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황자의 면전에서는 별 반응 없이 그저 그러겠노라 답했지만, 사실 황자의 말은 군터에게 그리 와 닿지 않았다.
신에게 먹힌다느니,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느니…….
‘쿠엘단의 말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늦출 수는 있어도 결코 멈출 수는 없을 거라고 했다. 결국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인간이라는 건 뭔가. 나는 나일뿐인데.’
지금도 반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가? 군터는 군터다. 자신은 자신일 뿐. 인간이든 아니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감정을 잃어간다는 것은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그게 그리 큰 문제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지금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살아가고 있으니.
‘쿠엘단은 멈출 수 없다 하고, 황자는 가능할 수도 있다 하는군.’
황자는 진심이다. 그가 군주와 같은, 신에게 먹힌 자들에게 보이는 증오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인즉, 자신이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일찍이 했던 말을 지킬 거라는 것.
‘일단은 따르는 수밖에 없는 건가.’
황도에 방도가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하지만 아닐 경우에는…….
그럴 경우에 대해서는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먼 이야기니까. 하지만 아마 결국에는,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 * *
군터는 쿠엘단, 그리고 황자와 나눈 대화를 모페이브에게만 털어놓았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이자, 지식적으로도 믿을만한 조언자인 그이기에.
“그렇습니까…….”
군터의 말이 끝나자, 그는 말끝을 흐리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그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입을 뗐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장군께 무슨 조언을 해드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는 쿠엘단은 물론이고, 황자 전하보다도 아는 바가 적습니다. 신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와 군주들이 얽힌 비사까지 들어가면…감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예?”
“황도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비밀이 황자가 원하던 것일지 아닐지, 그래서 내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가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
“…….”
“내가 생각하는 건…내가 그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우려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다.”
“장군께서는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나는 나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쿠엘단의 말이 몇 번이나 머리에 맴돌았다. 황자는 자신의 변화를 극도로 경계했지만, 쿠엘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마도 그것은 쿠엘단 자신이 까마득히 일찍이 그런 변화를 겪은 장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모르겠군.”
그의 입장에서는 황자의 우려보다는 쿠엘단의 덤덤함이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솔직히, 믿음이 가는 것도 쿠엘단 쪽이다. 비록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군터는 쿠엘단이 어딘가 비틀리거나 잘못된 자라는 인상을 받지 않았다.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면모는 충분히 보았지만…그게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황자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초월자였던 선대 황제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자인 듯했지만, 그것만으로 황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고, 장군과 같은 경우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모르니까 말할 수 없다, 이건가.”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말씀을 드린다면, 황자의 의중이 뚜렷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만일의 경우에 대비를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렇겠지.”
허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해온 일이다. 세력을 늘리고, 황자도 함부로 어쩌지 못할 권력을 쥐는 것.
“주제넘게 말씀 올리자면, 지금까지보다 더 본격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티브리악 가문과도 연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옳은 말이다.”
이제 티브리악은 우군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들과의 우호를 전면에 드러낸다면 안 좋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늘 것이고, 어쩌면 적도 생길지 모르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티브리악은 든든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그 자체로 황자와 의견을 부딪칠 수 있는 권세가니까.
“야스메티 공에게 조언을 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필시 기뻐할 것입니까.”
“그래. 그럴 테지.”
야스메티는 이전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세를 불릴 것을 주장했었다. 군터는 그의 조언에 귀를 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부분적인 승낙이라고 할까.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조금은 미적지근한 태도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다소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던 황자의 협박은 이제 보다 구체적인 위협이 되었다. 만약 그가 황도에서 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어찌 될 것인가. 얌전히 목을 내놓고 그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내 목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거기에 그의 목만 걸린 것도 아니다. 벨리사와 보리스, 실비아의 목숨도 덩달아 걸려 있으니, 가만히 앉아 황도에 황자가 원하는 비밀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가는 길에 야스메티를 불러주게.”
“예.”
모페이브가 물러가고 잠시 후. 야스메티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 약간의 주향이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이 상기된 것은 술 때문이 아니었다.
“장군. 이번에는 드디어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은근한 말투는 이전의 그가 미적지근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군터는 굳이 그의 뾰족함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권력을 가지고자 한다.”
“백 번 천 번 옳으신 결단이십니다. 장군께서는 이미 군부에서 적잖은 명망을 지니고 계십니다. 은퇴한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을 제외하면 군부에서 장군보다 높은 위상을 지닌 이는 두 명의 흑포장군 뿐. 그러나 그마저도 큰 차이는 아니지요.”
지위만으로 따지면 군터 이상인 이들은 꽤 있다. 흑포만 둘에, 적포까지 합하면 여덟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상만을 놓고 보면 군터는 아무리 넉넉하게 헤아려도 한 손 안에 들었다. 그것은 군터가 매 전쟁, 매 전투마다 항상 최전선에서 직접 몸에 피를 묻히며 활약한 덕이었다. 그와 함께한 병사들은 예외 없이 그의 용맹을 칭송했고, 그들로부터 퍼져나간 무용담은 세인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렇게 한 번 입소문이 퍼지게 되면 망명자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출신성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명성은 곧 힘이다. 힘은 곧 권력이다. 그러나 힘이라는 것은 그저 가지고만 있으면 의미가 없다. 힘을 써서, 힘이 있음을 세상이 알게 해주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세를 불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혼맹입니다.”
야스메티가 은근한 투로 말했다. 그의 말은 설명임과 동시에 권유였다.
“그 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그에게 첩을 들이라는 것은 아닐 테니, 야스메티가 말하는 ‘혼맹’의 당사자는 보리스 아니면 실비아일 터. 그러나 군터는 그의 자식들에게 약속했다. 적어도 원치 않는 사람을 배우자로 맞지는 않을 것이라고.
“상황이 달라졌으니, 장군의 마음 역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여 말씀 올렸습니다. 허나 아직 마음이 변치 않으신 모양이군요.”
“앞으로도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시는 이 건에 대해 말씀 올리지 않겠습니다.”
야스메티는 순순히 물러났다. 군터는 가벼이 말을 뱉는 법이 없었고, 야스메티는 항상 그런 군터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들 사이에는 그런 존중과 신뢰가 있었다.
“티브리악 가문과의 연수는 조금 더 신중을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의 힘은 강성하지만, 그들의 적들 역시 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과의 우호를 드러내는 순간 그 적들로부터 경계심을 사게 될 터. 그리고…….”
“또 무엇이냐.”
“무엇보다, 장군께서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됩니다. 통상적인 거래와 마찬가지로, 아쉬운 쪽이 먼저 손을 내미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쉬움을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약점을 보이는 것과 같다. 대등한 관계는 서로 아쉬움이 없거나, 또는 서로 아쉬움이 있어야 하는 법. 야스메티는 그 점을 짚고 있었다.
“그들과의 우호는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좋습니다. 머지않아 기회가 오겠지요. 유게르 티브리악이 장군께 가진 호의가 진심이든 아니든 간에, 그가 장군께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야스메티는 조만간 연회를 열라고 했다. 그 연회를 통해서 그에게 줄을 댄 군관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그들의 결속을 강화시키라는 것이다. 또한.
“연회에 오는 이들의 면면이 화려할수록, 그 수가 많을수록 대외적으로 장군의 세를 과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선언이 되겠지요.”
“선언?”
“장군께서 힘을 가지고 계시고, 언제든 그 힘을 쓸 발휘할 수 있다는 선언 말입니다.”
* * *
“콜록콜록!”
“부인. 괜찮으세요?”
루시가 벌떡 일어나 벨리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벨리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 손은 내저어 더 다가오려는 루시를 물렸다.
“괜찮다. 아직 감기가 다 떨어지지 않았어.”
“이런 말씀드리기는 그렇지만, 처방을 내린 의사가 의심스럽습니다. 정말 실력 있는 의사가 맞는지요? 어떻게 보름 넘게 감기 하나 못 다스려서…….”
“내 몸이 약하기 때문이지 의사가 무슨 잘못이겠느냐.”
“하지만…….”
“괜찮다. 많이 좋아졌어.”
나아진 것이 이 정도란 말인가. 얼굴은 반쪽이 됐고, 안색은 초췌하다. 누가 봐도 중병이 걸린 사람 같은데, 이게 단순한 감기 때문이라니.
“그보다…이 스피르 가루 말이다. 괜찮구나. 잡티를 찾아볼 수가 없어.”
“예. 한 번 바르면 물에 젖기 전까지는 떨어지지도 않고, 이질감도 없어서 황도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품귀 현상이 일어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 그럴 만하다.”
벨리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감기에 시달리던 내내,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 때문에 거울을 멀리했던 그녀다.
하지만 오늘 루시가 가져온 스피르 가루를 써보니, 그럭저럭 봐줄 만한 얼굴이 되었다.
“더 구해올 수 있겠느냐?”
“그럼요. 얼마든지 구해오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콜록콜록!”
꽤 멎었다고 생각했던 기침이 다시 잦아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