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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62화 (562/1,064)

562화

“실비아 아가씨는?”

“우슈무르 저택에.”

야스메티가 니클라스의 즉답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제는 말을 타고 도시 밖으로 나가더니, 오늘은 다시 우슈무르 저택에 출근도장을 찍는 모양이었다.

“모페이브 공의 심려가 크겠군.”

“한 마디 거들어주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에겐 안타깝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오?”

“우슈무르 가문과의 혼사. 괜찮다고 보십니까?”

“아주 만족스럽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슈무르 가문 정도면 나쁘지는 않지.”

우슈무르 가문은 전통적인 명문가라고 할 수는 없어도, 군부 내에 나름대로 인망이 있는 귀족 가문이다. 구심점이 되던 가주는 죽었고, 그 아들이 대를 이었으나 지금은 파헨델에서 군터의 휘하 천부장으로 복무 중. 그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일천하여 근시일 내에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우슈무르 가의 여식이 보리스의 부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슈무르 가문이 군터에게 반쯤은 예속된다고 봐도 될 것이다. 물론 우슈무르 가문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그늘을 둔다고 생각하겠지만…….

‘속 편한 생각이지.’

누구나 나름의 계획은 있다. 하다못해 노름판에서도 그렇다. 서로의 패를 공개하기 전까지는 속으로 어떻게든 아름다운 승리의 그림을 그리기 마련이다. 심지어 정말 답도 없는 패가 들어왔어도, 상대방이 비릿한 웃음을 짓기 전까지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우슈무르 가문이라.’

한 번 손에 들어온 이상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쪽의 든든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이 지닌 명망과 인맥, 귀족이라는 지위. 무엇하나 탐나지 않는 것이 없다.

‘음. 좋아. 아주 좋아. 보리스 공자와 우슈무르의 아가씨가 혼례를 치른 후, 우슈무르의 어린 가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전대 우슈무르 가주였던 세레온 우슈무르는 두어 명의 첩을 두었다. 그들에게서도 자식을 보았고, 그 중에는 아들도 있었다. 허나 그 중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이 이제 갓 열이 넘었다고 하니, 만에 하나 현 가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들은 구심점을 잃을 것이다. 첩의 자식이 가주의 지위에 오른다면 나이도 나이지만 그 출신 성분 때문에 이런저런 소란이 일 것이니, 그런 어려움 속에서 우슈무르 가문은 더욱 이쪽에 기대게 될 터.

‘뭐, 아직은 이른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 보리스 공자가 강하게 주장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것은 군터다. 희망적인 것은 군터도 이 사안을 그리 나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이지만…어찌 될지는 모른다.

‘음…그래도 역시 나쁘지 않단 말이지.’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니클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공무 중이 아닙니까.”

야스메티가 빈 잔을 가볍게 흔들며 피식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소?”

“어찌 익숙해질 수 있겠습니까. 술은 이성을 흐릴 뿐입니다.”

“기름칠을 안 한 쇠는 녹이 슬기 마련.”

“공은 사람이지 쇠가 아닙니다만.”

“이것도 기름이 아니라 술이지. 내게 있어 이놈은 조언자요. 이놈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놈이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영감을 일깨워주거든.”

“그래서 이번에도 영감이 떠오르셨습니까?”

“음?”

“불길한 표정을 지으시길래 말입니다.”

“아아. 아무것도 아니오, 술맛이 좋아서 그랬던 게지.”

“…….”

“참. 그것보다도…그건 어찌 됐소?”

슬슬 취기가 감도는 눈. 그러나 눈꼬리가 풀릴수록 가느다란 눈은 더 날카로워졌다.

“말씀하셨던 대로입니다. 그들 네 개 가문이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주제가 올라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말했듯, 무리할 필요는 없소. 무리를 해야 할 때가 되면 내 알려주리다.”

“상관없습니까?”

“어차피 그 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상의할 주제는 뻔하니까. 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끝난 이야기요.”

“허면,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렇소. 이제 슬슬 고기가 익었다고 본 거겠지.”

고기? 그게 과연 적절한 비유일까? 니클라스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자 야스메티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나름대로는 호탕하게 웃는 것 같았으나 영 별로인 인상에다 가느다란 목소리까지 합쳐지니 썩 듣기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허기진 자들이오. 그렇지만 그들의 허기는 절대로 꺼지지 않지. 끊임없이 먹어치워도 끊임없이 배가 고프지.”

그런 자들이기에 자신의 것을 탐하는 자들을 적대하고,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탐한다. 그들은 할 수 있다면 빼앗을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든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골몰한다.

그런 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무엇을 위해서겠는가? 당연히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다.

“동부 3주의 병탄이 막바지에 다다랐소. 미리부터 침을 발라놓으려는 수작이겠지. 이미 넘칠 만큼 가진 자들이 참으로 욕심이 많아. 그렇지 않소? 하하.”

어제 한 자리에 모였던 자들은 각기 제레이스, 자하브, 캄브라이, 카리아 가문의 대표다. 4개 가문 모두 한 주의 총독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력 가문들로, 명실상부한 현 7황자 진영 최고 세력들.

“조정 회의에서 정식으로 논의가 되면 약간 변동이 생기기는 하겠지만…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정한 큰 틀 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될 거요.”

“황자 전하는…….”

“언제나 그랬듯, 한 발 물러나 계시겠지.”

이런 정치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황자는 직접 끼어들지 않고 관망하는 쪽을 선호했다. 자신의 뜻을 피력할 때도 외가인 제레이스를 통해서 목소리를 냈고.

‘평범하지는 않지. 약점이라도 잡힌 게 아니고서야…….’

그러나 약점을 잡혔다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 간혹 제레이스 가문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의견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일 때도 있다는 거다. 특히 군사적인 문제에서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는 제레이스에서 몇 번이고 간청해도 매몰차게 뿌리치고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곤 했다.

‘유한 것 같으면서도 고집이 있어. 도통 알 수 없는 통치술이란 말이지.’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아니면 스스로 깨친 것인지는 몰라도 황자에게는 충분한 위엄이 있다. 그가 일갈하면 모든 이들이 그의 앞에서 눈을 내리깔며, 그가 원하는 바를 밀어붙이면 결국은 이루어진다.

황자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모든 권력을 자신이 쥐려하지 않는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얼마나 권세가 강하건, 어차피 이 세력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황자 자신의 존재 때문이다. 너무 무리하지 않더라도 적절하게 그들을 경쟁시키고, 대가를 빌미로 목줄을 채운다면 어렵더라도 그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 북부의 절대 권력자가 탄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며, 나아가 황좌를 차지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또 다른 황제가 탄생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 않다.

누구라도 뻔히 볼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황자는 어찌하여 그러지 않는가? 야스메티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신권(臣權)을 견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뭐…이쪽에게 있어서는 나쁘지 일이지.’

황자가 스스로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의 영향력은 크다. 제레이스는 물론이고, 나머지 권력자들도 황자가 입을 열면 그에 집중한다. 황자가 그들을 존중하듯, 그들 또한 황자를 존중하는 것이다. 신하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 이상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충분할 만큼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더 욕심을 부린다면 반발이 있지 않겠습니까.”

“있겠지. 허나 어찌 처리를 하더라도 결국 반발은 생기게 되어 있소. 반발이 무서워서 자기 몫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다만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욕심을 부리느냐가 관건이긴 하겠구려.”

구 2황자의 세력권이었던 동부 5개 주 가운데 3주를 병탄했다. 자연히 그 지역에서 세를 떨치고 있던 이들 일부도 7황자 진영으로 건너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직까지는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본래 2황자를 섬기다가 그가 패망한 이후 어쩔 수 없이 7황자를 섬기게 된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패배자들인 것이다. 패배자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승자의 아량이지, 어디선가 흘러내릴 달콤한 꿀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라 하더라도 목소리는 낼 수 있다. 정복한 동부 3주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최악의 경우, 그들이 합심하여 저항이라도 한다면 가까스로 손에 넣은 3주가 다시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이 은밀한 회담에 대해 알아차렸겠지.’

그러면 그들도 나름대로 준비를 할 것이다.

‘동과 서. 우리가 움직이기 좋은 곳을 하나 고르라면…서쪽보다는 동쪽일 것인데.’

잠잠한 황도가 가로막고 있는 남쪽은 논외로 치고, 27황자가 웅크리고 있는 서쪽과 새롭게 길이 열린 동쪽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역시 동쪽을 택하는 것이 옳다. 동쪽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리바스트라와 아록 일대에는 이미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쟁쟁한 인사들이 자기 몫을 꽉 쥐고 앉아있는 반면에 동쪽은 아직 모든 것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비집고 들어가려는 자들이 있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다. 혼란이 벌어지면 틈을 벌리고 들어가기가 쉬워진다.

‘어차피 황자도 장군을 파헨델에서 계속 썩힐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역시 어디로든 자리를 마련해주려 할 것인데…….’

황자의 뜻이라면 군침을 흘리는 승냥이들도 꼬리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황자가 그들에게 큰 소리를 치면서까지 군터를 밀어줄 것이냐 하면…글쎄.

‘쉽지는 않겠지만, 거래를 잘 하면 못할 것도 없지.’

어차피 정치라는 것은 모두 거래다. 저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거래를 하려 해서 문제긴 하지만, 세상사 어느 것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있던가.

“음. 니클라스 공.”

“예.”

“내 서신 한 장을 써줄 터이니, 그 서신을 가지고 파헨델로 사람을 보내시오.”

“급한 일입니까?”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오. 최대한 빨리 파헨델에 당도해야 하오.”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돌아나가려던 니클라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조프 가문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한 번 보잔다고 전해주시오.”

“아조프 가문에 말입니까?”

“그렇소. 되도록 빨리. 오늘이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유념하시고.”

“잘 알고 있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니클라스와 그가 부리는 수하들은 눈과 귀로서 최고의 실력자들이다. 알면서도 당부한 것은 그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번 일이 그만큼 중요한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니클라스의 확답을 들은 야스메티는 싱긋 웃으며 빈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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