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파헨델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돌아갈 준비를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두 자식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보리스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뭐?”
너무 뜻밖인 이야기라, 군터는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모자라, 멍하니 입까지 벌렸다.
“혼인? 우슈무르 가의 여식과?”
“예.”
“갑작스럽구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결코 가볍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은 아닙니다.”
“네가 그렇게 어리석은 녀석이 아님은 알고 있다.”
생각이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없는 녀석은 아니다. 감정에 휩쓸릴 때가 없지는 있으나, 경중은 따질 줄 안다. 그런 녀석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나름대로는 확신이 섰다는 뜻이리라.
“알던 사이냐? 자밀과 어울리더니, 덩달아 알게 된 것인가.”
“그렇습니다만, 오래 안 사이는 아닙니다. 이번에 와서 알게 됐지요.”
“…그렇다면 처음 얼굴을 본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군.”
이 대목에서는 누구라도 경솔하다는 생각이 들 법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는 실비아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러니저러니 변명하지 않았다. 이미 가볍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라고 말을 했다. 여기서 더 덧붙여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좋은 여인입니다. 제가 그보다 더 좋은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여인을 봤으면 얼마나 봤다고 그렇게 확신에 찼느냐.”
“아버지께서도 저와 다르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예상외의 반격에 당황한 것은 아니다. 군터가 잠시 말을 멈춘 것은, 보리스의 그 한 마디가 그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득 떠오른 예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벨리사를 처음 본 그 때. 그리고 오직 그녀를 보기 위해 먼 북쪽에서부터 말을 달리던 그 때의 기억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대단한 무언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마음이 그리하라 시켰고, 그에 따랐을 뿐.
눈을 찌르는 칼바람마저 상쾌했으며, 내리쬐는 햇빛은 감미로웠다.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떠올리기가 쉽지 않지만, 그때의 기억은 분명 그랬다.
“서두르지 마라.”
“하지만…….”
“확신이 있다면 몇 달이 미뤄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냐. 넌 내가 그랬다고 말했지만, 이 아비도 너희 어미를 만나고 한 달도 안 되어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보리스는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어도, 얼추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군터는 아들이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내와 여인의 차이. 그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쪽도 그쪽의 사정이 있겠지. 폐가 되는 일이 없도록 손을 쓰겠다. 어차피 입단속만 조금 한다면 문제될 것도 없지 않으냐. 당분간은 얼굴 볼 일도 없을 테니.”
“그건 좀 잔인한 말씀이시군요.”
“우슈무르의 여식에게 벌써 어지간히도 빠진 모양이구나.”
“사내라면 누구라도 빠질만한 여인입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기울기는 확실히 기운 모양이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군터는 따로 실비아와 자리를 가졌다. 아무래도 이제 한동안 못 보게 되는 만큼, 마지막으로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자리를 만들어도 딱히 이야기 할 거리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조금 전에 흥미로운 주제가 생겼다. 실비아도 아까부터 눈을 빛내는 것이, 새롭게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우슈무르의 여식에 대해 지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았다.
“네 오라비가 마음에 두었다는 우슈무르의 여식에 대해서…뭐 아는 것이 있느냐?”
“얼핏 들어는 봤어요. 이름이 분명…엘리야라고 했던가? 미색이 출중한데다 총기도 있어서 그녀를 마음에 둔 귀족가 공자들이 적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녀가 사교계에 얼굴을 비친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도요.”
딱히 스스로를 드러내놓고 다닌 적도 없는데 추종자가 생길 정도라는 거다. 하긴, 그 정도는 되니까 보리스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만에 푹 빠졌겠지.
“네 오라비에게 따로 언질을 들은 적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놀라던 표정은 따로 지으라고 해도 짓지 못할 만큼 생생했으니.
“어쩌실 생각이세요? 허락하실 건가요?”
“글쎄.”
허락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보리스 녀석이 가만있을 것 같지는 않다. 뭐, 강요하면 결국 따르기야 따를 테지만…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아들놈의 마음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략혼을 시킬 생각도 없었으니까.
“오라버니는 너무 순진해요.”
“응?”
“그렇잖아요. 언제 제대로 여자를 만나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라, 여자를 너무 몰라요.”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비아의 표정이 꽤나 다부졌다. 군터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우슈무르 가문은 괜찮지만, 그 엘리야라는 여자는 어떨지 몰라요. 얼굴을 자주 보이는 사람도 아니라서 이런저런 소문만 돌 뿐이지,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어요.”
호칭부터가 ‘그 여자’다. 목소리에 날이 섰다. 하나뿐인 오라비를 걱정하는 하나뿐인 동생의 마음일까? 군터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버지랑 오라버니가 임지로 떠나계시는 동안, 제가 그 여자를 만나볼게요. 어차피 우리랑 우슈무르 가문은 사이가 좋으니까, 이런저런 구실로 들락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겠죠. 그때 어떤 사람인지 제가 살펴보는 거죠.”
너무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곧이어 그렇다 한들 문제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실비아의 말처럼 우슈무르 가문과는 좋은 관계고, 이따금씩 사람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였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실비아가 직접 우슈무르 가문을 찾는다고 해도…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보였다. 물론 실비아가 우슈무르 가문에 가서 무례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눈이 빛나는군.’
그리고 무엇보다, 시름에 잠겨 있던 실비아의 눈에 빛이 돌았다. 이 뜻밖의 작은 여흥은 슬픔을 잊게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약간이나마 덜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혼사가 가문간의 일이라면 실비아 한 사람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재롱일 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우슈무르 가문으로 갈 때는 항상 모페이브와 함께 움직여라.”
“네.”
“그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 항상, 무슨 일이 있건 모페이브를 존중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이곳에서 그는 아비의 대리인이다.”
“알겠어요.”
원체 기가 센 실비아다보니 얌전히 모페이브의 말을 들을까 싶었다. 그래서 모페이브에게도 따로 이야기를 해두었다. 만약 실비아가 경솔한 행동을 하려 하거든 다소 강압적으로 나가서라도 제지하라고 말이다. 모페이브가 그런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성미는 아니지만, 실비아를 위하는 마음이 작지 않으니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다 싶으면 단호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러지 못한다면 니클라스가 나설 것이고.
“네 오라비의 일은 그렇다 치고, 너는 어떠냐.”
“네?”
“예전에 어미를 따라 가끔씩 바깥에 나가는 것 같던데…….”
“흥미 없어요. 다 머저리들뿐인 걸요.”
쌀쌀맞은 목소리에, 단호한 대답이다. 그렇지만 머저리들이라니, 표현이 조금 과격하다.
“어째서? 그래도 나름 한다하는 가문의 자제들이었을 텐데.”
“자기 혼자서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녀석들이 자기 이름 하나 가지고 으쓱대잖아요. 얼마나 꼴사나웠는데요.”
“음.”
아무래도 귀족가의 여식으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인지, 실비아의 성미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다만 군터도 실비아의 말에 동의했다. 스스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타고난 이름 하나만을 자랑삼아 으스대는 것은…아무래도 좋게 보기는 힘든 모습이다.
“잡초들 사이에도 꽃은 자란다.”
“무슨 말씀이세요?”
“잘 찾아보면 네 마음에 차는 녀석도 있을 거라는 뜻이다. 보기 싫은 녀석들이 있다고 해서 아예 눈을 감아버리면 볼 수 있는 꽃도 보지 못하게 되겠지.”
“…….”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유모의 조언이었다. 몇 번이나 기탄없이 말해보라고 권한 끝에 조심스럽게 한 이야기는, 실비아가 외로움을 탄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다고 해서 마음을 비워두고 싶은 것은 아니다. 실비아도 이제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닌 것이다.
“네 오라비…그 우슈무르 가문의 여식에 대한 것은 네게 맡기마.”
맡기긴 뭘 맡긴다는 것인가. 말하는 군터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홀로 남을 실비아에게 흥밋거리를 던져주는 것에 불과했다.
“맡겨주세요.”
실비아는 의욕이 충만해 보였다. 어떻게든 기운을 차린 것 같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싶었다.
* * *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다음에는 몇몇 수하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그가 자리를 비운 후의 일을 논했다. 말이 논의지, 이미 다 논의한 것에 대한 확인이었다.
“호닝거와의 연구는 어떤가?”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에서 다방면으로 가능성을 엿보고 있습니다.”
야스메티도 야스메티지만, 아무래도 군터가 가장 오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모페이브였다. 그는 살라스의 팔을 치료하며 친분을 쌓은 호닝거와 또 다른 연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오래 전부터 모페이브가 개인적으로 진행해오던 고렘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었다. 호닝거는 모페이브의 연구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는지, 적극적으로 그의 연구를 거들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모페이브는 그것을 군터에게 알렸고, 군터는 모페이브에게 뜻대로 하라고 했다.
모페이브는 호닝거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렘 연구는 그에게 있어 일생의 비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니, 실력 있는 술사인 호닝거가 함께 한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연구도 연구지만, 실비아를 잘 부탁하겠다.”
“맡겨주시오. 연구도 중요하지만, 아가씨를 모시는 일에 비하면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보리스도 보리스지만, 실비아는 그야말로 갓난아이 시절부터 봐온 모페이브였다. 실비아도 집사인 모페이브에게 항상 예의를 갖추고 가깝게 대했으니, 독신으로 살아온 모페이브에게 있어 실비아는 피가 섞이지 않은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군터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거리낌 없이 모페이브에게 실비아를 부탁할 수 있었다.
“그리고…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다음번이나…그 다음이 마지막이 될 것 같네.”
“언질을 들으셨습니까?”
“은연중에.”
“…….”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누가 유리한지 저들도 알고 있겠지.”
군터의 시선이 탁자 위의 커다란 지도로 옮겨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