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화
테리브란을 나서고 엿새째 되던 날 밤. 군터는 홀로 야영지를 벗어났다.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이 따라붙으려 했지만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그들을 물렸다.
“…….”
말 위에서 고개를 드니 음울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 바람도, 무엇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 멈춰 있는 하늘.
말은 달리고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달리는 말 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점차 빨라진다. 말은 지쳐가고 있지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은 점점 더 심해진다.
[이게 무슨 조화지?]
땅이 쪼그라든 것처럼 느껴진다. 열 발자국이 한 발자국으로 줄어들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낯선 괴리감이 신경을 거스른다.
[법칙에 간섭하는 거다.]
[무리하는군.]
술법은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보다 큰 힘을 발휘하려면 보다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힘을 품은 도구를 이용해 그 대가를 치환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사치를 부릴 정도는 아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손님에게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보이는 풍경은 말을 달리기 시작할 때와 전혀 달랐다.
[나의 연회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연회?]
고원이었다. 탁 트인 전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고원. 쿠엘단은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전에 봤을 때는 조금도 엿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없이 맨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형. 왜소하지는 않지만 특별해 보이는 구석이 없어 이름값에 비하면 어쩐지 초라해 보이는 외형이었다.
[실망했나?]
[조금은.]
[이해하네. 이 껍데기는 쇠락하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된 지 오래니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는 표현이 귀에 익다.
[나무가 크면 바람도 크게 맞는 법.]
아득함. 수 없는 상처들과 고통. 평온한 운명은 바랄 수도 없었던 이의 역사가 머릿속을 파고든다.
[자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시련들이 닥쳐올 테고, 자네는 그것들에 답을 해야 할 테지.]
하늘에 드리운 어둠이 걷힌다. 조금씩. 하지만 점점 더 빨리.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더 궁금해지는군. 재미있어. 이 작은 세상의 모든 것에 초연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마지막까지 결국 미련이 남는군.]
자조. 그러나 그 웃음에 담긴 것은 투명한 즐거움이다.
[와줘서 고맙네. 그럼 시작하지.]
하늘이 개었다. 달과 별을 집어삼킨 듯 짙게 깔려 있던 먹구름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맑은 하늘. 밝은 달과 별의 빛이 땅을 비춘다.
“생명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고 있나?”
갈라지고 가라앉은 희미한 목소리. 임종 직전의 노인이 억지로 쥐어 짜내는 듯한.
왜 굳이 육성으로 말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군터는 상대에게 맞춰주었다.
“어미로부터 오겠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설마하니 내가 그런 답을 바라고 물었겠나.”
“그럼?”
“난 그것을 근원이라고 부르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으며,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지. 말하자면 순환.”
“땅을 말하나?”
“비슷하지만 달라. 살과 뼈가 썩어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지만, 그 안에 깃든 영혼은 땅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보다 더 거대한, 흐름의 일부가 되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생각해보라는 거지. 자네가 내 생각을 엿보게 되면 자네는 자네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테니.”
그럴까? 군터는 학구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호기심이 많지도 않다. 이런 뜬금없는 주제를 툭 던져준다고 해서 거기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관심이 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나 자네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갈수록, 점점 더 생각이 날 거야. 삶이 길어질수록 결국 남는 것은 시간뿐이니까.”
의성으로 직접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직접 감정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말이 악의가 있어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모든 생명이 마주하는 운명이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나는 욕심이 생겼다. 뻔한 것은 재미가 없어. 이왕에 삶을 얻었다면 보다 많은 것을 겪고, 알고 싶었다.”
쿠엘단이 고개를 젖혔다. 은은한 빛무리가 그를 감싸는 듯했다. 아니, 그의 몸에서 빛이 흘렀다.
“저 멀리, 무수한 세상이 있다. 우리가 모르는, 상상도 하지 못한 미지가 가득해. 그것을 안 이상, 이 작은 세상에서 태어나고 지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은가.”
가라앉은 목소리가 요동친다.
[이제 나는 이 허름한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모든 것이 두렵고 즐겁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지의 바다에 빠진 한 마리 미물이 되어.
두렵지만 동시에 가슴이 벅차다. 두려움마저도 종국에는 환희로 바뀐다.
“…….”
군터는 불안해하는 말을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쿠엘단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바람이 불어오지만 길게 내려온 그의 옷깃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그를 피해 가는 듯했다.
“길었다.”
점점 더 높이 떠오르는 그의 몸에서는 계속해서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그 즈음, 군터는 땅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알아볼 수 없는 그림과 문자가 가득했다. 쿠엘단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무리가 땅에 떨어지며 그 그림과 문자에 스며 들어갔다.
“멀리서 오 손님에게 내 선물 하나 주지.”
쿠엘단은 이제 그 스스로가 하나의 빛 덩어리가 되었다. 군터는 그 환한 빛 속에서 쿠엘단의 육신이 점점 희미하게 변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리비암에는 망령이 있네.”
“키리스트를 말하는 건가.”
“알고 있었군. 하긴, 자콥 녀석도 알고 있었겠지. 아무튼…그렇다면 말이 빠르지. 그래. 그 자는 이 나라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어.”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리려 하나.”
“정확하게는 황제가 남긴 유산을 무너뜨리려 하는 거지. 그 자는 황제를 증오하거든. 그는 황제가 이룩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해.”
“어째서지?”
“우리 모두는 황제에게 복종했지만, 그 복종이 꼭 자의로 인한 것은 아니었네. 이 정도로만 이야기해두지.”
“당신도 그랬었나?”
쿠엘단을 직접 본 것은 이제 두 번째다. 그에 대해 뭘 안다고 하기도 우스울 정도지만, 그의 존재감만을 놓고 보면 도저히 누군가에게 억지로 고개를 숙일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가 누군가의 밑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나는 조금 달랐지.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난 황제에게 그리 크게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아.”
크지는 않더라도 반감을 가지고는 있다는 말이다. 신의 현신이라고까지 불렸던 황제가 적어도 군주들에게는 그리 인망이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분노는 타당해.”
“그게 당신이 개입하지 않는 이유인가?”
“아니. 내가 개입하지 않는 것은 그저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다?”
“난 이 나라를 싫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거든. 키리스트에게 맞설 만큼의 애착은 없다, 라고 말해두지. 내게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도 했고.”
“이 자살 말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지만, 군터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결국 자살이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쿠엘단의 육신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분해되고 있다는 표현이 더 구체적이리라.
“자살? 그렇게 보이나?”
“아닌가?”
“자네가 내린 답에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자네가 보기에 그렇다면 그런 걸세.”
“그렇다면 당신이 내린 답은?”
“내게 있어 이것은 탈출이지. 구원이고. 이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야.”
“죽어서 말인가?”
“죽음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 쇠락한 육신은 사라지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영혼은 승천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건 나의 답이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군터는 그 말이 쿠엘단의 입버릇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네가 날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혹시 아나? 나중에, 언젠가는 자네도 나와 같은 답을 찾을지도 모르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단언하지 말게.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두컴컴한 길에서, 인간은 결국 빛을 찾게 되어 있으니.”
“단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맞아. 그래도 한 번 두고 보게.”
쿠엘단의 몸은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 어떻게 저렇게 되었음에도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인지 놀라웠다.
다리가 사라지고, 팔이 사라지고, 몸통마저도 거의 다 사라졌다. 그럼에도 쿠엘단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개운한 것 같은, 나른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와 그는 그리 다르지 않아. 내가 답을 찾았듯, 그 역시 나름의 답을 찾았을 뿐.”
“무슨 소리지?”
“글…….”
목소리가 끊겼다. 빛이 그의 머리까지 번졌다. 이제 쿠엘단은 정말 하나의 빛이 되었다. 더 이상 그를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이 나라를 구하고 싶다면 조력자가 필요할 걸세.
[누구를 말하는 거지?]
쿠엘단이 웃었다.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얼굴이 사라졌지만, 그는 분명 웃었다.
[알고 있지 않나.]
똘똘 뭉쳐 있던 빛이 일순간 솟아올랐다. 번개가 치는 듯했다. 차이라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는 점.
“…….”
빛이 사라졌다. 땅에 가득 새겨져 있던 그림과 문자들 역시 불로 지진 듯한 자국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군터는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보며 쿠엘단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알고 있지 않나.
그래. 알고 있다. 쿠엘단이 조력자를 이야기할 때, 그의 생각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쿠엘단의 기억 속에서, 난폭한 분위기를 풍기며 고함을 치고 있던 사내.
‘줄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