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군터는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직감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현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물속에 깊숙이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느낌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색다르지?]
고개를 들었다.
빛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달을 닮은 무언가가 은은한 빛을 뿜으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이 멀기라도 한 것처럼 똑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건 뭐지?]
[우리가 만나기 위한 장소지. 음, 장소라기보다는 공간이라는 말이 더 맞겠군.]
[쿠엘단.]
[기억하는군.]
어찌 잊을까. 그 강렬했던 만남을. 존재감을.
[술법인가?]
[그게 중요한가?]
[그럼 무엇이 중요하지?]
[우리가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특이한 대화였다. 소리는 일절 내지 않으며, 서로의 뜻을 주고받는다. 서로의 생각이, 감정이 고스란히 오간다. 어떤 면에서는 더없이 진솔한 대화였다.
군터는 쿠엘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벽을 세워놓고 한 번 걸러서 나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정말 아무런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를 전해왔다.
그는 들떠 있었다.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은 환희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면 저렇게까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감정이 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쿠엘단이 어떻게 이리도 뚜렷한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수백 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을, 황자의 표현을 빌자면 ‘괴물’로서 살아온 그가 말이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그건 틀린 말이네.]
[틀려?]
[사람이 기분 나쁜 일이 있다고 해서 개미에게 화를 내나? 화풀이 정도로 짓밟고 뭉갤 수는 있어도, 몸을 낮춰서 개미에게 욕지거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지.]
[의미가 없으니까.]
[바로 그거네. 의미가 없지. 감정을 잃는 것이 아니야. 감정을 드러낼 필요를 잃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갔다.
[머리로는 이해했더라도 당장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점점 받아들이게 될 거야. 양들을 가둔 우리에 늑대가 들어가 있으면 잘 어울리겠나?]
늑대는 양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살 수 없다. 결국 늑대는 울타리를 뛰어넘을 것이다. 함께 있던 양들을 잡아먹고 아니고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자연스럽게 여기라는 것이야. 저들과 자네의 차이를 받아들이게 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걸세.]
[그렇다 하더라도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하겠지.]
[현명하군. 자콥 그 아이가 말해준 모양이지.]
받아들이면 혼란은 사라지겠으나, 머지않아 또 다른 무언가가 잠식해올 것이다. 무료함이든, 허무함이든, 고독함이든, 또 다른 무언가든.
[그것은 결코 견딜 수 없네. 정확히는 잠깐 견딜 수는 있어도 끝까지 견딜 수는 없지.]
[당신은 어떻게 견뎠나?]
[난 견디지 않았어. 외면했지. 그리고 다른 무언가를 탐닉했다. 나 말고도 우리 모두가 그랬어. 무언가 한 가지에 지독하게 빠져들었지. 내 경우에는 탐구였지.]
‘탐구’라는 한 마디가 전해져오는 순간, 군터는 그의 흘러간 삶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이 평생을 매달리는 비원에서부터 너무나 사소해서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 생각되는 것까지. 세상의 온갖 미지들이 그의 욕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쿠엘단은 끊임없이 집착했다. 호기심과 지식욕만이 그를 지탱하는 전부였다. 그는 그러한 욕망의 화신이었다. 알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냈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때때로 그는 사소한 의문을 풀기 위해 수백, 수천을 희생시키고 죽였다.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라 불렀다. 어떤 이들은 그를 신이라 부르며 경배했다. 그런 모든 것들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것 이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견디지 않고 외면했다. 그 말이 딱 알맞다. 군터는 쿠엘단이 살아온 긴 삶이 광기의 흔적이라고 판단했다.
[광기라. 맞는 말이지. 그럴 수도 있어. 알지 못하는 자의 눈에는 그리 비칠 것이야.]
[다르다고 생각하는군.]
[다르지. 다르고말고. 하지만 무지한 자들은 그럴 수 있지. 술(術)을 모르는 자들은 사람의 손에서 불이 피어오르고, 땅이 꺼진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해. 인간이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거든.]
그러므로 모든 기준이 자신이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은 남들도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은 남들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러하지만, 간혹 그 틀을 깨는 자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그러지 못한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이룬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크게 보면 별로 다르지 않다. 작은 틀을 깼을 뿐, 그들 역시 더 큰 틀에 갇혀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지. 자네만 해도 그래. 내 눈에는 별 것 아니게 보이는 틀에 갇혀서 고민하고 있지. 허나 지나보면 결국 자네도 알게 될 것이야. 지금하고 있는 고민들이 별 것 아니었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틀에 갇혀 있나?]
[물론. 나 역시도 갇혀 있지.]
느껴지는 감정은…황홀. 경외. 기쁨. 그 감정의 깊이는 아득할 정도로 깊다.
[아무리 부수고 또 부숴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어. 그야말로 미지지. 자네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보는 것을 자네도 보게 된다면 자네 역시 나와 다르지 않게 될 것이네.]
은은하던 빛이 가셨다. 세상은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일찍이 쿠엘단을 만나러 갔던 그때. 그 탑에서 보았던 광경이 다시 펼쳐졌다.
밤하늘. 그보다도 더 높은 어딘가.
[내가 이 틀을 깨려고 노력한 세월이 꽤 길다네. 어쩌면 처음 탐구에 모든 것을 바쳤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세월이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지.]
군터는 그의 들끓는 감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광기에 휩싸인 쿠엘단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그렇지만 군터는 다만 지켜보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언젠가는 쿠엘단의 말처럼 그에게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기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말하더군. 삶은 죽음으로서 완성된다고.]
끝이 없는 시작만큼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은 없다. 누군가는 끝을 두려워하지만, 시작한 이상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 만물의 이치요 숙명이다.
[이것은 하나의 끝이요, 또 다른 시작이다. 나는 나를 가둔 감옥을 깰 것이나, 하찮은 미련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화산처럼 끓어오르던 광기가 차갑게 식었다. 순식간에 휙휙 변하는 감정이 비정상적으로 보였으나, 이 또한 ‘그’의 기준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폭우가 쏟아붓고 난 뒤에 해가 따갑게 내리쬐듯, 그 또한 그러했다.
[자네로 하여금 나를 증거하고자 한다.]
[어째서 나지?]
[흥미가 있거든. 궁금해. 자네가 우리들과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될지, 아니면 우리가 밟았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 걷게 될지.]
동류이기에 갖는 흥미다. 쿠엘단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궁금해지는 것을 환영한다. 호기심에서 기쁨을 느낀다. 따라서 군터는 그에게 있어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
[동쪽으로 오는 길에 잠시 시간을 내게. 해가 진 밤. 반나절 정도면 충분하겠지.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네.]
끝없는 탐구의 결말이요, 세상의 역사를 써온 이가 내리는 결론이다.
[기다리고 있겠네.]
세상을 뒤덮은 검은색이 흰색에 물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가 흐려지는 세상에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 * *
군터는 테리브란의 동문을 나섰다. 그를 수행하는 인원은 파헨델에서 데려온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에 안내역으로 붙은 관리 셋이 전부였다.
떠나는 날, 군터는 자신을 마중나온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면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췄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서로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는지, 실비아는 또래의 어지간한 사내아이들 못지않게 컸다.
“혼사는 보러 오시는 거죠?”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시간에 맞춰 이곳에 돌아올 수 있느냐 없느냐는 황자와, 그때의 상황에 달렸다.
실비아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아비의 화법에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 가족이 다 모일 수 있기를 바래요.”
“네 오라비가 곧 올 거다.”
“걱정하지 마세요. 혼자 있을 때도 잘 지냈으니까.”
불퉁한 말이지만 말투는 평온하다. 군터는 딱히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장군. 곧 소인도 따라가겠습니다.”
야스메티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며칠 전 테리브란에서 마무리 지을 몇 가지 일만 끝내면 솔롬으로 가겠노라고 군터에게 말했었고, 군터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솔롬을 중심으로 세를 일구기로 한 이상, 테리브란에서의 일에 계속 야스메티가 붙어있는 것도 낭비였다.
“장군. 그럼.”
동쪽 성문은 활짝 열렸다. 그런데 그렇게 활짝 열린 성문으로 출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은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이 모든 것이 장군의 위엄입니다.”
야스메티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활짝 열린 성문은 수문병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위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 테리브란의 동문이 오직 군터 크렘보르 한 사람을 위해 열려 있는 것이다.
“…….”
말에 오르기 전. 군터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떠나는 무리는 얼마 되지 않는데 마중을 나온 인원은 못해도 오백이 넘어 보였다. 그 중에는 크렘보르 가문의 인원도 있었고, 우슈무르 가문의 사람들도 있었으며, 아조프나 다른 귀족 가문의 인사들도 여럿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까? 야스메티처럼 옅게라도 웃으면서 자신의 위세와 권력에 가볍게 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터는 담담했다. 말 위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온갖 얼굴들이 그의 눈에는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출발하지.”
기수가 적기를 들어 올렸다. 조금은 느슨해져 있던 수문병들이 다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활짝 열린 성문을, 군터는 천천히 나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