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허면…열네 개 마을에 대한 수조권(收租權)과, 3군단에 물자를 공급할 군상의 선별권 일부를 그에게 맡기시겠다는 말씀이시온지.”
“정확히 들었네.”
“으음.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수조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일부라고는 해도 군상의 선별을 한 사람의 재량에 맡긴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과하다? 어찌 그렇소?”
황자가 물었으나,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때때로 물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지금의 경우도 마찬가지. 황자가 정말 몰라서 물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전하.”
“과한 것은 숙부와 여러 권신들의 욕심이지. 아니 그렇소?”
“…….”
면전에서 이렇게 대놓고 지적을 당하니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그조차 순간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노련하게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소신의 행사가 전하의 어심을 어지럽혔다면…….”
“아니. 탓하려는 것이 아니오. 내가 언제 숙부나 저들을 탓한 적이 있었소?”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더욱 욕심을 부렸다. 제지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이 제레이스에게서 왔는데, 내가 제레이스를 섭하게 대할 까닭이 있겠소? 지금껏 그래왔듯이,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하리다. 숙부는 현명하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아시리라 믿소.”
“…예. 전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언제까지고 용인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리 되니 입맛이 썼다.
‘꼴이 우습게 되었구만.’
동부의 꼬리 만 개들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보다, 함께 한 4개 가문에게 어찌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군침이 턱 끝까지 흐르고 있는 이들에게 포기하자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것이 조카님께서 숙부를 불러 미리 언질을 준 이유일 테니.
‘그나저나, 이리 되면 군터 그 자가 중립 군부파의 거두가 되는 셈인가.’
열네 개 마을에 대한 수조권이나, 군상의 선별 같은 것은 사실 대수롭지 않다. 그것들은 확실히 작지 않은 이권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제레이스 가문 같은 권세가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문제는 그가 가지게 될 이권이 아니라, 그가 거느릴 군대다. 파헨델의 일부 병력을 대동하고서 판니른으로 이동하는 것에 더해, 기존 판니른의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에다 비상 시 한정이라고는 해도 징집 권한까지 갖게 된다. 이쯤 되면 반쯤은 판니른의 총독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군사적인 권한만을 가진 반쪽짜리 총독 말이다.
실로 막대한 권한이다. 군터라는 자의 뭘 믿고서 이런 어마어마한 권한을 주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아무리 세운 공이 적지 않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그는 출신부터가 변변찮은데다 소속을 여러 번 바꾼 전력이 있다. 딴지를 걸려고 하면 걸만한 구석이 꽤나 있는 자인 것이다.
이래저래 여러 말들이 나올 것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뒤로는 온갖 이야기들이 오갈 터. 그간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적었던 군터도 이제는 이빨을 가진 이들에게 물어 뜯기게 되리라.
‘욕심이 있는 자 같지는 않았는데.’
공을 내세우고 이득을 취하려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는 잠잠했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군터라는 사내를 순수한 군인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화는 없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으려 해도, 바람이 불어오면 가지를 흔들 수밖에 없는 게지.’
제레이스 가문과 군터는 나쁜 관계가 아니다. 한때는 군터가 제레이스의 객장이었던 때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 뭔가를 할 생각은 없다. 물론 승냥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나설 생각도 없지만.
‘골치 아프겠군.’
그에게 있어 당면한 문제는 군터가 아니라 설득해야 할 4개 가문이다. 항상 어려운 조카님은 이번에도 어려운 과제를 아무렇지 않게 툭하고 던져주었다.
‘하는 수밖에 없지.’
제레이스 가문이 황자의 총애를 받는 것은 단지 외가라서가 아니다. 말로는 피의 반이 제레이스로부터 왔느니 어쩌니 하지만, 그 속내를 어찌 모를까.
황자에게 있어 제레이스는 외가가 아니라 정치적 동반자다. 황자는 제레이스에게 여러 가지를 안겨주고, 제레이스는 그 대가로 또 유무형의 여러 가지를 바친다. 공개적으로 조정의 여론을 주도거나, 때로는 지저분한 술수를 펼치며 황자의 뜻을 관철시킨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황자의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었기에 제레이스는 지금까지도 황자의 총애를 얻고 있었다.
언젠가는 황자의 총애를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굽힐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게 지금은 아니니,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어떻게든 네 가문의 가주들을 납득시킬 생각이었다.
* * *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된 병력은 단 오천.
“전선(戰線)이라고 봐야 한다. 최대한 추려라.”
상대가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적이 쳐들어오든 이쪽에서 치고 나가든 판니른의 병력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선봉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런 만큼,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군터는 수하들에게 명을 내려 파헨델의 병력 중 정예를 추려내도록 했다.
“그나마 시간이 좀 있는 게 다행이군요.”
군터는 언제고 파헨델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때 데려갈 자신의 병사들을 준비했다. 처음 신병을 받았을 때부터 심할 정도로 몰아친 훈련도 이를 위해서였다.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
“보름이 남은 것이 맞습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더 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군터는 곧 테리브란으로 내려가야 했다. 병사들을 옮기는 것은 테리브란에서의 일이 끝난 다음이 될 것이다.
“늦춰질수록 좋습니다.”
병사들을 조금이라도 더 훈련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달라는 뜻.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군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브란에서 바로 임지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병사들의 통솔은 네게 맡기겠다.”
“예.”
군터는 살라스에게 파헨델의 일을 맡기고서 친위병 백을 거느리고 테리브란으로 향했다. 빠르게 움직이면 이틀 정도는 충분히 단축할 수도 있으나, 그러지 않고 일부러 느긋하게 이동했다.
테리브란에 도착했을 때에는 늦은 밤이었기에, 입궁은 다음날로 미루어졌다. 군터는 그의 자택으로 야스메티를 불러 들였다.
“일이 잘 풀렸더군. 수고했다.”
“살기 위해서는 이쪽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게지요.”
“말로만 겸양하는군.”
입으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해도, 조금 더 칭찬해줘도 좋다는 듯 실실 웃고 있다. 군터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딱히 기를 죽이려고 기세를 돋우지 않아도,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를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곤 했다. 주눅이 들고, 심지어 말을 더듬거나 눈 한 번 못 마주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야스메티는 그를 대하면서도 태연했다. 연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의 앞에서 단독으로 시선을 받으면서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보다 장군. 우슈무르와의 혼사는…….”
“아들 녀석이 원하고, 그쪽에서도 원한다.”
“허면 진행하는 것입니까?”
“급한가?”
“급하지는 않지만, 빠를수록 좋은 것은 사실이지요.”
“시기를 봐야한다고 하지 않았나?”
군터가 우슈무르 가문과 좋은 관계라는 것은 이미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다. 우슈무르의 가주가 그의 휘하에서 복무중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미 우슈무르 가문은 대외적으로 반쯤은 군터의 가신 가문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반쯤 그리 여겨지는 것과 정말로 가신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우슈무르의 여식이, 가주의 친동생이 군터의…크렘보르 가문의 후계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그들이 완벽하게 크렘보르와 한 배를 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니.
귀족 가문을 휘하에 둔다. 그 의미는 남다르다. 귀족은 제국의 지배층이며, 따라서 가진 힘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하다. 그런 이들이 남의 밑으로 쉽게 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귀족이면서 귀족을 거느릴 수 있는 이들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권세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자연히 그런 이들은 여러모로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 특히, 경쟁자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또 다른 권세가들은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 터.
때문에 야스메티는 우슈무르와의 혼사를 진행하더라도 그 시기를 신중하게 잘 살펴야 한다고 예전부터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되도록 빠르게’를 말하고 있으니.
“이미 장군께서 귀족이 되셨고, 힐스보른의 성주가 되셨습니다. 거기에 휘하에 거느린 병력만 2만이시지요.”
“아직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황자의 말이었을 뿐이다. 내일 대전에서 정식으로 귀족 서임을 받고 그 이후의 것들을 논하면 지금 말한 것들이 어찌 바뀔지 모른다.
“전하께서는 절대 굽히지 않으실 겁니다.”
“확신 하나?”
“예. 전하께서…음,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꺾이실 리 없습니다. 그간 양보하신 것들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받기 위해서 내줬다 이건가?”
“정확합니다. 거기에 조금 더하자면, 제레이스를 포함한 그 다섯 개 가문은 너무 컸습니다. 더 이상 커지면 정말 황자 전하가 통제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전하께서 절대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으심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허수아비가 되기를 원하실 리도 없지요. 장군을 판니른에 배치하는 것은 다가올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도 있지만, 새로이 들어온 동부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도 있을 겁니다.”
“내가 판니른에 가는 것과 동부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지?”
“장군을 동부로 끌어들인 것…음, 말이 조금 이상하군요. 장군을 동부로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준 이들이 동부의 귀족들이지요. 장군께서 판니른에 가 계시는 동안에도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장군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할 겁니다. 장군의 휘하에는 2만의 병력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억압하는 것도 가능하니 그들로서는 장군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리고, 장군께서도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셔야 합니다.”
그 연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군대를 휘하에 두었다 한들 그들을 전장에서 부리듯 부릴 수는 없으니, 동부 3주에서 그들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동부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내일은 장군의 날이 될 겁니다. 마음껏 즐기고 오십시오.”
야스메티가 히죽 웃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