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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73화 (573/1,064)

573화

솔롬에서 마중 나온 이들의 대표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그랬고, 군터가 보기에도 그랬다. 평범한 군관. 그에 대한 첫인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러나 겉으로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그가 정말 평범한 사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평범한 자는 한 성의 사령관이 될 수 없다. 비록 정식이 아닌 임시라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성벽 위에 꽂힌 크렘보르의 문장기. 저걸 대체 어떻게 구해다 달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 정도의 수완은 있다는 뜻이니 역시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다.

“벨룩스라고 합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인사. 군터는 군례를 취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도 벨룩스는 별로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저 깃발은?”

“보시다시피…크렘보르의 문장기입니다. 장군께서 솔롬의 성주가 되셨으니 마땅히 크렘보르의 문장기도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문이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깃발을 어떻게 구했나?”

“외지에 있는 이들일수록 중앙의 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장군께서 솔롬의 성주로 내정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준비했습니다.”

약삭빠르다고 해야 할지, 치밀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군터는 이 사내에게서 별로 나쁜 인상을 받지 않았다. 능력은 있는 것 같고, 어차피 솔롬과 인근의 사정에 밝은 수하가 새로 필요하던 차.

“나를 섬길 텐가?”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텐데? 저렇게 깃발까지 준비할 정도라면 더더욱.”

군터의 건조한 말에 벨룩스가 다시 한 번, 처음보다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받아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크렘보르를 섬기겠습니다.”

“기대하지.”

솔롬의 성문으로 들어가면서, 군터는 벨룩스로부터 솔롬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현재 솔롬에 상주하고 있는 병력은 6천입니다. 닷새 거리 안쪽에 위치한 위성(衛城)들이 셋이며, 그곳에 각기 천 오백씩의 병력이 머물고 있습니다.”

합하여 대략 만이 조금 넘는다.

“나머지 병력은 곳곳에 판니른 동부에 퍼져 있는 초소들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 수가 얼추 3천가량입니다.”

그렇다면 합쳐서 만 삼천이 조금 넘는다. 거기에 파헨델에서 올 병력까지 합하면 조금 모자르기는 해도 대충 2만.

“병력은 전부 판니른 동부에 집중되어 있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국경을 지키는 군대의 역할은 외적의 방비. 따라서 솔롬을 중심으로 한 동부군은 판니른의 동쪽 국경을 감싸는 모양으로 퍼져 있는 모양새였다.

“그런 것치고 이 성은 별로 실용적이지 않군.”

“어느 부분이 마음에 차지 않으시는지.”

“해자는 얕고, 성문도 별로 튼튼해 보이지 않는다. 성벽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노대(弩隊)는 조금 손을 봐야할 것 같고…….”

사실 솔롬은 전선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성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괜찮은 편이었다. 지휘관 열 명을 데려다놓고 보여주면 아홉 정도는 고개를 끄덕일 만큼.

그러나 군터는 의도적으로 흠결을 짚었다. 없는 것을 억지로 꼬집지는 않았으나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도 칼 같이 지적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이제 그의 임지이자 크렘보르 가문의 성이 될 곳인 만큼 최대한 손을 보고 싶었던 것이 첫째. 그리고 엄격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새로이 그의 수하가 된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 둘째였다.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을 바로 다 쳐낼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처리해야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고삐를 조이면서 옥석을 가려볼 생각이었다.

“해자는 곧바로 말씀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또한, 목수와 석공들도 되도록 빨리 불러모으겠습니다.”

이 자는 어느 쪽일까.

군터는 그가 말한 것들을 다 숙지했다는 듯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벨룩스를 보며 잠깐 생각했다.

* * *

“얼마나 걸리겠느냐.”

“겉만 핥는 것이라면 하루로도 족하겠습니다만, 그것이 아니니 뭐라 말씀드리기가 애매합니다. 장군께서 처음부터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신 덕에 저들이 좀 얼어 있는 것 같아서…….”

토어릭이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하온대…역시 그 벨룩스라는 자가 주요 인물임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가 모두를 이끌지는 않지만, 대표 역할은 하는 것 같았습니다. 보아하니 이런저런 이견들이 생길 때는 그가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럭저럭 두루두루 인망을 쌓은 것 같더군요.”

“그리고?”

“처가 한 명, 첩이 한 명입니다. 자식은 처에게서 아들 하나를, 첩에게서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보았습니다. 장남은 처가 낳았고, 또…….”

“간단히.”

“소관의 소견으로는 특별히 의심이 가는 구석은 없었습니다. 그냥 수완 좋은 인사…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이 더 오면 그때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만.”

군터는 솔롬에 도착한 첫날에 토어릭에게 명을 내렸다. 솔롬의 전반 사정에 대해 최대한 파악하고, 특히 벨룩스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벨룩스가 나름대로 유능한 자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유능하다고 해서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유능한 자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그건 그렇고, 꽤 괜찮은 성이 아닙니까.”

“만족스러운가?”

“음. 저는 그렇습니다만, 장군께서는 아니십니까?”

“나도 그렇다.”

괜찮은 성이다. 요새에 가까운 성이라지만 규모가 규모인지라 성내에 들어와 사는 백성들의 수가 제법 된다. 차가운 쇠냄새만이 아니라 사람 냄새도 어느 정도 나는 곳이라는 뜻.

“크렘보르 가문이 뿌리를 내려도 괜찮을 것 같지 않습니까?”

군터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토어릭도 그렇고, 그 외 여러 수하들도 크렘보르 가문의 일을 자신의 일인 것처럼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충성심 때문일까? 충성심이 있으면 그런 게 가능한 것일까?

한때는 군터 역시 누군가에게 충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지금의 토어릭과 달랐다. 당시 섬겼던 주인의 일을 자신의 일이라 생각지도 않았으며, 필요 이상으로 적극적이게 움직인 적도 없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거의 자신보다 훨씬 더 충성스러운 수하들이다. 그런 이들을 수하에 여럿 두었으니, 군터는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살라스가 오면 본격적으로 군을 재편하겠다.”

“섬뜩할 자들이 여럿 있겠군요.”

살라스가 온다는 것은 파헨델의 병력이 당도한다는 것. 그건 지금 숨죽이고 있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거센 바람이 불어옴을 의미한다.

“그 전까지는 네가 수고를 좀 해줘야겠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이런 일도 적성에 맞는군요.”

군터는 옥석을 가리는 일을 토어릭에게 일임했다. 토어릭은 배짱도 두둑하지만 동시에 생각도 제법 깊고 신중한 성격이다. 때문에 그는 군터가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할 때 고민 없이 일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하들 중 하나였다.

믿을만해서 맡겼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토어릭은 이런 쪽의 일이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재미있습니다. 할 말들은 많아 보이는데 한 마디도 못하고 눈치만 슬금슬금 보더군요. 예상했던 것처럼 저쪽에 선을 댔거나, 아예 그 밑에 있는 것 같은 놈들도 여럿 보이고 말입니다.”

토어릭이 비릿하게 웃었다. 언제부턴가 이런 웃음이 어울리게 된 토어릭이다. 분명 젊었을 적에는 꽤나 순수한 웃음을 짓던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다른 움직임은?”

“감히 다른 생각을 하는 미친놈이 있겠습니까. 잠잠합니다. 말씀드렸듯, 벌벌 떨면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적다고 보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면 미리 칼을 갈아둔 병사들이 즉시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합니다만, 사실 한 두 명쯤은 용감하게 나서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본보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조금 놀랐다. 즐겁기도 했다. 토어릭의 말이 군터의 마음과 정확히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끼라도 던질 셈이냐?”

“설마…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지요. 제 목이라면 몰라도, 장군께서 위험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아부가 늘었구나.”

“뭐라도 늘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장난기가 섞인 말이기는 했지만 그 말 자체는 진심이었으리라. 토어릭은 만약 군터가 이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 슬쩍 미끼를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토어릭은 자기 목이 날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 위에 달린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포기하겠다던가?

* * *

“이대로 목이 달아날지 안 달아날지 눈 감고 가만히 앉아 기도나 하고 있으면 되는 거요?”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벨룩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좋게좋게 가려고 해도 이런 투정을 들으면 그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치미는 감정을 그는 꾹 억눌러 참았다.

“경거망동 하지 말고 기다리시오.”

그가 참은 것은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들의 심정을 정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새로 부임한 적포장군을 보았다.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자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그는 소문보다 더한 자였다. 그저 앞에 서서 그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을 정도였다. 그들은 새로운 상관 앞에서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거기에 그와 그들의, 그다지 부드러울 이유가 없는 관계까지 얽혀 있으니 더욱 그랬다.

“파헨델에서 성주의 심복들이 당도하면 우리의 자리는 없을 거요. 그래도 기다리란 말이오?”

“기다리지 않으면 어쩔 거요.”

“그야…….”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마시오. 뒷감당은 둘째 치고, 성공할 수는 있을 것 같소? 그대들이 저마다 얼마간의 병사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것은 알고 있으나, 성내에 있는 반수 이상의 병사들은 그대들을 따를 이유가 없소. 무슨 명분을 가져다 붙인들 상대는 갓 부임한 성주고, 적포장군이며, 전하의 심복이오.”

“으음.”

“기다리시오. 우리가 목매야 할 것은 터무니없는 헛짓거리가 아니오.”

“허면?”

“테리브란에서 사람이 왔소이다. 추측이 맞았소.”

“그, 그렇다면…….”

어둡던 얼굴들에 화색이 돌았다.

벨룩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브란에서 열린 대전회의에서 총독을 파견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하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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