….
‘그렇게 막무가내일까 싶기는 한데.’
동부의 머저리들과 대놓고 손을 잡은 것을 보면 야심이 있고, 과감한 결단력 또한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임 총독을, 그것도 캄브라이 가문의 직계를 암살할 정도로 멍청한 자일까?
‘두고 보면 알겠지.’
어차피 내친걸음이다. 돌이킬 수는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이제 무슨 숫자가 나오는지 지켜보기만 하면 될 터.
로드니 캄브라이는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슬쩍 들면서 자세를 고쳤다. 오랫동안 애지중지해온 애마가 오늘따라 야속했다.
* * *
야스메티는 마지막 장을 내려놓았다. 다 읽고 내려놓은, 수십 장에 달하는 보고서가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로드니 캄브라이.”
그는 캄브라이의 차자(次子)다. 그러나 장남이기도 하다. 본래 장남이었던 이가 병으로 죽은 탓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캄브라이의 차기 가주 자리는 그의 몫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그가 정실부인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캄브라이의 삼남은 죽은 장남과 같은 정실부인의 배에서 난 자식이며, 영특한 면이 있어 가주의 총애도 제법 얻고 있다. 그러면 이쪽이 차기 가주에 더 가까운가하면…그것도 아니다.
삼남은 어리다. 이제 갓 열 살이 넘었다. 당장 캄브라이 가주가 명을 달리할 경우, 그 꼬마가 아비의 자리를 이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내몰린 거지.’
캄브라이 가문 내에서 차남을 지지하는 세력과 삼남을 지지하는 세력을 비율로 따지자면 대충 4 대 6 정도. 삼남 쪽이 더 유리하지만, 차남의 세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차남 쪽은 직접 당사자가 발로 뛰며 세를 늘릴 수도 있다.
삼남 쪽에서는 그것이 불안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악화된 가주의 건강은 그들의 그런 불안감에 부채질을 했을 것이고.
삼남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들은 온 힘을 모아 차남을 동부 벽지로 몰아냈다. 물론 이는 가주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에 차남측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후계 자리를 놓고 으르렁거린다고 해도 가주의 명이 떨어지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가능성은 충분해.’
캄브라이의 차남은 홀로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협력자가 필요하다. 그의 임무는 판니른의 군권을 쥔 군터 크렘보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지만, 그의 마음이 달리 움직인다면 상황은 변할 것이다.
“로드니 캄브라이.”
물론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가 꼭 예상대로 움직일지는 알 수 없다. 견제해야 할 상대인 군터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가문과 중앙 조정을 등지는 이반 행위일 테니까. 군터와 손을 잡는 순간, 그는 정말로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는 물론이고, 그나마 비빌 언덕마저도 모두 사라지는 셈.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서 그가 이쪽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까? 알 수 없지만, 야스메티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성주와 으르렁대는 총독 자리에 만족할 인사가 아니야.’
캄브라이의 가주 자리를 눈앞에 두었던 이가 아닌가. 비록 야속한 부친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났다지만, 그 야심이 모두 사라졌을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눈앞에서 한 번 놓쳤기에 더 독이 올라있지 않을까? 고매한 귀족 도련님께서 지금쯤 굶주린 승냥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
‘음. 충분해. 충분하고말고.’
다시 생각해보아도 그럴듯하다.
‘그쪽의 일이 내 생각대로 잘 풀린다면…그때는 나도 떠나야겠군.’
그 일이 잘 풀린다면 이곳에서 그의 일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잘한 일들이야 계속 생기겠지만, 그런 것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아쉽긴 해.’
테리브란은 멋진 도시다. 세련된 여인들은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알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맛 좋은 술들은 마실 때마다 즐겁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슬슬 놓아줘야 할 때다.
‘이제는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아직 이런 생각을 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타고나기를 저질스럽게 타고난 몸뚱이는 벌써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바짝 마른 나무에 작은 불씨를 던진 것은 그의 선택이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삐걱거리는 날이 몇 년 정도 늦춰진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뭔가 그럴듯한 것 하나 정도는 이루고 가야지.’
향락은 즐길 만큼 즐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금욕적인 삶을 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것에 주력할 생각이었다.
때마침 무대도 적당하게 만들어졌으니까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