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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63화 (563/1,064)

563화

“뭐라 적혀 있습니까?”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보리스였다. 군터는 두 번째로 읽던 서신을 접고 보리스에게 눈길을 주었다.

본래 이런 물음은 살라스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보리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후계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할까. 천부장이 된 후부터 간혹 그런 모습을 보이더니, 벨리사의 죽음 이후, 파헨델로 돌아온 후로는 계속 그런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라스나 다른 수하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고.

“직접 보아라.”

그렇기에 군터는 야스메티의 서신을 보리스에게 건네주었다.

공손히 서신을 받아든 보리스가 곧 서신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서신을 보는 내내 보리스의 표정이 살짝살짝 바뀌었다. 서신의 내용을,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되면…괜한 소란에 휘말리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느냐.”

“장군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선은 옆으로 넘겨라. 다 같이 보고서…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지.”

서신은 보리스에게로 살라스로, 살라스에게서 할렌으로 넘어가고, 이후에도 순서대로 돌아갔다. 군터는 가장 마지막, 자밀까지 서신을 다 읽고 나서 입을 뗐다.

“다들 어찌 생각하나.”

서신을 본 이후로 줄곧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살라스가 제일 먼저 답했다.

“소관의 소견으로는…야스메티 공이 길을 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옳게 보았다.”

길을 연다. 군터는 그것이 제법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살라스가 긍정적인 답을 내놓자마자 보리스가 반박했다.

“허나, 이미 전하로부터 받은 약조가 있지 않습니까. 굳이 장군께서 먼저 나서서 위험부담을 질 필요가 있을지요.”

“소관이 비록 배운 것이 적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입으로 하는 약속만큼 무가치한 것이 있습니까?”

아드리안의 말에 보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수긍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도 못했다.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정치 경험도 없는 그조차도 아드리안의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거다. 설마 황자씩이나 되는 이가 스스로 한 말을 뒤집기라도 하겠냐마는, 그런 약조를 했다는 것도 부친과의 독대 자리에서라고 하지 않나.

“음…….”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야 합니다. 부모가 아닌 이상에야 내 입에 남이 먹을 것을 넣어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높으신 분들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비정하기로 이름난 판인만큼…소관이 말한 것에서 크게 벗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배운 적이 없어 많이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보고 겪은 것에 대해서만큼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드리안은 무지할 수는 있어도 어리석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씩은 이렇게 다른 이들은 하기 힘든 말도 할 줄 알고.

“아드리안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허나 말씀하신대로 비정하고 지저분한 판입니다. 그런 곳에 발을 들이시는 겁니다.”

줄곧 아무 말 않고 있던 자밀이 입을 뗐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온갖 군상들이 음흉함을 지니고서 때로는 잡상인처럼, 때로는 암살자처럼 몰려들겠지요. 원치 않는 이들과 원치 않는 일로 원치 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선친께서도 골머리를 앓으셨지요.”

잡상인이라. 재미있는 비유다.

“어차피 잡상인들은 지금도 꼬이고 있다.”

“본격적으로 나서시게 되면, 그 수가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질 겁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천부장으로서, 당연히 자밀에게도 발언권은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자밀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입을 열 것이라 생각한 이는 없었다. 그것은 그의 친우인 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친구가 무슨 바람이 분 거지?’

파헨델의 군영에서 자밀의 위치는 애매하다. 군터 이전부터 파헨델에서 복무하던 이들에게서는 전 사령관의 아들로서, 우슈무르 가문의 당주로서 어느 정도의 존중을 받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은근히 경원시되기도 했다. 다른 상관을 섬기는 입장에서 전 상관의 아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반면 군터와 함께 파헨델로 온 이들에게 있어, 자밀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전사한 장군의 아들. 귀족가의 도련님. 혹은 장군(군터)이 후원하는 백부장(이제는 천부장이 됐지만) 정도? 멀리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할 이유도 없는 이에 불과했다.

상술했듯, 그는 군터의 후원을 받는다. 그의 승진은 군터의 아들인 보리스보다도 빠를 것이다. 그가 백부장이 되고, 천부장이 되고, 그 이상의 지위를 얻어 머지않은 시일 내에 ‘독립’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자밀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백부장일 때도, 천부장이 되어서도 조용히 있었다. 어차피 독립하여 나갈 이가 남의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 자밀은 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줄 알았는데, 꽤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며 조언을 하고 있다. 군터는 그 태도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마음을 굳힌 건가.’

보리스의 말에 따르면, 자밀이 먼저 자신의 동생을 소개시켜주었다고 했다. 둘의 관계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라고 했고. 그런데 지금 나서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어쩌면 처음부터 둘을 이어줄 생각으로 은근히 보리스를 부추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하지. 어찌 할 것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

시일을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나, 그렇다고 시간에 쫓겨 제대로 숙고하지도 못하고 성급하게 결정할 일도 아니다. ‘조언’은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판단은 그의 몫.

“자밀 우슈무르 천부장은 남아라.”

“예.”

남으라는 말에도 자밀은 짐작했다는 듯 담담히 대꾸했다.

잠시 후.

자밀은 조용히 앉아 군터의 말을 기다렸다. 군터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무슨 생각인가?”

“장군께서 짐작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내 생각보다는, 자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군.”

자밀이 잠시 고민하며 뜸을 들였다. 그동안 그의 표정이 꽤나 다채롭게 변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옅게 웃었다가, 체념한 듯 한숨까지 내쉬었다.

“…한계를 느꼈습니다.”

“한계?”

“선친께서는 일찍부터 제게 군인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병사들을 제대로 이끌려면 병사들을 알아야 한다며 저를 병사로 복무하게 하신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엄격한 자들이야 꽤 있는 편이지만, 세레온 우슈무르처럼 극단적인 이는 없었다. 그가 살아있을 적, 그는 군인의 귀감이라면서 칭송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난스럽게 군다며 핀잔을 사기도 했다.

본래라면, 병사로 몇 년간 고생을 시킨 다음 차근차근 지위를 높여줄 계획이었을 것이다. 종국에는 아들을 자신의 옆에 두고 이것저것 가르치다가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했을 터.

그러나 세레온 우슈무르의 계획은 그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어그러졌다. 그의 아들은 병사들을 어찌 이끌어야 하는지는 깨쳤으나, 그 이상은 배우지 못했다. 장군으로서, 귀족으로서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그가 급하게 자리만 올라간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가 져야하는 짐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문의 부흥이라는,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은 그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차라리 자밀이 책임감 없는 얼간이였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자신의 짐을 외면할 만큼 책임감이 없지도 않았고, 얼간이도 아니었다.

괴로웠다. 매일매일, 부담감이 숨통을 조여 왔다. 쉼 없이 궁리했지만, 한 번 세가 기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쉽지 않았다. 한 번 장군가에서 일반 귀족 가문으로 내려온 이상,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수한 견제를 이겨내야 한다. 이는 부친의, 가문의 옛 연에 기댈 수도 없는 일이다. 과거 그들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것은 서로 주고받을 게 있었기 때문이고, 서로에게 기대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우슈무르 가문에는 그들에게 줄 것도, 기대하게 해줄 것도 없으니 그들이 왜 우슈무르 가문을 위해 수고를 해주겠는가.

혈육이라고 해도 그 정도 의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연이 있다고는 해도 타인에 불과한 이들이야 말해 무엇 할까.

결국 스스로 해쳐나가야 한다. 허나 어떻게? 어떻게든 전공을 쌓고, 또 쌓아서 올라가는 것?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가문의 사람들은 그에게 더 빠르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런 식으로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이다.’

출세를 위해 여동생을 팔아먹는다고 손가락질 당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니 반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친우이기도 한 보리스가 제3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꽤나 괜찮은 사내라는 것. 그리고 동생도 마음이 완전히 없지는 않다는 것.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떤가.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하는 이상, 타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군터는 위장이지만 귀족은 아니다. 그러나 곧 귀족이 될 것이다.

‘속을 알 수 없지만, 감당 못할 정도로 탐욕스럽고 음험한 자들보다는 백 배 낫다.’

무엇보다도 능력. 이런 세상에서 가장 높이 살 수밖에 없는 가치. 황자는 그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때문에 총애한다.

능력이 있고, 과한 욕심이 없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인색하지도 않다. 속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해도, 이런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누굴 따라야 할까. 사람의 앞날을 재단하는 것만큼 헛된 일이 없지만, 군터 정도면 충분히 걸어볼 만하다는 것이 그를 직접 곁에서 지켜봐 온 자밀의 판단이었다.

“우슈무르 가문은 장군을 따르고자 합니다.”

“난 귀족이 아니다.”

“지금은 아니나, 곧 되실 것을 세상이 다 압니다.”

“내 아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담담한 물음. 질책하는 어조가 아니라, 의미 없이 한 번 물어나 본다는 투였다. 그런데도 자밀은 순간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단코 아닙니다. 보리스가 제 동생과 좋은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네의 말을 믿지.”

“장군. 혹…….”

“난 아들 녀석의 혼사에 관여할 마음이 없네.”

“…….”

“녀석의 일은 녀석의 일. 그 때문에 자네와 자네 가문을 다그치는 일은 없을 걸세.”

진심일까? 자밀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무심한 표정의 그에게서 생각을 엿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슈무르 가문이 나와 함께 해주겠다는 것은 고마운 말이다.”

“성심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나 또한, 부족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겠네. 이만 물러가 봐도 좋네.”

“예. 그럼.”

집무실을 나서고, 자밀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쓸었다.

‘이 긴장감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군.’

이제는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독대를 해서일까?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처럼 말 한 마디를 내기가 힘겨웠다. 군인으로서 얼마나 뛰어난지를 말하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도 범상치 않은 자다. 자밀은 이런 위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작고한 부친에게서조차.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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