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화
군터는 판니른으로 떠나기 전에 그의 수하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사흘 뒤에 출발하겠다.”
“그리 서두르실 이유가 있습니까?”
모페이브가 물었다.
안색이 초췌하고 눈밑이 거뭇했다. 근래에 연구로 바쁘다더니 피로가 상당히 쌓인 모습이었다.
“여유를 부릴만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야스메티가 그의 물음에 대신 답했다.
“여유부릴 상황이 아니다 하심은? 동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반란군이 들끓고 있다거나, 경계해야 할 적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거나 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이미 주인이 있는 곳에 새로 들어가는 형국이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서둘러서 달려가야 조금이라도 더 일찍 자리를 잡을 수 있겠지요.”
“흐음. 과연…….”
솔롬의 성주가 되었으나, 그것이 솔롬에만 박혀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2만의 군세를 거느린다는 것은 판니른의 군권 상당수를 손에 쥠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레저레 얽힐 일이 많아진다. 사실 지금도 이미 꽤나 얽혔다. 바로 어제 몰던 가문에서 한 번 보자고 연락이 왔으니까.
“장군께서는 솔롬에서, 판니른에서 기반을 잡으셔야 합니다.”
“기반이라 하시면?”
“언제까지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여기저기 옮겨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뿌리를 깊게 박지 못한 나무는 강풍이 불면 흉하게 넘어가는 법입니다.”
야스메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군터에게 파헨델에서와는 달리, 솔롬에서는 확고하게 기반을 다지고 자리를 잡을권을 권했다. 그런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시기가 좋고, 명분도 좋습니다. 동부의 터주대감들도 어느 정도는 장군께 협력하려 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빠르게 솔롬을 장악하셔야 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극동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으실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저쪽에서 달갑지 않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저쪽’이란 당연히 동부의 귀족들을 의미한다. 솔롬으로 가서 뭘 하려고 한들, 원래 그곳에서 자리잡고 있던 자들이 순순히 그러십시오 하고 비켜주겠는가. 솔롬의 성주 자리야 황자가 직접 임명한 것이고, 군터의 존재 자체가 동부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니 어느 정도 선까지는 고분고분 하겠지만…일정 선을 넘어가려 하면 그들도 얌전히 있지만은 않을 터.
“그런 면에서 몰던과의 만남을 거절하신 것은 탁월한 결정이셨습니다. 그들과는 앞으로 주고받아야 할 것들이 많으니, 일찍부터 가볍게 응해주어서는 안 되지요.”
야스메티는 좋은 결정이었다면서 그를 추켜세웠지만, 사실 군터는 그런 복잡한 계산을 해서 몰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불쾌해 있던 차에 은근슬쩍 다가와 한 번 보자고 말을 전하는, 이름도 까먹은 귀족 놈에게 살짝 분풀이를 한 것이 다였다.
‘이상했지.’
그때도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아도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감정이 거세 되었다고까지 생각했었는데, 뜬금없이 뚜렷한 감정이 훅 치고 올라왔다. 분노였을까? 아니. 조금 다르다. 가장 비슷하기는 했지만…그래서 그때는 분노라고 확신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분노와는 조금 달랐다.
‘나답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고서도 우스웠다. 대체 ‘나다운 것’이 뭔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한때는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에 대해 포기한 이후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알 리가 있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아는 척하며 자책하는가?
“…….”
“장군?”
“무슨 뜻인지 알겠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러는 중에도 귀는 열어두었다. 야스메티의 야심찬 계획에 대해서는 빠짐 없이 들었다. 최대한 포섭하는 쪽으로 대해야 할 몇몇 인물들과, 이쪽에 적대적으로 나올 확률이 높은 몇몇 인물들. 솔롬을 장악한 후에 신경써야 할 방향 등등.
“하옵고, 물자를 납품하게 될 군상들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정해진 겁니까?”
“3할이다.”
2만의 3할이면 6천이다. 결코 적지 않은 수. 6천의 병사들이 소모하는 병장기며 식량은 어마어마하니, 그 공급을 독점하여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분명 상당한 수준.
“반 정도로 줄어들었군요.”
그러나 파헨델의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요새로 공급되는 물자 전량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군터다. 그에 비하면 6천은 조금 아쉬운 규모.
“그러나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파헨델은 테리브란에서 가까웠기에 자연히 중앙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솔롬은 다르다. 극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동쪽 끝에 위치해 있고, 테리브란과의 거리도 멀다. 게다가 국경이 아닌가. 혹시 모를 일이 벌어졌을 때는 2만이나 되는 군대를 뜻대로 움직여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이 말인즉.
“병사들의 훈련에 신경을 써주십시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제넘은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무례했습니다. 용서를.”
용서를 구하는 자의 태도가 이리 장난스러울 수 있는 걸까. 자칫하면 상관의 진노를 살 수도 있을 모습이었지만 군터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야스메티라는 사내에게 익숙했기에 그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다.
“하오나 장군. 농이 아니라 정말로 신경쓰셔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인물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테고…기반을 닦기 위해서도 상당한 재물이 필요할 겁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이참에 장사치들을 좀 더 끌어안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이 있어야 끌어안든 말든 하지 않겠나.”
야스메티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더니 군터의 무뚝뚝한 표정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 장군께서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사치라는 족속들은 말입니다. 돈 냄새는 귀신 같이 맡는 자들입니다. 또한 이득이 될 것 같으면 불길속으로라도 뛰어드는 자들이지요. 그런 자들이 장군께 선을 대려고 할 때는, 어떻게든 돈 냄새를 맡았다는 뜻입니다. 장군께서 그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신다면, 그들은 장군께서 신경쓰지 않으셔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이득을 챙길 것입니다.”
한 마디로 괜한 걱정 하지 말라는 소리다.
“장군. 허면…….”
“내치지는 않겠다.”
“현명하십니다.”
야스메티가 환히 웃었다.
* * *
“장군께서는 변하셨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야스메티는 같이 걸어나오던 모페이브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음. 보다 정력적으로 변하셨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결정을 내리셔도 이렇게 빨리 내리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신 스스로가 마음이 생기셨기에 이리 빠르게 답을 내려주시는 게지요.”
야스메티는 말했고, 모페이브는 들었다. 평소에도 둘이 만나면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했다. 야스메티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보다 한층 더 올라간 목소리가 그걸 증명했다.
“음. 이곳에서의 일이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면 이 사람도 솔롬에 가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테리브란의 밤이 그리우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하하하하. 어디 술과 계집이 이곳에만 있겠습니까. 어차피 이곳의 어지간한 계집들은 다 보았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때가 되었지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일지도 모른다. 야스메티가 하루가 멀다하고 테리브란의 온갖 유곽들을 드나들었다는 것은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니까. 야스메티가 적잖은 봉급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수중에 돈이 없다며 툴툴거리는 것만 보아도 그의 씀씀이가 어떤지는 능히 알 수 있었다.
“공은 어떻습니까? 근자에 하시는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썩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만…어느 정도 성과는 거두었습니다.”
“오오. 그래요?”
야스메티의 요란스러운 반응에 모페이브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닙니다. 가능성을 본 정도에 불과하니, 앞으로도 갈 길이 멉니다.”
“아니지요. 그 정도만 해도 어디입니까. 평생의 숙원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까지 공이 살 날이 많이 남았으니, 꿈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좋은 날이로군. 어떻습니까? 오랜만에 늘 마시던 따뜻한 것 대신에 시원한 차나 한 잔 하러 가심이?”
“하하하.”
모페이브는 야스메티의 넉살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원한 차라. 그러고보니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야스메티가 그를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한 잔 하자고 졸라댔으나 번번이 퇴짜를 놓았었다.
“좋은 날이라…….”
“그래요. 좋은 날입니다. 이런 날에도 마시지 않으면 대체 언제 한 잔 하겠습니까.”
“좋습니다. 가시지요.”
“그럴 줄 알았지. 내 좋은 곳으로 모시리다.”
“아니. 따로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공의 댁에서 조용히 한 잔 하시지요.”
“으음? 그래서야 무슨 재미가…….”
“이 사람이 한 번 들어드렸으니, 공께서도 이 사람의 말을 한 번 들어주시지요.”
“뭐…그러지요. 아쉽긴 하지만, 가끔은 조용한 것도 괜찮지.”
그리하여 그들은 야스메티의 집으로 향했다.
야스메티의 집은 평범했다. 그 정도 되는 이라면 조금 더 사치를 부려도 괜찮을 테지만, 야스메티는 집이라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밤에 잠깐 잠만 자는 곳인데 거창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초라한 수준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평범했고,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장군의 기반은 솔롬을 중심으로 한 동부가 될 겁니다. 앞으로의 전쟁이 변수기는 하지만…이 사람은 그것을 변수라기 보다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전쟁에서 활약하신다면…….”
“행복한 상상이지만, 이제껏 장군께서는 피를 밟으며 올라오셨으니…기대가 될 수밖에 없지요.”
조용한 자리였다. 술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천천히 잔을 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리스 공자님의 혼사 말입니다만…….”
“예.”
“장군께서 자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야스메티가 그리 멋스럽지 않은 수염을 쓸었다.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아쉽군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뭐, 전하께서 배려를 해주신다면야 어찌어찌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날은 정해졌습니까?”
“조율중입니다. 그러나 되도록 서두를 생각입니다.”
모페이브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