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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64화 (564/1,064)

564화

야스메티는 아조프 가문에서 나온, 주르드라는 이름의 빼빼 마른 사내와 마주앉았다.

“자리는 주선했습니다만…….”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도움이랄 것이 있습니까. 어차피 다 같이 좋자고 하는 일.”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괜찮겠습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질문에 야스메티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자신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다 같이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요.”

“우리가 저들이 필요하듯, 저들도 우리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어가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을 테니.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저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이겠지요.”

야스메티가 다시 한 번 웃었다.

“맞습니다.”

역시 아조프 가문에서 일을 맡길 만한 자다. 말이 빨리빨리 통하니 괜히 설명하느라 힘을 빼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

“시간은 내일 저녁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군요.”

“그렇습니까?”

“음…사실, 대충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미 조정 회의에 안건이 올라간 상태일 터. 발등에 불똥은 떨어졌으니 그들로서는 조급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다하여 곧바로 반응한다면 자신들이 지금 몸이 달아있음을 드러내는 꼴이니, 최대한 의미 없는 배짱을 부려볼 터. 보아하니 그 한계가 하루하고 한나절이었던 모양이다.

“이쯤 되었으면 충분한 것 같군요.”

이런저런 것들에 대한 자잘한 논의를 마친 후. 주르드가 돌아가고 야스메티는 곧바로 니클라스의 방문을 받았다.

“간도 크십니다.”

“흠. 작지는 않지. 그건 그렇고, 장군께 답신이 온 모양이오?”

“만에 하나라도 장군께서 허(許)하지 않으셨다면 어찌할 생각이셨습니까.”

“그러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었소.”

“만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오.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아슬아슬하지. 장군의 답을 기다렸다면 때를 놓쳤겠지.”

“책임을 지셔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었습니다만.”

“그랬다면 벌을 받으면 그뿐이오. 어차피 살아가는 매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니, 난 선택을 한 거요.”

물론 확신은 있었다. 그렇기에 두려움 없이 ‘만에 하나’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똑같이 했을 것이고, 망설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답신은 왔지만, 아직 보지 못하셨잖습니까.”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좀 긴 것 같소.”

“그러게 말입니다.”

니클라스는 감탄했다. 야스메티가 능력 없는 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담대한 자인 줄은 몰랐다. 아무리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한들 이런 큰일을 독단적으로 벌인다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과 결단력 없이는 결코 하지 못할 일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니클라스는 그동안 야스메티에 대해 내심 능력 있는 자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그의 행실 때문에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머리 쓰는 일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큰일을 맡길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다. 가벼운 행실 때문에 사람까지 가벼워 보인 탓이다.

허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군터가 왜 야스메티를 테리브란에 남기고, 온갖 대소사를 일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 있습니다.”

봉인된 서신을 건네받은 야스메티는 순식간에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감흥 없는 얼굴로 서신을 접은 그가 하품을 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음…조금 쉬어야겠군. 한 숨 자고 있을 테니 이 사람을 찾을 일이 생긴다면 지체 없이 사람을 보내주시오.”

“자택으로 가십니까?”

“흐흐.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아시잖소.”

“허면?”

야스메티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 사람이 직접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터인데 뭘 굳이.”

“…….”

“아아. 오해는 하지 마시구려.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으니. 난 내 일을 하고, 공은 공의 일을 하고. 다 그런 것 아니겠소?”

“그렇지요.”

“그래요. 허면 나중에 봅시다.”

털레털레 걸아 나가는 야스메티. 니클라스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이 혀를 찼다.

은밀하게 눈을 붙인다고 했는데도 들켰다. 아닌가? 머리가 좋은 자이니 어쩌면 그냥 한 번 떠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뭐가 됐든, 우스운 꼴을 보인 것은 분명하니 허탈하고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어지간히도 방탕한 사내로군.’

야스메티가 어디로 가는지는 뻔하다. 요즘 들어 자주 간다는 유곽이겠지. 그가 하루 건너 하루 꼴로 창녀 두엇을 끼고 밤을 보낸다는 것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것이었으니.

‘그 허약한 몸이 남아나는 것도 용해.’

그의 형인 바오룸과 달리, 야스메티는 허약한 체질이었다. 잔병치레도 잦은 편이고, 기력이 달리는지 오랫동안 업무를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술과 여자는 그리도 밝히니, 니클라스의 생각에 야스메티는 장수하는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뭐, 내 알 바 아니지.’

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야스메티의 감시다. 야스메티가 일을 잘 하건 못 하건, 문란한 생활을 이어가다 앓아 누워버리든 말든 그냥 본 대로 보고하면 그 뿐.

‘그나저나…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면 재미있게 되겠군.’

기대가 되지만,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마냥 기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내가 다시 돌아가게 될 일은 없겠지.’

그의 주인은 그의 쓰임새를 이미 마음속에서 굳힌 듯했다. 니클라스 자신도 이런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예전 젊었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혈기왕성하고, 도전 정신과 의욕으로 충만했던 그때 그 시절이.

‘부질없는 미련일 뿐.’

미련. 미련이다.

그리 되뇌며 스스로를 달래도 끝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은 그의 피가 뜨겁기 때문이었을까.

* * *

군터는 파헨델에서 병사들의 조련에 전념했다. 이전의 전쟁에서 상한 병력 이상으로 신병이 보충 되었으나, 그들 중 대다수는 이제 막 군문에 발을 디딘 햇병아리들이었다. 그야말로 기초부터 가르쳐야 하는 오합지졸들. 때문에 파헨델에서는 하루도 함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한심한 수준입니다. 이놈들을 데리고 전장에 나가면 눈앞보다 등 뒤에서 꽂히는 칼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군터는 수하들이 볼멘소리를 토하는 것을 이해했다. 그도 병사들을 훈련시키면서 여러모로 엉성한 신병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강도 높은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고 바닥을 기던 그들의 모습은 확실히 기존의 병사들과 두렷하게 구분이 됐다. 한심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처음부터 만족스러울 수는 없지. 지금의 병사들도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기본적으로 기병이 될 소질이 있는 놈들이 거의 전무합니다.”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조금은 과장된 말이다. 신병이라고 해봐야 원래 칼 밥을 먹던 용병들이 병사로 들어온 것이 아니니, 본래는 병장기도 제대로 쥐어 본 적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들이 언제 말을 타 봤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시간을 들여 충분히 훈련을 시킨다면 어떻게든 기병으로 써먹을 수는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다.

“너무 눈이 높은 것은 아닌가.”

“초원의 전사들을 더 구해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여야지.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초원에서 나고 자란 전사들은 말 위에서 생활하는 것이 땅에 발을 딛고 생활하는 것처럼 익숙하다. 그들은 빠르게 말을 달리며 활을 쏠 수 있으며, 하루의 반 이상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다. 할렌을 비롯한 초원 출신 장교들이 가진 기병의 기준은 그런 초원의 전사들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준은 너무 가혹하다. 내지의 병사들이 어찌 초원의 전사들만큼 말을 탈 수 있겠나. 그나마 바크렌에서 거둔 병사들의 경우에는 초원에서 넘어오는 약탈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마술에 능숙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어떻게든 훈련을 시켜서 부족하나마 써먹을 수 있었지만, 그보다 남쪽에 위치한 제국군의 기마술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신병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어차피 초원의 전사들을 계속 수급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욕심은 버려야 한다. 최대한 훈련은 시키되, 정 안 된다면 기병의 편제를 점차 바꿔나가야 하겠지.”

사실 이미 예전부터 했던 일이다. 가볍게 무장한 궁기병들의 비중이 줄고 정면으로 적을 들이받는 중장기병이 느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투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정예병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초원 전사들이 주축이 된 궁기병들이 강력하다고 해도 그 수가 고작해야 일이백 정도여서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쯤 되면 별동대로서도 의미가 없어지니, 결국 궁기병이 될 만한 재원이 꾸준히 공급되지 않는 한 기병의 편제는 빠르든 느리든 결국 중장기병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원 전사들에 대한 건 말입니다만…….”

살라스가 입을 열었다.

“바크렌 총독에게 요청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청?”

“초원민족은 그에게도 골칫거리일 것입니다.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겠지만, 강경책만으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유화책을 쓰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불온하다고 생각할 초원민족의 힘을 어떻게든 분산시키려고 하겠지요.”

그 즈음에서야 군터는 살라스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쪽으로 데려오자는 건가.”

“장군의 휘하에는 바오룸 공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초원 전사들이 있으며, 장군부터가 초원 출신이시지요. 바크렌에 그대로 남아 제국의 탄압을 견디거나, 척박한 초원으로 돌아가느니 타지라고는 해도 기댈 수 있는 언덕을 찾으려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유게르 티브리악이 수고를 해줘야겠지만, 그와 군터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다. 일방적으로 도움만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양쪽 모두가 좋은 일이니 그는 이 제안을 거부하지 않으리라.

“바크렌에 사람을 보내라. 아니지. 바오룸이 직접 가면 좋겠군.

“옛.”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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