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군터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가족이라고 해봐야 자식 둘뿐이지만, 벨리사가 있었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다. 특히 실비아와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이제 홀로 테리브란에 남겨질 그녀가 신경 쓰인 탓이었다. 물론 떠나기 전에 얼굴을 더 본다고 해서 뭐가 더 나아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래도…괜찮을 겁니다. 워낙 씩씩한 아이인 데다가, 믿을만한 식솔들도 있으니까요.”
“그렇다 한들 가족만 하겠습니까.”
“음…그렇기는 합니다만.”
“장군께서는 무리시더라도, 보리스 공자님께서는 임지를 옮기실 수 있지 않은가요?
“테리브란으로 말입니까?”
“그러면 가장 좋겠지요.”
엘리야의 말에 보리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처럼, 임지를 옮길 수 있다면 옮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파헨델에 있으면 부친의 후광을 누릴 수 있지만, 그 후광은 동시에 그늘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테리브란이나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임지를 옮긴다면 홀로 남을 동생을 신경 쓰기도 편할 테고.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장군께 말씀드리면…….”
“저는, 공적인 부분에서 아버님께 기대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그런 부분은…그 자체가 아버지에게 기대는 일이니, 따로 명이 내려온다면 모를까 제가 나서서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지는 않군요.”
“아. 실례했습니다. 저는 그저.”
“아닙니다. 좋은 마음에서 말씀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고집부리는 남자로 비췄을까. 어쩌면 아버지에게 기대고 싶지 않다는 대목에서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 밑에서 덕을 보면서 천부장까지 올라왔다고 여길 테니.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보리스는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친의 덕을 봤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덕을 보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고, 또 굳이 그렇게까지 기를 쓰고 피할 이유도 없다. 물론 너무 대놓고 기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래왔지만 말이다.
‘실비 녀석을 그냥 혼자 두는 것이 불안하긴 해.’
유모가 있고, 모페이브도 있다. 그들은 가족 같은 이들이다. 특히 실비아에게 있어서는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곁에서 그녀를 돌봐주었던, 또 다른 부모 같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실비아는 종종 그들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족 같은 존재라고 해서 진짜 가족인 것은 아니다. 혈육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아버지도 생각하고 계시겠지.’
부친은 근래에 실비아를 유독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홀로 남겨질 실비아에 대해서도 분명 생각했을 터. 부친이 실비아에게 무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알아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일전에 해주셨던 말씀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라던 말씀 말입니다. 동생 녀석이 쌓인 게 많더군요.”
“아…….”
“적절한 조언이 아니었다면 녀석이 속에 그런 응어리를 키우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을 겁니다. 아가씨의 덕입니다.”
“덕이라니요. 아닙니다. 그저…그럴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그럴 것 같아서?”
보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엘리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그게 무슨…아!”
순간 보리스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 역시 실비아와, 자신들과 같은 경험이 있다. 이쪽이 모친을 잃었다면, 저쪽은 부친을 잃지 않았나. 부모를 잃은 상실감을 느껴보았고, 또 같은 여인이다 보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실비아의 심리를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군.’
같은 경험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같다고 하기는 조금 어폐가 있지만, 어쨌거나 똑같이 부모 중 한 사람을 잃은 경험을 했으니, 공통점이 있는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보리스는 눈앞의 여인이 달라 보였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가 조금 더 눈에 들어왔다.
“허면, 공자님께서도 곧 떠나시겠군요.”
“예. 그렇겠지요.”
짤막한 대답.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보리스는 속이 답답하게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입 안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말랐다.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다음 휴가 때 다시 뵙겠다고 할까? 한동안 보지 못할 테니 아쉽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젠장.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부하 놈들이 보면 분명 비웃을 것이다. 기분이 좀 좋아졌다 하면, 술이 좀 들어갔다 하면 여자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놓던 놈들이니까. 그놈들이 지금의 자신을 보았다면 아주 그냥 폭소를 했으리라.
“다시…뵐 수 있겠습니까?”
“예?”
당황한 얼굴. 순간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 보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휴가를 나온다면, 그때도 아가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건……”
“자밀 그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잊으십시오. 저는 다른 것보다 아가씨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만약 아가씨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보리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화색이 떠올랐다. 엘리야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공자님은 정말 다르군요.”
“예?”
“다른 귀족가의 공자들과는 달라요. 아…제 말은 그러니까.”
엘리야는 말을 한 직후에 실수했음을 깨닫고 말을 얼버무렸다. 전혀 의도치 않게, 그녀는 보리스에게 무례를 범했다. 적포장군 군터는 황자의 총신이며, 군부의 실세 중 한 명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귀족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아들인 보리스 역시 귀족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에서 다른 귀족가의 공자들과는 다르다고 했으니, 이는 어얼핏 신분을 가지고 그를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다. 어렸을 때부터 말조심 하는 법에 대해 뼈에 새기도록 교육을 받아온 그녀이기에, 항상 말을 입 밖에 내기 전에 두어 번은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방금은 말도 안 되는,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해버렸다.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호들갑을 떨어내는 순진한 사내 때문에.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음…제가 좀 투박하기는 하지요. 아무래도 칼 밥을 먹다 보니…아, 그게 아니라 군문에 몸을 담고 있다 보니……”
조금도 꾸미지 않은, 투박하기 짝이 없는 말씨. 그러나 어렵게 내뱉은 그런 한 마디 한 마디가 인상적이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가슴에 담긴 진심이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타고난 신분, 타고난 미모 덕분에 일찍부터 누구에게나 호감 이상의 감정을 받아온 엘리야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사내들의 뜨거운 눈빛이야 별 색다를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정직하게 들이대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예의는 있는데 섬세하지 못해.’
그렇다고 그게 나쁘거나, 마음에 들지 않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어차피 가문을 이끄는 오라비에게서 직접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언질까지 들은 마당이고, 모친 또한 비슷한 식으로 말을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귀족 가문이 될 것이 확실하고, 전쟁이 이어지는 한 지금보다 더한 위상을 지니게 될 확률이 크다. 그런 장군가의 독자라면, 쇠락한 가문의 영애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남편감이다.
“공자께서는 제가 마음에 드시나요?”
“예? 아, 무…물론이지요. 엘리야 아가씨 같은 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사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느릿느릿하게 말을 꺼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통째로 쏟아내듯 말을 토한다. 거기에 붉어지는 얼굴은 덤.
숨길 수 없는 진솔함이 우스워, 엘리야는 픽 웃었다.
“저희 같은 이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 여럿 있지요. 저자에 흔히 퍼진 옛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그런 순수하고 아름다운 연애 같은 것이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의미가 없습니다. 가문과 가문의 관계만이 관건이지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기에 가문간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사이인데, 어찌 사람의 관계가 중요치 않겠습니까?”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이상, 감내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는 우슈무르 가문의 여식이고, 우슈무르 가문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인정하고 받아들인 부분이니, 불만은 없습니다.”
“…저와는 다르시군요. 아마도 지금에야 대접받고 있다지만, 태어날 때부터 고귀하게 태어난 몸은 아니라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는 물론 매사에 아버님의 뜻을 존중하겠지만, 결코 그 분의 뜻대로만 살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귀족가의 자제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패기다. 아주 가끔, 가문의 뜻을 거스르려는 자들이 있지만 그런 이들을 보면 대개는 패기가 아니라 객기다. 대개가 아니라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태어날 때부터 자라나서까지 원하는 것은 다 누리다가, 막상 권리에 따른 책무를 지라 하니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한심한 경우. 엘리야는 그런 이들을 경멸했다. 누릴 것은 다 누렸으면서도 의무는 나 몰라라 하는 꼴이라니. 그러면서 고귀한 피 운운하는 이들을 보면 웃음도,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은 달라.’
그의 말처럼 태어날 때부터 귀하게 태어나지 않아서일까. 그의 부친인 군터 장군은 본래 베이고르의 그저 그런 기사였다고 들었다. 그랬던 그가 전쟁에서 연이어 공을 세우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 아들인 보리스 역시 기사의 아들에서 장군의 아들이 된 셈이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 같은 것이 조금 덜할 수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능력도 있는 것 같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가문의 돈을 써재끼면서 그럴싸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밖에 없는 자들과는 다르다. 그는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싸웠고, 그렇게 공을 세워 인정받았다. 천부장이라는 자리는 크게 대수롭게 여길 것 없는 자리이나, 그 자리가 스스로 쟁취한 자리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더군다나 오라비의 말에 따르면, 이번의 전쟁에서는 제1공이라 할 만한 대공을 세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자그마치 그 ‘티브리악’가문의 가주가 직접 가문의 보검을 하사했다고도 하고.
“공자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허나 저와 같은 여인들은 감상적인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몸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허면 여쭙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저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가문은 제쳐두고, 한 명의 여인으로서 저라는 사내를 어찌 생각하시는지를 여쭙고 있는 겁니다.”
야심이 있고, 능력이 있다. 거기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까지 갖췄다. 외모도…그럭저럭 사내답게 생겼고.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흥미가 생기는 사내다.
“…저는.”
엘리야가 차분히 운을 뗐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