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휴가를 나오면 기분이 좋아야 하건만, 보리스는 요즘 마음이 무거웠다. 상쾌하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려 해도, 아침 가족 식사를 한 번 하고 나면 상쾌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근심이 많은 모양이군. 부인께서 아직도 편찮으신가?”
본래 예정되었던 것보다 휴가가 길어지면서, 보리스는 테리브란에서 자밀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래. 조금 나아지셨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기침이 심해지셨네.”
“의사가 문제 있는 것 아닌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차라리 그 의사가 돌팔이면 좋겠지만, 다른 가문들에서 데려가지 못해 난리인 자라네.”
“으음.”
자밀이 입을 다물었다.
보리스는 말을 아끼는 친우에게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원래부터 몸이 약한 분이기는 하셨지. 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심해.”
“사제는?”
“이미 몇 번이나 왔다 갔네. 아버지께서는 하루에 세 번을 불러도 좋다고 하셨지만, 어머니께서 거절하신 탓에…….”
“흐음. 부담이 되셔서일까.”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군터 장군의 부인이 평민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자밀이었다. 사제를 부르는 것이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니니 평민 출신인 장군 부인이 부담스러워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민감한 말일 수도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한 마디가 장군 부인의 출신성분과 연관지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보리스와 자밀은 바깥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말도 대수롭지 않게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서로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께 염려를 끼쳐드리기를 원치 않으시는 거겠지.”
“흐음. 금슬이 나빠도 문제지만, 좋아도 문제군.”
“쯧.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지. 마시러 가기로 하지 않았나?”
“아아. 그렇지. 으음.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는 것이 어떤가?”
자밀의 말에 보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우슈무르 저택으로 말인가?”
“그래. 정식으로 초대하는 걸세. 어머니께서도 자네를 한 번 보기를 원하시고.”
“조금 부담스러운데.”
보리스가 조금 껄끄러운 기색을 비추자 자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부담스러울 것이 뭐가 있나? 아, 혹시 진탕 마실 생각이었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가세. 그래. 마침 잘 됐군. 내가 전에 동생을 보여주겠다 했었지? 오늘 가서 보면 되겠구만.”
“흐음.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빼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그런데 이렇게 되면 부인께 드릴 선물이라도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닌가?”
“별 걸 다 신경 쓰는군. 정식으로 초대한다고 해서 그런가? 괜한 부담 갖지 말게.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오게나. 그 편이 더 좋아.”
“그렇다면야…….”
우슈무르 저택은 테리브란의 귀족 가문들이 몰려 있는, 일명 ‘귀족 가(街)’라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한때 위장의 가문이었던 것치고는 검소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또 초라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서오시오 보리스 공자. 우뮤수르 가문에 온 것을 환영하오.”
보리스는 곧장 우슈무르 부인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보며 자애로운 얼굴로 웃음 짓는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나는 잘 지냈습니다. 일전에 장군 댁에서 잠깐 본 뒤로 처음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간 북쪽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군터 장군께서 자랑스러워하시겠군요.”
“부친께서 보시기에는 늘 부족합니다.”
“그럴 리가. 내색은 안 하셔도 내심으로는 자랑스러워하실 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무의식중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웃음을 어찌 받아들인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더 너그러워졌다.
“젊은이들이 즐겨야 하는 시간을 나이 먹은 여인이 빼앗아서는 안 되겠지. 별채에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가서 마음껏 즐기시구려.”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처럼 별채로 가니 이미 자리가 다 준비 되어 있었다. 귀한 술들과 맛 좋은 음식들이 큰 상 위에 가득했다.
“과분한 호사로군.”
“귀빈 아닌가. 주방장이 간만에 솜씨 좀 부렸다더군.”
“고마운 이야기로군.”
“흠. 그나저나 동생은 잠깐 밖에 나간 모양이야. 곧 돌아오겠지. 하인에게 일러 돌아오면 이곳으로 오라 전하라고 했네.”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내가 자랑하고 싶어서 그렇다네. 내 동생이지만 정말 괜찮은 녀석이거든.”
“그 드물다는 우애 좋은 남매인가?”
“그렇지. 선친께서 늘 형제간에 화목하라고 당부하셨거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주시기도 했고.”
그건 정말 대단한 업적이다. 어쩌면 장군으로서 어려운 전투를 이겨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보리스 자신만 해도 동생과 어렸을 때는 사이가 좋았지만, 근래 들어 점점 사이가 서먹해지고 있는 상황이기에 성년이 된 후에도 이렇게 우애를 유지하는 우슈무르 남매가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없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군.”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면서 보리스의 목소리가 점점 가벼워졌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느슨해지니 절로 주변에 시선이 갔다.
별채 주변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근사한 나무들이 장식처럼 서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어서, 술맛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지? 꽤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는 곳이라네.”
“그런 것 같군. 딱 봐도 티가 나. 정말 귀빈 대접 제대로 받는구만 그래.”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내 손님이니까, 우리 가문의 손님인 셈이지.”
“흐흐. 가주라 이건가.”
“과분한 짐이지.”
자밀의 웃음이 썩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일지, 보리스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없이, 자밀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가주님.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말씀을 전했고, 곧장 이곳으로 온다고 합니다.”
술이 한창 들어가고 있을 때, 나이 먹은 하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자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통 사람보다 청력이 좋은 보리스였기에 그 작은 목소리도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엘리야가 돌아왔군. 곧장 이곳으로 온다고 하네.”
“음. 너무 실례가 아닌가?”
하도 동생 자랑을 해대는 자밀이었기에, 보리스는 반 장난 식으로 얼마나 잘났는지 봐주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만난다고 하니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은 둘째 치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찾으셨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자밀의 동생, 엘리야 우슈무르를 본 순간 그런 생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미인이군.’
처음 그녀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자밀이 가슴을 치며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말 아름다웠다. 적어도 지금껏 보리스가 봤던 그 어떤 여인보다도 미인이었다. 또한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뭐라 표현 못할 분위기가 있었다. 기품이라고 해야 할까? 목소리, 몸짓 하나에서까지 풍겨 나오는 뭔지 모를 독특한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특별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보리스 공자님이시지요? 오라버니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저 또한 자밀로부터 아가씨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동생 분이 미인이라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기에 허풍이라고 여겼는데…아니었군요. 들은 것 이상입니다.”
돌리거나 꾸미는 것 없이, 그야말로 저돌적일 만큼 직선적인 말. 그 투박한 화법에 당황했는지, 엘리야 우슈무르가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말을 멈췄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러면 또 모양새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어찌 해야 할지 모르던 차에.
“늘 느끼지만, 자네는 너무 솔직해. 마음에 있는 말을 입 밖에 그대로 꺼낸단 말이지. 난 자네의 그런 솔직함이 좋지만, 어떤 이들은 자네의 솔직함에 당황할 수도 있네.”
자밀이 솜씨 좋게 끼어들었다. 보리스는 그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멋쩍게 웃었다.
“고맙네. 사실 실수한 것은 아닌가 싶어 당황하던 중이었네.”
“그래. 그런 것 같았네.”
“당황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급스러운 말을 쓸 일이 없어서, 그런 쪽으로는 많이 서툽니다.”
“아닙니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잠깐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풀어지자 자밀이 웃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기왕에 온 거, 조금 앉아 있다 가려무나. 내 이 친구에게 네 자랑을 잔뜩 했었다. 그동안 내 말을 믿지 않고 놀려댄 것을 네가 대신 복수해주었으면 좋겠다.”
“복수는 무슨……. 쯧! 그래. 의심했던 것은 미안하네, 미안해. 설마 자네에게 이런 동생 분이 있을 줄을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남매가 닮지 않았다는 소리는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었답니다.”
처음 한 번 당황한 이후, 엘리야 우슈무르는 유쾌하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녀는 때때로 오라비를 놀리기도 하는 둥, 꽤 짓궂은 대화에도 거침없이 참여했다. 귀족 아가씨다운 고귀함에 평민 같은 털털함까지 갖춘 그녀가 보리스는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정말 매력적인 여인이야.’
아쉽지만, 그녀는 오래 자리에 함께하지는 않았다. 결혼 적령기의 귀족 아가씨가 외간 사내와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의 가문 내에서라고 해도. 그것도 술자리라면 더더욱.
엘리야 우슈무르가 자리를 떠난 뒤, 보리스는 자밀과 그의 여동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네가 그렇게 자랑할 만하군.”
“그렇지? 내 뭐랬나.”
“그래, 그래. 미안하다고 했지 않나. 설마 저렇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아가씨가 자네 동생일 줄이야.”
“지금 그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비꼬는 건가?”
“자네가 그렇게 들었다면 그런 거겠지.”
“말솜씨가 제법인데? 안 좋은 쪽으로 제법이야.”
“하하. 내 삶의 반 이상을 거친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보냈네. 내가 뭘 보고 배웠겠나?”
시원한 웃음과 함께 술이 또 한 순배 돌았다.
“엘리야 우슈무르인가. 이름도 아름답군.”
의미 없이 중얼거린 말 한 마디. 그 한 마디를 들은 자밀이 묘한 눈으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흐음……. 자네, 내 동생에게 반하기라도 한 건가?”
“으응? 반해? 내가?”
“아닌가? 아까부터 동생 이야기를 하면서 자네 표정이……. 오해였다면 할 말 없지만.”
보리스는 잠깐 고민했다. 그냥 놀리는 투가 아니었다. 바라보는 눈에 장난기가 엿보이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여기서 진지하게 답한다면 자밀이 어찌 나올까?
‘어쩌면.’
술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보리스는 자신의 감정에 그 어느때보다 더 솔직해졌다. 그리고 용감해졌다. 아니, 무모하리만큼 과감해졌다.
“그런 것 같네.”
보리스의 진지한 목소리에, 자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