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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57화 (557/1,064)

557화

“어째서 낫지 않지?”

“그, 그것이…….”

의사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무심한 한 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그의 등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어째서일까.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말을 하는 것은 고역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할수록 그에게 돌아오는 물음이 더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쇳덩이가 점점 쌓이는 것 같았다.

“감기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처방한 약을 복용했고, 몸조리도 하라는 대로 다 했네. 그런데 내 아내의 상태는 낫는 것은 고사하고, 점점 더 안 좋아지기만 하는군.”

노골적인 힐난. 이름 난 귀족 가문들도 앞 다투어 청하는 의사가 바로 그다. 그런 그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겠는가.

화가 나야 마땅하나, 지금 그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두려움에 떨 뿐.

왜일까. 마치 목 앞에 칼날이 닿은 것 같은, 아니 이미 조금 목을 파고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털썩!

그는 결국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송구합니다 장군. 허나 수십, 수백 번 부인의 병세를 살폈음에도…소인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부인께서 어찌…….”

“그런 답을 바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의사로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습니다.”

“실망스러운 대답이군.”

“송구…합니다.”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이제껏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지금, 그는 수치를 무릅쓰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어려운 고백을 하고나니 그를 뭉개버릴 것 같았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목에 닿을 칼날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그대는 테리브란에서 솜씨 좋기로 이름난 의사다. 그렇지 않은가?”

“…….”

“그런 그대가 영문을 알 수 없다 하면, 내 아내의 병은 누가 고칠 수 있나?”

내용은 답답함을 토로하는 투였으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일부러 그러기도 쉽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그는 문득 어쩌면 이 무시무시한 장군이 아내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니. 잠깐.’

처음엔 가벼운 의심이었지만, 곧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황자의 총애를 받는 신임 적포장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라는 것들은 맨손으로 성인 남성의 머리를 감자처럼 으깨버릴 수 있다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주 가끔 그의 개인사에 대한 것도 들려오곤 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의 부인이 변변찮은 평민 출신의 여인이라는 것도 있었다.

‘평민 출신 아내. 아무리 후계자를 낳았다지만, 역시 걸림돌일 수밖에 없지.’

높으신 분들에게 가문간의 정략혼으로 맺어지는 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이름 있는 귀족 가문들을 들락거리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나이가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 것도 아니야. 거기에 20대 못지않게 힘이 있으니…새로 부인을 맞는다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보다 더 나이가 많고, 오늘내일 하는 늙은이들도 젊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물론 그런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 않지만, 그런 사례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

그에 비하면 이제 마흔을 넘긴, 20대의 젊은이들보다 기력이 더 좋아 보이는 군부의 실세가 부인을 잃고 재혼을 한다 하면 그 누가 흉을 보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귀족 가문의 아가씨들이 신진 장군가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줄을 서지 않을까? 어쩌면 혼처가 정해진 이들조차 파기하고 줄에 끼어들지도,`

‘그래. 증세는 분명 감기지만, 이건 평범한 감기가 아니니.’

처음에는 몰랐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허나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수십 년 동안 온갖 환자들을 만나면서 모르는 병이 없다 자부하는 그다. 그런 그가 알지 못하는 병이라면 그것은 병이 아닐 확률이 높다.

저주. 혹은 독.

암살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의사가 손을 쓰기가 쉽지 않다. 독이라면 어떻게 방도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저주라면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다.

‘사제를 몇 번이나 불렀다지만…미리 입을 맞춰놨으면 시늉만 하다 돌아갔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의심이 깊어질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눈앞의 사내는 비정하게 자신의 아내를 암살하려 하면서도 태연하게 치료를 요구하는 흉악한 자였다.

더럽게 얽혔다. 병을 낫게 해도 문제고, 그러지 않아도 문제다. 물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저주인지 독인지 모를 것에 손을 쓸 방도가 없다는 것이지만.

“노력해다오. 몸에 좋다는 영약들을 여럿 마련해 두었다. 그 모두를 써도 좋고, 필요하다면 다른 것을 더 요구해도 좋다. 무슨 수를 쓰든, 내 아내를 회복시켜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심이야 어떻든지, 그는 그리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껏 숙인 머리 위로 느껴지는 두려운 시선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 * *

“어머니.”

“물러가라…병이 옮으면…어찌 하려고.”

앙상한 얼굴. 두꺼운 화장으로도 다 가리지 못한 초췌함에 가슴이 먹먹해왔다. 보리스는 연신 물러가라고 하는 어머니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의 마른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또 식사를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먹을 만큼…먹었다.”

“많이 드셔야 빨리 기운을 차리시지요.”

벨리사는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의 병세가 지금처럼 심해진 이후, 실비아는 벨리사의 방에 들어오는 것도 금지 되었다. 병이 옮을 수 있다는 벨리사의 강한 주장 때문이었다. 그나마 사내이며, 어려서부터 잔병치레 한 번 없을 정도로 강한 몸을 지닌 보리스만이 지금처럼 마른기침을 토하는 어머니와 가까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오지 말거라. 네가 건강한 것은 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그런 말씀 마세요.”

얼마 후. 힘겨워하던 벨리사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자 보리스는 소리 없이 일어났다.

“후우.”

그 길로 집을 나온 그는 우슈무르 가문으로 향했다. 그는 요 근래 하루건너하루 꼴로 우뮤수르 가문으로 가 자밀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친의 병세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으니, 우중충한 분위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런 탓에 보리스는 우슈무르 저택을 찾았다. 자밀과 술이라도 마시고 있으면 답답한 속이 그나마 나아졌다.

“어떠신가? 좀 차도는…….”

자밀의 물음에 보리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거의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시네.”

“걱정이군. 그럼 구했다는 영약들은…….”

“드시지도 못했지. 영약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약효가 강해서, 몸이 지금처럼 크게 상한 상태에서 복용했다가는 큰일을 치를 수도 있다더군.”

“그래. 나도 얼핏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네.”

“답답해. 나흘 전부터는 부친께서 신전에 요청하여 집에 사제 셋을 상주시키고 있다네. 번갈아가며 어머님의 기운을 북돋고 있지. 이제는 그마저도 별 효과는 못 보고 있는 듯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있다. 그래서 더 답답한 것이다. 모친은 여전히, 그리고 점점 더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오늘은 술 대신 차나 마시는 게 어떤가.”

“차?”

보리스가 바로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자밀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속이 답답하니 술을 찾게 되는 것이야 이해하지만, 자네도 몸 관리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젊다고 되는대로 들이키다가는 나중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길 걸세.”

“하! 아직 한참 젊은 자네가 그걸 어찌 아나.”

“선친께서 종종 하시던 말이니까.”

“음.”

“버릇을 들이면 술이나 차나 별 다를 것 없다더군.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 술에 기대듯 차에도 기댈 수 있으면 마음의 짐도 덜어지겠지.”

“알았네. 알았어. 오늘은 차나 마시고 가지. 거 참 잔소리는.”

“잘 생각했네. 엘리야도 부를까?”

“으응? 아가씨는 왜?”

살짝 뚱해 있던 보리스가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에 자밀이 피식 웃었다.

‘순진하기는.’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되니, 누가 봐도 속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자밀은 그런 친우의 반응이 웃기면서도 흡족했다. 어쩌면 매제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쪽에서 순진하다는 것은 제법 긍정적이다.

“왜? 싫은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녀석이 차를 좋아하네. 그리고 술과 달리, 차는 마시면서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어. 우리끼리 마주앉아 그게 그거인 이야기나 줄줄이 늘어놓느니, 녀석이라도 있으면 할 이야기가 다양해지지 않겠나.”

“음. 그건 그렇지.”

“하지만 자네가 원치 않는다면…….”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럼? 자네가 결정하게.”

“…….”

보리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한 것을 본 자밀은 보리스가 눈치 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대놓고 놀렸나?’

표정 관리라도 조금 더 할 것을, 보리스의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실수하고 말았다.

“날 놀리는 거로군.”

“조금? 음. 말이 나왔으니 묻지. 자네, 내 동생에게 관심 있나?”

“…….”

더 없이 직설적인 한 마디에 보리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엘리야도 이제 슬슬 혼처를 알아봐야 하는 나이가 됐고, 그동안 내가 쭉 지켜봐 온 자네라면…동생을 맡겨도 될 것 같아. 가문 대 가문으로 놓고 봐도 역시 부족함이 없고.”

“나, 나는.”

“자네가 마음이 있다면 내가 앞으로 종종 자리를 마련해주겠네. 자네가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좋겠지.”

“으음.”

보리스는 신음인지 뭔지 모를 소리만 간간이 낼 뿐,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은 여전히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기가 시기라, 적절하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 다만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한 것일세.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말했듯, 어디까지나 서로에 대해 알아 가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니.”

“…….”

“그래서, 자네 생각은?”

“나야…좋지만.”

모친이 중병을 앓고 있는 와중에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보리스는 그의 감정에 솔직해졌다.

사실, 보리스는 요 근래 들어 지쳐 있었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심적으로.

매일 누군가를 걱정하고, 신경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친의 기침 소리가 커질 때마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그의 시름 역시 덩달아 깊어졌다.

그는 점점 지치고, 메말라갔다.

그런 와중에,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든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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