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옥좌를 중심으로 좌우에 늘어선 신료들.
군터는 그 사이에 홀로 한쪽 무릎 꿇고 앉았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다만 생각보다 조금 빨랐군. 그만큼 그대의 활약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황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넓은 대전을 꽉 채웠다. 여전히 나이에 맞지 않는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그가 많은 신료들을 내려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껏 해와 준 일들에 대한 치하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해 주어야 할 일들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작금은 난세. 한 치 앞을 헤아리기 어려운 시기다. 아국에 드리운 이 암운을 걷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거창하게 늘어놓는 것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군터에게 가해질 이런저런 압박들을 조금이나마 흐리기 위해서였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배려라면 배려인 셈이다.
“군터 크렘보르. 카라누르의 귀족으로서 충성과 명예를 알고, 그에 따라 살아갈 것을 맹세하나?”
“예.”
황자의 성향 덕분에 서임에 허식은 없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간결한 몇 마디 물음과 ‘예’라는 기계적인 대답이 끝나자 황자는 옥좌에서 내려와 화려한 보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군터의 양 어깨에 한 번씩 가져다 댔다.
“변함없는 충성을 기대하지. 군터 크렘보르. 그대가 써내려갈 크렘보르 가문의 역사 또한 지켜보겠네.”
귀족 서임까지는 무난했다. 이제 그 다음이 문제였다.
“서쪽의 바라눔, 남쪽의 아말로페, 그리고 대협곡에 진을 친 아바시스 놈들까지. 신경 써야 할 적들이 많다. 남쪽은 황도이니 당장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해도, 동쪽과 서쪽은 내일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지.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황자가 운을 띄웠다. 이어질 본론을 주장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랄까. 단 한 번도 공론화 된 적은 없는 사안이었으나 이미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벌써부터 이런저런 반응이 있었는데, 특히 자하브, 캄브라이, 카리아, 컬몬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굳어 있거나, 심지어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하여, 솔롬의 성주 지위와 판니른 주둔군 2만을 여기 있는 크렘보르 장군에게 맡기고자 하는데…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황자의 말이 끝났으나 답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감히 황자의 물음에 입을 닫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저 물음에 답을 할 사람은 정해져 있었기에 다른 이들은 말을 아꼈다.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침묵을 깼다.
몰머스 카리아. 카리아 가문의 가주이며 아록의 최고 정무관 직을 역임하고 있는, 아록 전체를 쥐락펴락한다고 할 수 있는 귀족.
그는 이번에 다른 네 개 가문들과 함께 동부에 영향력을 뻗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자의 간섭으로 그 계획이 틀어져서인지, 내놓은 답이 꽤나 묘했다.
뜻대로 하라.
따르겠다거나, 전하의 말씀이 옳다는 게 아니다. 반기는 들지 않겠다는 정도다. 어쩔 수 없이 용인은 하겠으나, 불만이 없지는 않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의견은?”
그 불퉁한 어조를 모를 리 없을 터인데도 황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 또한 이 자존심 하나는 산처럼 높은 이들이 고분고분 따라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황자는 이것도 그의 숙부가 열심히 일을 해준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렘보르 장군.”
“예.”
“말했듯, 아바시스나 아말로페 녀석이 치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판니른 전역이 전쟁터가 될 것이고, 그대가 이끄는 군대가 가장 먼저 적과 맞닥뜨리게 될 터.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
지금 말한 둘 뿐이랴. 동부 3주의 병합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혼란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도적들이 설치고, 잡초 같은 저항 세력들이 아직도 산발적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아직 제대로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는 폴츠와 렌에는 그저 귀찮을 뿐인 잡초와는 다른, 굵직한 적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실상 군터가 그의 새로운 임지로 향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판니른의 상황을 안정시키면서 아직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그 2개 주를 상대하는 일이 될 확률이 크다.
“파헨델에서 병력을 차출해도 좋다.”
미리 알고 있던 이야기가 나왔다. 파헨델의 병력을 차출해도 좋다는 허락. 상한은 오천. 결코 적지 않은 수. 또한 수에 상관 없이 병사들을 임의로 차출해도 된다는 허락이 의미하는 바가 있기에, 이것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이들은 이 말이 나오기 무섭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하. 장수가 임의로 병력을 차출하게 하심은…….”
“너무 과한 것이 아닐는지.”
더 말이 나오려 할 때 황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누군가 처음 물꼬를 튼 후,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내거나 그러려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경들의 우려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소.”
장수가 병력을 오랫동안 지휘할 경우, 대부분 그 병력에 대한 통제력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말이 좋아 통제력이지, 실은 그 병력을 쉽게 부릴 수 있게 된다는 거다. 마치 수족처럼, 사병처럼 말이다.
군대는 강력한 힘이다. 나라를 정복할 수도,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힘. 그런 힘을 신하 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고래로부터 필요 이상의 강력한 힘을 쥔 장수가 마음을 달리먹고 난을 일으킨 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말했듯, 언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 내일 판니른에, 아록이나 리바스트라에 적이 쳐들어올 수도 있다. 평범하게 깃발을 올리고 올 수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해올 수도 있지. 그럴 경우, 적의 움직임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선 지휘관이 재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으음…허나.”
“반대를 위한 반대는 듣지 않겠네.”
굴하지 않고 계속 ‘다시 한 번 생각해보소서’를 말하려던 이들이 멈칫했다.
황자는 단호했다. 대놓고 ‘듣지 않겠다’고 하지 않나. 자신의 뜻에 반기를 든 이들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면서.
논리의 그럴듯함을 떠나, 여기서 더 주장하는 것은 황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지금 입을 열고 있는 이들에게 그럴 배짱이 있는가?
없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 홀로 황자에게 그래도 이건 옳지 않다고 외칠 수 있는 대가 센 이들은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성토했던 것도 그들의 뒤를 봐주는 윗사람들의 뜻을 대변한 것뿐이었으니, 그들 자신에게 황자에 맞설 정도의 담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황자가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고 굳게 말을 하니 그들로서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밀어붙여야 하는가? 황자의 노여움을 살 각오를 하고? 하라면 못할 것도 없지만, 어디까지나 ‘윗사람들’이 그래도 뒤를 봐준다는 보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찌 합니까?’
그들은 윗사람들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작은 고개짓으로라도 답을 주길 바라면서.
그들의 시선을 받은 윗사람들은 침묵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감으면서.
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시원한 수긍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황자는 다시 군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권한 만큼 책임이 막중하다. 늘 전장에 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익숙한 일입니다.”
“시간은 얼마가 필요한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어째서?”
“전장에 가야한다면, 당연히 정예를 데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터는 돌리는 것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일을 지체해야 한다고 말을 하려면 그 이유라도 분명해야 한다. 물론 말재간이 뛰어난 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 다른 재주를 부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닌 군터로서는 황자의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파헨델의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은 급하지 않다. 출발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두 달이면 충분한가?”
“예.”
살라스가 바랐던 기한보다 더 넉넉하다.
“그대에게도 열흘의 시간을 주지. 그동안 필요한 일들을 하게. 이번에 가면 당분간은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테니.”
넓은 대전에 그들 둘만이 있는 듯했다. 차갑게 느껴지는 공기 속에, 군터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달갑지 않은 시선들을 느꼈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던 시선들에, 이제는 제법 따갑게 느껴지는 감정들이 깃들어 있었다.
* * *
“어떤 것 같으냐?”
“괜찮은 언니에요. 까탈스럽지도 않고, 기품이 있어요.”
실비아는 제법 그럴듯한 말들을 쓰며 우슈무르 가문의 여식을 추켜세웠다. 자그마한 흠결 하나라도 찾아내겠다는 듯 전투적이었던 처음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변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우슈무르의 여식이 괜찮다는 걸까, 아니면 순진한 실비아가 사탕발림에 넘어간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실비아가 반대한다고 해서 틀어질 일도 아니었으니까. 뭐, 그래도 좋은 반응은 긍정적이다. 한 식구가 되어 매일 보게 될 사람과 날이 서서 좋을 일은 없으니.
“이번에 가시면 언제 오실 수 있나요?”
“글쎄. 잘 모르겠구나.”
“…….”
군터는 풀이 죽은 것 같은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딸은 아비가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에 헤어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네 오라비가 이곳에 오게 될 거다.”
“혼인 때문에요?”
“그 후에도 이곳에 머물 거다. 적어도 몇 년 간은.”
“정말요? 임지를……”
“그래.”
보리스에게도 언질을 주었었고, 황자에게도 확답을 들은 사안이다. 보리스는 그의 혼사가 끝난 후 테리브란의 수도 경비단에 배속될 것이다.
괜찮은 자리다. 큰 공을 세울 수는 없어도, 안정적으로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는.
모두가 바라는 자리다. 안정적이라는 장점을 제하더라도 데이븐랏지의 수도에서 복무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부기지수다. 특히 수도 경비대의 장교 자리는 외지에서 복무하는 동급 장교에 비해 한 단계 높게 쳐줄 정도.
그런 좋은 자리건만, 보리스는 처음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썩 내키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가슴은 출세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 안정적이긴 해도 대공을 세울 기회는 없는 수도 경비대의 직함이 마음에 안 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혼인을 하자마자 바로 외지로 떠도는 것과, 홀로 남은 동생을 계속 방치해두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몇 년 동안의 심심한 삶을 받아들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