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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54화 (554/1,064)

554화

테리브란으로 돌아온 군터는 곧바로 황자와 독대했다.

“그렇군.”

군터의 이야기를 다 듣고서, 황자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애당초 그자들은 아국에 충성하는 자들이 아니니까. 그래.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 억지로 지은 것이 분명한 웃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다. 이 당당한 황자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두려워해? 내가?”

황자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눈빛 역시 사납게 변했다.

“아닙니까?”

“…아니. 맞다. 네 말이 맞아.”

언제 날카롭게 반응했냐는 듯, 그는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 두렵지 않겠느냐. 상대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분노를 삼키며 살아온 괴물이다.”

“그 상대라는 자가 누구입니까.”

“키리스트.”

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고, 군터 역시 아는 이름이었다.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유명한 이름 아닌가.

“제국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자가 아닙니까.”

“수호자? 세간에는 그리 알려져 있지. 실제로 그런 일을 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어째서.”

“그때는 목줄이 채워져 있었고, 지금은 아니니까.”

“선황 폐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대 황제는 그만의 비술로써 군주들을 다스렸다. 군주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지. 그러나 황제가 죽은 지금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이가 사라졌으니, 또 누가 있어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겠나.”

“쿠엘단은 제국에 대해 별 애정이 없어 보이더군요. 그 역시 그러합니까?”

“애정이 없어? 하하. 그런 수준이라면 다행이지.”

“그 이상이란 겁니까.”

“아마 그럴 것이야. 그는 선대 황제를 증오했다. 그가 이룩한 제국 역시 곱게 보이지 않을 테지. 제국이 황폐화 된다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며, 지금 하는 짓을 보아하니 아예 스스로 주저앉혀버릴 생각인 것 같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비사(?史)지. 세인들은 모르고, 알아서는 안 되는 비사.”

“소장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아니. 이제 와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자네가 어디 가서 가볍게 입을 놀리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이제는 자네도 들어둬야 할 이야기인 것 같고.”

잠시 뜸을 들인 황자가 긴 한숨과 함께 입을 뗐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야. 내 아버지. 선대 황제는 소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소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당시 수도 없이 난립했던, 흔해빠진 도시 국가에 지나지 않았어.”

그 도시 국가의 이름이 카라누르였다. 그리고 선대 황제는 그런 곳의 왕자로 태어났다. 심지어 그는 장자도 아니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 이미 성년인 형제들이 있었고, 그에게 주어진 계승권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늦둥이 왕자가 카라누르의 왕이 됐지.”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배다른 형제가 대부분이었지만, 몇몇은 같은 어미의 배에서 난 형제들이었다.

그 모두를 제거하고, 그는 왕이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원신의 사도로서 막강한 힘을 휘둘렀지. 그 힘으로 왕위를 차지했고.”

왕위에 오른 그는 곧바로 전쟁을 일으켰다. 난립해 있던 도시국가들이 거의 한 달에 하나씩 무너졌고, 카라누르에 병합되었다.

그는 폭군이라 불렸고, 전쟁의 왕이라 불렸다. 적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병사들과 백성들은 그를 추앙했다. 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는 전쟁은 카라누르의 백성들에게 있어 축제와 같았으니까.

그렇게 연이은 전쟁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던 카라누르가 처음으로 멈춰 섰다.

“키리스트는 처음으로 선대 황제와 제대로 상대했었던, 그의 첫 번째 대적자다.”

당시에는 키리스트라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결국 패배했고, 이름을 잃었다. 그의 모국과 함께.

“나라가 커지면서 인재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겠지. 선대 황제는 그를 거두었다. 계약을 맺었지.”

“계약?”

“그래. 계약. 무엇을 약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대 황제는 무언가를 대가로 키리스트에게 영원한 충성을 약속 받았다.”

영원한 충성.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황제와 군주의 계약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맺은 계약은 정말로 그 말 그대로였다.

“선대 황제와 군주. 그들은 죽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세월이 휩쓸려 늙어 죽는 일은 없다. 그들 모두 신을 품었기 때문이다. 음. 너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 군주들이 품은 신은 선대 황제가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여……?”

군터는 그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그들에게 깃든 신은 선대 황제가 집어넣은 것이다. 그는, 황제는 신을 다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괜히 원신의 사도라 불린 것이 아니야.”

놀랐다. 신을 다룬다니? 그 정도 힘을 가졌다면, 그야말로 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놀란 이상으로, 군터는 궁금해졌다.

“그 정도 힘을 가졌다면, 어째서…….”

황자가 피식 웃었다.

“어째서 죽었느냐고?”

“예.”

다른 제국인들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으리라. 그리고 불경, 신성모독 등 온갖 죄목을 대면서 그들의 목을 치려하겠지.

선대 황제는 제국민에게 있어 인간의 탈을 쓴 신이었다. 그들을 원신의 세상으로 이끌어줄 구세주이기도 했다. 비록 그가 이제 죽고 없다 하나, 그에 대한 신앙은 여전했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닌 원신에게의 귀환, 즉 승천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나도 모른다.”

군터의 물음에 대한 황자의 답은 간결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 그가 죽었다는 건…정말 믿기가 힘들었어.”

상식이라는 게 있다. 낮에는 해가, 밤에는 별과 달이 뜨는 것 같은.

그에게 있어 황제가 불멸의 존재라는 것은 앞서 말한 ‘상식’과도 같았다. 그에게 있어 황제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이해할 수 없고, 엎드려 떨 수밖에 없는 미지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믿기 어렵다고 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지. 어쨌거나 그는 죽었고, 덕분에 그가 쥐고 있던 고삐가 모조리 풀려버렸다.”

“키리스트가 제국의 몰락을 원한다면, 우리의 적은 그가 되는 겁니까.”

“두고 봐야겠지만 그리 될 확률이 높지. 허나 당장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그라면, 그리고 제국이 몰락하기를 원한다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테니까.”

아직 황좌의 주인은 정해지지 않았다. 세 명의 황자들은 하나뿐인 자리에 앉기 위해 이제까지보다 더 치열하게 다툴 터. 가만히 앉아 지켜만 보아도 제국은 상처를 입고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황도에는 비밀이 있다.”

“비밀…말입니까.”

“그래.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찍이 선대 황제가 행사했던 막강한 힘의 비밀이 황도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섯 차례 있었던 ‘의식’이 모두 황도에서 치러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겨뤘던 바라누르. 그 녀석이 무슨 재주가 있어 룬차이를 부렸겠느냐.”

황자가 패하여 죽은 그의 형제를 이야기하며 조소했다.

“언약비라는 것이 있다. 선대 황제와 군주들간의 약속을 새겨 넣은 물건이라더군. 난 그것에 군주들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추측…아니, 거의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2황자가 그 언약비라는 것을 손에 넣어 룬차이를 부렸다는.”

“그래. 그 외에는 없다. 아마 지금쯤 다들 그 언약비를 손에 넣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지. 나 역시 그러고 있고.”

군터는 쿠엘단을 떠올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기적 같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던 그는 그야말로 초월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였다.

그런 자를 휘하로 부릴 수 있다면, 야심을 가진 자들이 언약비라는 것에 목을 매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다 보니 말이 샜군. 본래 하려던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황자가 군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쿠엘단으로부터 어떤 조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단히 노력해봐야 결국 그 끝은 정해져 있다.”

“…….”

“일전에 내가 말했을 것이다. 네가 끝내 네 안의 신에게 먹힌다면, 내 직접 널 죽이겠노라고.”

“예.”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왜인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인세에 신은 백해무익하다. 난 그것을 내 아버지, 선대 황제를 보면서 분명하게 깨달았다. 인간의 세상에 신은 존재해서는 안 돼. 내게 도움이 되건 안 되건 상관없이.”

그 말을 하는 그의 기색은 어조만큼이나 단호했다.

굳은 눈길을 마주하며, 군터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 목을 치시겠습니까.”

“순순히 목을 내놓을 텐가?”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

황자의 입가에 다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아직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니,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은 것 같군. 안심해라. 죽이겠다는 말을 하려고 널 부른 것이 아니니.”

“…….”

“말했듯, 황도에는 비밀이 있다. 선대 황제가 남긴 비밀. 난 그 비밀이 그의 힘과 관련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 믿음이 틀리지 않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그 비밀이…소장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바로 그렇다. 신을 부여할 수 있다면, 반대로 빼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나?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 방도가 있을 법하지 않은가.”

무엇하나 확실한 것은 없는, 순전히 추측뿐인 말. 그러나 그럴듯한 것도 사실이었다.

“넌 쓸모가 있다. 이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너와 같은 자들의 힘이 절실하다. 난 너를 베고 싶지 않다. 그러니…….”

황자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우리는 황도로 가야 한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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