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쿠엘단은 사라졌지만, 그가 열었던 ‘길’은 남아있었다. 군터는 그 ‘길’을 통해 야영지로 돌아갔다.
그가 ‘길’을 지나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 희미하게 유지되던 ‘길’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쿠엘단이 안배해놓은 힘이 다한 듯했다.
“…….”
그런 것이 있었냐는 듯, 가느다란 밤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을 보니 이 모든 것이 한밤중의 꿈 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는 스스로 육신을 버리고, 당사자의 표현을 빌자면 ‘승천’한 초월자의 마지막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자살이라고 생각했지만, 쿠엘단의 마지막 순간을 보면서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쿠엘단의 마지막 모습은 결코 모든 것을 내려놓은, 포기한 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포기는커녕, 겪어보지 못한 모든 것들에 들뜬 여행자처럼 잔뜩 들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이제부터 펼쳐질 모든 것들에 기뻐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정말로 그 죽음 뒤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은 듯했다. 그 믿음이 옳은 것이었을지, 틀린 것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줄카라.’
쿠엘단이 미쳤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조언은 유념할 만했다. 짤막하게 전해진 그의 기억 속에서, 줄카는 키리스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쿠엘단이 기억하고 있던 줄카의 모습. 그가 사납게 내지르던 고함은 키리스트를 향한 것이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이쪽에 손을 빌려줄 것 같지는 않지만.’
황자에게 알려야 할까.
당연히 알려 할 것 같지만, 군주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알게 되면 황자가 어찌 반응할지 의문이었다.
황자는 그에게 전방의 장군직을 내리고, 2만의 병사를 맡길 만큼 신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을 벗어나지는 않을지 경계하고 있다. 직접 면전에서 경고까지 하지 않았나. 드러내놓고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나마 나은 부분이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야스메티를 비롯한 군터의 측근들 역시 그에 대해 꾸준히 조언을 하기도 했었고.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앉아있다가 당할 수는 없다. 황자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최악의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군주라.’
이전에는 황자가 직접 쿠엘단을 만나보라고 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황자는 그의 부친인 황제를 비롯해서 군주들과 같은 초월자…그의 표현을 빌자면 ‘괴물’들에게 상당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를 거치지 않은 이런 만남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가 나를 경계하는 만큼, 나도 그를 경계해야 한다.’
야스메티가 한 조언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군터의 생각도 야스메티와 같았다.
어차피 쿠엘단이 무슨 대단한 조언을 해준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줄카를 끌어들이라는 것인데, 만약 그것이 줄카와 키리스트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 때문이라면 황자 역시 알고 있을 터. 줄카가 필요하다면 황자가 알아서 그를 끌어들일 방도를 모색할 것이다.
‘쿠엘단의 죽음 역시 어떻게든 알려질 테고.’
다른 누구도 아닌 군주의 죽음이다. 당장 그의 영지에서부터 소란이 일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쿠엘단의 실종이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굳이 나서서 알리지 않아도 절로 알게 될 테니 미리 말을 꺼낼 필요도 없다.
‘답.’
사실 군터는 쿠엘단과의 만남에 황자가 어찌 반응할지보다는 쿠엘단이 남긴 말들이 신경 쓰였다.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을 한 쿠엘단과,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서 그가 보였던 감정적인 모습들. 단순히 광인의 말로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어쩌면 쿠엘단은 정말 그가 말했던 대로 진정 자유로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가 쿠엘단의 주장을 들었더라면 미친 소리라고 치부했을지도 모르나,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 군터로서는 그렇게 단순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흐름.’
쿠엘단은 죽음 후에 육신은 땅으로, 영혼은 거대한 흐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흐름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군터는 한 번 죽음을 겪었을 때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쿠엘단의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쩌면, 쿠엘단이 정말 사후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본인의 입으로 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탐구했다고 하지 않았나. 세상 모든 인간의 관심사인 사후에 대해 그가 연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사후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거짓이다. 어쩌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선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무부(武夫)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예전의 일. 한 번 죽음을 겪고 난 후로는 죽음에 대해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초연해진 것과는 다르다. 죽음이라는 것이 별로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황자에게서 불노불사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물론 그 말에는 ‘완전히 괴물 되면’이라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완전한 괴물’인 쿠엘단은 불노불사의 존재다. 그런 자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원신의 사도니, 신의 현신이니 하며 칭송받던 황제는 그 위명에 걸맞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그들 모두 수백 년 삶의 끝이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쿠엘단은 나무가 클수록 바람도 더 많이 맞는다고 했다. 그 말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렇다면 그 말을 이쪽도 마냥 흘려들을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나와 그 자는 다르다.’
쿠엘단도 말했다. 네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고.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고.
어쩌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테니까.
“…….”
군터는 그의 막사 안에서 타오르는 자그마한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들어가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보고 있자니 빛무리로 변해가던 쿠엘단의 모습이 떠올라 겹쳐 보였다. 마지막 순간 그가 지었던 만족스러운 웃음까지도.
* * *
“크렘보르 장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쁠 텐데 굳이 발걸음을 했군.”
“장군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찾아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가는 사람을 굳이 찾아와 얼굴을 비추는 게 무관의 임무는 아닐 터. 군터는 딱딱하게 굳은 와중에도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인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잘 차려입은 갑옷은 얼마나 관리를 잘 했는지 광택까지 났다. 설령 실전에서 입은 적은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 오래 입었다면 저렇게까지 갑옷이 반질반질할 수는 없다. 갑옷 사이로 조금씩 삐져나온 살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자는 전형적인 탁상 앞에 앉아 명령만 하는 책상물림임에 분명하다. 군터는 이런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했다. 물론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그런 싫어하는 감정조차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군. 고생하게.”
지금은 좋고 싫고를 떠나 아예 관심이 없다. 이 사내는 조금 전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이야기했지만 군터는 벌써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첨꾼들이 많습니다.”
토어릭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만큼 장군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거겠지요. 보아하니 벌써 소문이 다 퍼진 모양입니다.”
“…….”
테리브란을 떠나 동부로 건너온 이후. 정확히 말하면 이런 달갑지 않은 마중이 시작된 이후로 토어릭은 줄곧 이렇게 심사가 꼬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 전쟁이 있었고, 다시 또 언제든 전선이 될 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복무하고 있는 자들이 이렇게 가벼워서야…….”
이것도 순화한 표현이다.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고관의 눈에 들어보자고 안달인 자들 아닌가. 도대체가 당장 전투에 나설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인 자들을 몇 명씩이나 연달아 보고 있으니 비위가 좋은 편인 토어릭조차도 단단히 화가 났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무슨 뜻이냐.”
“동부에 있는 자들이 저런 시원찮은 작자들뿐이라면 장군께서 자리를 잡는 것도 쉽지 않겠습니까.”
“얕잡아보지 마라.”
“물론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군요.”
그건 동감이다. 실망인지는 모르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도 섣불리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제껏 본 자들이 죄다 변변찮은 작자들이라고 해서 동부의 모든 군관들이 그들 같지는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자라면 소식을 들었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그들이 아직까지 잠잠한 것은 의외로군요. 솔롬까지 이제 닷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데도…….”
“글쎄.”
“급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걸까요.”
글쎄. 그런 것치고는 테리브란에서 이미 몰던 가문에서 접촉을 해왔다. 점잖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봐도 그쪽은 아마 상당히 급한 마음일 터. 그런데도 아직까지 조용하다는 것은 조금 생각해볼 만하다.
그들은 결국 군터가 솔롬에 도착할 때까지 접촉해오지 않았다. 군터는 멀찍이 보이는 솔롬의 성벽을 보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성벽 위에 흩날리는 깃발이 어쩐지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빠르군.”
“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토어릭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솔롬의 성벽 위에 흩날리는 세 종류의 깃발. 하나는 제국기요, 하나는 적기였으며, 마지막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는 표범 형상의 문장기였다. 그 문장은 크렘보르라는 성을 하사받으며 군터가 정한 크렘보르가의 가문기. 그런데 테리브란에 있는 그의 저택에나 이제 막 걸렸을 뿐인 가문기가 솔롬의 성벽 위에서 시원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