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화
“전하. 어째서 그 무엄한 놈들을 벌하지 않으십니까?”
검은 피부에 불그스름함이 감돈다. 목소리에도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여간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는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
명만 내리면 당장 뛰쳐나갈 것 같은 카자쿠. 그를 보며 황자는 피식 웃었다.
“왜 그리 화가 났느냐?”
“어찌 물으십니까? 전하께서 직접 보셨지 않습니까. 그 불경한 놈들의 행태를.”
“모든 이들이 너와 같은 것은 아니다.”
“예?”
“저들 중 충심 하나로 나를 섬기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느냐.”
카자쿠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황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전 대전에 있던 이들은 거의 다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서 온 이들이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에 충성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건 없는 충성을 바치는 카자쿠 자신과는 다른 것이다.
“전하. 어째서 저들이 설치게 두십니까? 전하께서는 충분히 저들을 휘어잡을 수 있으시잖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그야…….”
“지금처럼 굴러가는 것이 효율적이다. 속으로는 삐걱대고 있을지언정, 마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으니 그거면 된 것이 아니더냐.”
“전하께서 저들을 제압하시고 철권(鐵權)을 휘두르시면 그 마차는 지금보다도 더 효율적으로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카자쿠는 그럴 것이라 확신했다.
세상 사람들은 자콥 엘 트라소프에 대해 잘 모른다. 알더라도 그들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름 대신 그저 제국의 일곱 번째 황자라고만 불리는 이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 못한다.
“헌데, 한 번 그렇게 하면 되돌릴 수가 없다.”
“예?”
“어느 건물이 기둥이 하나더냐. 아무리 기둥이 튼튼해도, 하나일 뿐이라면 그 건물이 얼마나 갈 수 있겠느냐.”
“…….”
“하물며 인간은 기둥처럼 오래 가지도 못하지.”
튼튼하게 지은 기둥은 수백 년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작금의 카라누르를 보아라. 신이 굽어살피는 나라라고 하여 언제까지고 영원할 줄 알았던 나라가 지금 어떤 꼴이 되었는지.”
신은 없었다. 자신을 신이라고 착각한 괴물만이 있었을 뿐. 그 괴물은 홀로 인류 최대의 제국을 쌓아 올리고 유지했으나, 결국 그가 사라지자 그의 제국은 순식간에 쪼개지고 무너졌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방식이 있다.’
혹자는 그것을 불안함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갈등이라고 할지도 모르며, 그 모든 것이 어떻게든 봉합되어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콥 엘 트라소프는 그런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완전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찌 진정한 의미의 초인이 존재할 수 있으며, 어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겠는가. 한때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적도 있지만…이제는 안다. 단언컨대, 하나의 바퀴로 달릴 수 있는 마차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굳이 하나뿐인 기둥이, 바퀴가 되려 하지 않는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의미 없는 것에 괜한 피바람을 몰고 오고 싶지 않으니까.
“넌 어리석지 않으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리라 본다.”
“전하. 허나 저들의 행태가 날이 갈수록…….”
“저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번에도 보지 않았느냐.”
동부의 새로운 얼굴들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어떻게든 자구책을 고안해냈다. 덕분에 황자는 그들에게 조금 힘을 보태주는 것만으로 북부 권신들의 야욕을 깔끔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저들은 욕심이 많지. 그렇기에 다스릴 수 있다.”
욕망을 가진 자들은 욕망으로 통제할 수 있다. 저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때로는 탐스러운 미끼로 저들의 등을 떠민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하.”
대전 문밖에서 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펄즈 크레이그 공이 알현을 청합니다.”
대전회의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알현 요청? 이건 애초에 회의가 끝난 후에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를 부르셨습니까?”
카자쿠가 물었다.
“불렀지.”
황자가 펄즈 크레이그를 들여보내라 목소리를 높인 후 작게 중얼거렸다.
“할 말이 있을 테니까.”
대놓고 밀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려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갈 마음이 있는 이에게 은근하게 등을 밀어준다면 의심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게 되어 있다.
“전하.”
각진 턱에 대가 세 보이는 중년인이 걸어들어왔다. 그는 깍듯이 예를 취한 후, 황자의 옆에 서 있는 카자쿠를 흘깃 보았다.
“괜찮소. 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녀석이니. 그보다…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예.”
강직해 보이는 인상만큼이나 화법도 직설적이다. 하긴, 여기까지 와서 굳이 돌려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해보오.”
또 한 마리. 마차를 끌 수 있는 말이 늘어날 것이다.
* * *
대전회의가 끝나고 궁을 나오는 길.
“장군.”
군터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크렘보르 장군이라고 불러드려야겠군. 축하드리오.”
“고맙습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 예전에는 안면이 있었으나 한동안은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뜬금없이 그가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하려는 순수한 의도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그 정도 되는 이들에게 순수한 동기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군터가 속으로 그의 의도가 무엇일지 고민하는데,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단하시오. 장군이 우리 가문에 객장으로 있었을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늘. 이렇게나 빨리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수만 병력을 지휘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말이오.”
“…….”
군터는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음을 알아차렸다. 눈앞의 자그마한 사내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알아서들 자리를 피한 것일까.
“장군. 장군도 알겠지만…이제 장군은 홀로 조용히 없을 수 없는 몸이 되셨소.”
결국은 이것인가.
군터는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분명한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귀찮아졌다. 감히 제레이스 가문의 가주를 이런 식으로 여기는 자가 또 있을까 싶지만, 군터는 정말로 그가 귀찮았다.
‘시답잖은 놈이.’
마음이 조금은 드러났을까.
여유롭게 말을 이어가려던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순간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군터의 서늘한 눈빛을 느낀 것이다.
‘이놈……?’
처음에 그는 차갑고, 가시가 돋은 눈빛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그런 눈빛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장군.”
그러나 바보가 아닌 이상 분위기는 읽을 수 있다. 어째서 상대가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게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군터 크렘보르라는 인간이 오만해졌다고 판단했다. 귀족이 되고, 판니른의 병권을 손에 넣다시피 해서 콧대가 지나치게 올라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럴 만도 하다.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가면 세상 모든 것이 눈 아래로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조금 전의 대전 회의에서 이런저런 말들로 견제까지 당했으니 심사가 불편하기도 하겠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니 그 ‘말들’을 나오게끔 유도한 배후가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맹수는 가만히 있어도 경계심을 사기 마련이지. 그러니 설령 누군가가 장군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꼭 적의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오. 장군이 그들을 어찌 대하느냐에 따라 그들은 장군의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지.”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장군. 우리가 연이 있다고 생각하여 주는 조언이외다. 처신을 신중히 하시오. 이제는 그리해야 할 위치가 되셨소.”
말은 조언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경고로 들리는 것일까.
군터는 속에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삼키려면 삼킬 수도 있었으나, 그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말씀 고맙습니다만, 그 말씀은 공께도 적용되는 것인 것 같습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군.”
“제가 알아서 하지요. 그럼.”
건조하게 대꾸하고서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쯤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들 어찌할 것인가. 칼을 들고 덤벼들기라도 할까?
‘저질러버렸군.’
야스메티는 설령 북부의 권세가들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더라도, 그 시간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했다. 아군이 많은 것보다 적이 적은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러나 군터는 그의 조언을 따르지 못했다. 경고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존중해주면서 다가온 다이시리 제레이스에게 과할 정도로 날을 세워버렸다. 왜 그랬을까?
‘감정적이었다.’
분노. 그것은 분노였다.
굳고, 식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가슴이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별 것 아닌 몇 마디 말에 용암처럼 들끓었다. 별것도 아닌 놈이 앞에서 주절대는 꼴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저질러버렸다. 분명 평소의 그였다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고, 대처였다.
“으음.”
자택으로 돌아가 야스메티에게 다이시리 제레이스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야스메티는 인상을 찡그리며 침음을 흘렸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장군답지 않으셨습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내 눈앞에서 그가 으스대는 꼴을 참기가 힘들더군.”
“허어. 장군께 그런 뜨거운 면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야스메티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몇 마디 말이 불쾌했다면 야스메티의 이런 반응도 불쾌해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실수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비꼬는 건 그쯤 하지.”
“비꼬다니요. 제가 감히 어찌. 음…그건 그렇고, 괜찮습니다. 조금 뜻밖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레이스 가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 좋으니까요.”
다행히, 그가 저지른 실수가 그리 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장군께서는 좋든 싫든 동부 세력과 연수를 하셔야 합니다. 명백히 제레이스를 비롯한 북부 권세가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지요. 그들과는 적이 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적이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분간은 말입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