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화
“군터 장군! 교지를 받으십시오!”
테리브란에서 사람이 온 것은 오합지졸인 병사들의 훈련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뻣뻣한 정복을 차려입은 채 걸어오는 이들은 누가 봐도 황자가 보낸 사자였다.
‘빠르군.’
군터는 그가 온 이유를 짐작했다. 야스메티가 벌이고 있는 일 때문이리라.
“먼 길 오느라 수고했소.”
“별 말씀을. 전하의 명이면 세상 어느 곳이라도 기꺼이 달려가야지요.”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테리브란에서 파헨델까지 오는 길이 대단히 힘들었을 리는 없다. 그 증거로, 그의 신색은 꽤나 정갈했다.
“아무튼…그, 예를 갖추시고…교지를 받으십시오.”
은근히 거드름을 부리던 중년인이었으나 군터가 그에게 계속 시선을 주니 점차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사자는 할 일을 하시오.”
그는 푸짐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 군터에 비하면 왜소해보였다. 군터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도 그랬다. 그래 보이는 데는 그의 굽어진 어깨도 한 몫 했다.
“파헨델의 사령관, 적포장군 군터는 들으라.”
간결하게 시작된 낭독은 거추장스러운 서두를 지나 느릿느릿하게 본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공이 있으매, 적포장군 군터에게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내린다.”
“…….”
“장군.”
중년인은 당황한 듯했다. 마땅히 ‘전하의 은덕이’로 시작되는 찬사가 나와야 할 터인데, 군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만약 보통 때 이런 반응을 접했다면 그는 ‘무엄’을 입에 담으며 따끔하게 지적을 것이다. 호통을 쳤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음속으로는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통은커녕, 그는 잔뜩 위축되어 군터의 눈치만 살폈다. 절대 그럴 리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쩌면교지의 내용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내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겠지.’
미친 자가 아니고서야 감히 황자의 사자에게 해코지를 하겠냐마는, 그런 비상식적인 상상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로 그의 이성은 마비되어 있었다. 그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두려움이 은연중 그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
“…아. 미안하오.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그, 그러시군요.”
생각지 못했다고?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그가 조만간 귀족이 될 거라는 이야기는 일찍부터 퍼질 만큼 퍼져 있었다. 그런데 당사자가 몰랐다고?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물론 그런 속마음을 입 밖에 낼 용기는 없었다. 그저 교지를 조심스럽게 다시 접고서 눈치를 볼 뿐.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편히 쉬다 가시오.”
“아, 예. 감사합니다.”
사자가 물러가고, 군터는 그에게로 몰려든 수하들에게서 축하를 들었다.
“장군! 감축 드립니다!”
“이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감축 드립니다 장군!”
귀족이 된다는 것. 또 다른 이름이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이 길어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분이 상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노예와 평민의 차이보다 평민과 귀족의 차이가 더 크다. 귀족이 되었다는 것은 이 거대한 제국의 지배층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그런 고귀한 위치에 오르기를 원하지만 그 소망을 이루는 이는 한줌 모래속의 티끌만한 알갱이 하나도 될까 말까다.
그런 것을 이루었다. 위장의 지위와 귀족의 신분. 진정한 의미의 장군가를 일군 것이다.
누구라도 가슴을 펴고 뿌듯해 할 업적이었으나, 군터는 담담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는 의아했다. 테리브란에서 황자의 사자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사자가 들고 온 교지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짐작은 빗나갔고, 뜬금없이 새로운 이름과 귀족의 신분을 얻었다. 교지의 내용을 낭독하던 사자는 그간의 공을 열거하며 공에 대한 상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미 흘러간 과거의 공을 들먹이며 상을 내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야말로 상을 내리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야스메티가 벌이고 있는 일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귀족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게 언제냐의 문제였을 뿐.
군터는 그 시기가 조금 더 이후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과 같은 억지 구실이 아니라, 조금은 더 그럴듯한 구실과 함께.
“이제는 제 이름도 보리스 크렘보르인 것입니까?”
“그래.”
“어색하군요.”
보리스는 자신이 귀족이 된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익숙해져라.”
익숙해지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익숙해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보리스 크렘보르’가 아니라 그냥 ‘보리스’였던 시절이 낯설게 느껴지겠지.
“기쁘지 않으십니까?”
“글쎄.”
예전 같았으면 기뻐했을 것이다. 높이 올라가고 싶은 야심을 일말이라도 품고 있었던 시절이라면 말이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그의 가슴은 차갑게 식었다. 야심 같은 말랑말랑한 것은 더 이상 그에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
“기쁜 것보다도, 의외였다.”
“의외라 하시면?”
“이런 교지를 받더라도, 그것은 야스메티가 일을 마친 뒷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순서가 바뀌었다. 아무래도 좋겠지만, 왠지 일이 조금 더 번거로워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원하는 대로 되었구려. 축하를 드려야 하나.”
“감사하다고 해야 합니까? 하하.”
“농이 아니라, 정말로 축하드리오. 군터 장군…아니지.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충분히 자격이 있으시지. 내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꽤 늦었다고 생각하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야스메티가 싱긋 웃었다.
처음 인사를 나눈 이후로 줄곧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심각한 이야기들은 며칠 전에 다 끝냈기에 이후로 지금처럼 만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향후의 자잘한 사안들에 대해 조율을 하는 것뿐이었다.
“브랜우드 공께서 전하께 주청을 올릴 것입니다.”
“다른 두 분께서도 힘을 보태주실 테고 말이지요?”
“당연히.”
“좋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척척 흘러가고 있다. 계획을 직접 짠 당사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순간이다.
‘좋아. 역시 급했나보군.’
움직임이 상당히 빠르다. 합의를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행동에 나선단 말인가.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침략자’들의 공세가 그만큼 거셌다는 뜻이겠고.
‘4개 가문과도 어느 정도는 물밑에서 접촉이 있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지간하면 협상을 해보려 하겠지만, 제레이스를 비롯한 기존 7황자 진영의 권력가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냈다. 타협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만큼.
그들이 세력을 일군 동부 3주는 7황자 진영이 신경 써야 할 잠재적인 두 전선 중 하나다. 어쩌면 아바시스의 병력이 밀고 올라올지도 모르고, 아니면 13황자가 미친 척하고 북상할지도 모른다. 둘 모두 얼마든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위협인 만큼 7황자는 동부 3주에 견고한 방어벽을 세우길 원할 터였다. 3주 전체는 아니더라도, 일부에서는 군정을 실시할지도 모른다. 그리 되면 그곳에서 호족으로서 권세를 누리던 이들은 그들의 권력을 일부라도 내려놓아야 할 테니, 그들로서는 그 내려놓아야 하는 ‘일부’를 어떻게든 최소화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들은 일찍이 7황자와 전쟁까지 치렀던 2황자의 구신 출신이라, 가뜩이나 동부 3주에 막강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군대를 통솔할 권한까지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들도 그것을 알기에 언감생심 과욕은 부리지 못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은 없다. 차선조차 불확실하다. 그러니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악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가진 것을 탐하는 탐욕스러운 맹수들을 피하는 것 말이다.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전하의 명만 떨어지면 즉시 군대를 이끌고 판니른으로 향하실 겁니다.”
그들은 최악만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자의 외척인 제레이스를 필두로 하여 자하브, 캄브라이, 칼리아, 컬몬 가문이 뭉쳤다. 황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테리브란에 기반조차 없어 조정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미미한 그들이 북부 최고 권력 가문들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점점 암담함에 젖어갈 즈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황자의 총애를 받는, 젊은 적포장군이 보낸 사람. 스스로를 야스메티라고 소개한 이는 그들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던졌다.
나설 수 없는 그들을 대신해 동부에서 군대를 이끌고 머물겠다. 그 대신, 그것을 위한 준비는 그들 쪽에서 전담하라.
거절할 수도 없고, 거절할 이유도 없는 제안이었다.
“브랜우드, 몰던, 크레이그는 크렘보르 장군을 지지할 것이오.”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세 가문의 지지에 충분히 보답하실 것입니다.”
북부의 권력 세력과 연이 없으면서도 충분한 힘을 갖춘 자. 그런 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신료들을 통틀어도 두 손으로 넉넉하게 헤아릴 수 있을 정도.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군터가 있었다. 아조프 가문이 있었다. 움츠러든 동부의 권력자들은 그들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동맹은 너무 거창하다. 연수 정도면 적당할 것이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기에 손을 잡았다. 이 맞잡은 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당장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
“하하하.”
이렇게 활짝 웃을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 *
“크렘보르 장군! 전하의 명을 받드십시오!”
사자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사자가 왔다. 이번에도 군터는 담담히 사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의 명입니다 장군. 파헨델의 병력 오천을 판니른으로 보내고, 장군은 이백 이하의 수행인원을 거느리고서 테리브란으로 오십시오. 그곳에서 전하의 명을 직접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 하겠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