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군주 쿠엘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백 년하고도 이십여 년 전부터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소국 세르오헨 출신으로서 카라누르가 원신의 성전(聖戰)을 주창한 초기 즈음 제국에 몸을 담았다고 하지만 별로 신빙성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가 제국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여섯 군주들 중에서 가장 이른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군주 키리스트를 제외하면 가장 빨리 모습을 드러낸 자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중략…
그는 특별한 자다. 군주라는 이들이 모두 그렇지만, 그는 유독 더 특별하다. 전장에서 그를 상대했던 아국의 장군들조차도 하나같이 그리 말했다. 결코 얕볼 수 없는 술사이며, 막강한 신비의 사용자이지만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 어떤 말보다 이 한 마디가 더 어울리리라.
괴짜.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움직이지만, 때때로 이해 못할 행동을 하곤 했다. 그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너무 많지만, 하나만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콘카스텔로의 왕도를 포위했던 때의 일.
카라누르는 그들의 성전을 시작하며 단 한 번도 후환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왕족들은 방계라 하더라도 철저하게 씨를 말렸다. 여기까지 말하면 정복자가 으레 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들의 손속은 통상적인 것보다 훨씬 더 무자비했다.
…중략…
그런 와중에, 쿠엘단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던 콘카스텔로의 왕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의 이름을 걸고, 콘카스텔로의 직계 왕가 혈족들을 살려주겠노라 선언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들이 직접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권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콘카스텔로의 자랑이었던 300년 역사의 거대한 도서관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왕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도서관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콘카스텔로의 국왕은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 앞에서 천명을 하는 쿠엘단을 믿었다. 그는 자신의 일가족을 이끌고 성문 앞까지 나가 쿠엘단을 맞이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쿠엘단은 그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지켰다. 그는 콘카스텔로의 왕족들에게 술법을 걸어 그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 그의 영지로 데리고 갔다. 그 이후로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를 아는 이는 없었다.
-우슬라 익세이온 저(著). 군주 쿠엘단 中-`미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 호의였다. 군터는 그렇게 느꼈다.
처음 만난 제국의 군주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왜일까? 자신에게 흥미를 느껴서?
“궁금하겠지.”
“마음을 읽는 재주라도 있는 건가.”
“아니. 안타깝게도 그런 재주는 없다.”
쿠엘단의 얼굴은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짙은 어둠이 그의 목 위를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 시야가 점점 뚜렷해지듯 가까스로 어떤 형태를 인지할 수는 있었다.
가면.
휘몰아치는 것 같은 어둠 속에 마치 환영처럼 흐릿해 보이는 그것은 분명 가면이었다.
“보이는가보군.”
“가면인가?”
“그래. 가면 뒤에는 흉한 얼굴이 있지. 뭐, 추한 꼴을 가리려고 쓴 것은 아니야. 이 가면은 정화(淨化)의 가면이다.”
“정화?”
“그래. 내 몸뚱이에는 지독한 저주가 걸려있거든. 그래서 항시 그것을 풀어주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어.”
군주 쿠엘단은 제국 제일의 술사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술사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저주라니. 얼마나 지독하고 위험한 것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사멸하기 직전의 신이 남긴 단발마다. 네 몸에 깃들어있는 녀석 말이지.”
“역시 그랬나.”
“조금 더 잡다하게 섞이긴 한 것 같군. 어쩌면 네가 아직까지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겠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데.”
“순수한 신이었다면 금방 먹혔을 거다. 그리고 본래 그래야 할 모습으로 돌아갔겠지. 계약의 과정 없이 신과 합일한 자들의 말로는 다 그러니까.”
“계약?”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것은 아닐 거다. 편의상 그리 부를 뿐. 아무튼 용케도 지금까지 버텼군. 너와 같은 경우는 흔치 않아.”
“흔치 않다는 건, 나와 같은 경우가 없지는 않다는 뜻이군.”
“글쎄. 나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방금.”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정말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있었다고 할 수도 없지만.”
“…….”
쿠엘단이 시선을 돌렸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았다.
“보이나? 이 무수한 빛들. 이것들은 환상이지만 환상이 아니야. 실재하는 별들이지.”
“별?”
“이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거대한 세상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그 이상일지도 몰라.”
“터무니없군.”
“물론이지. 미지는 때때로 터무니없어. 그렇기에 흥미롭지.”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자가 광인(狂人)인줄은 몰랐는데.”
“세상의 모든 걸 알고 있어?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광인이겠지. 난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알 뿐이야. 맛있는 것을 골라먹는 미식가와 같지.”
풍경이 변했다. 무수한 별들이 뜬 밤하늘이 사라지고,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 찬 도서관이 나타났다.
“내가 네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네가 내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고, 둘째는…음. 미련이라고 해두지.”
“미련?”
“다 털어버리고 가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한 명쯤은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말이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 앞에 서서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황제가 죽고, 세상은 변했다. 지금도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터. 하나의 장이 끝난 거다. 허나 그 또한 역사. 아무리 초월자인척, 지배자인척 해봐야 흐름 속의 일부. 물결이 일면 쓸려갈 뿐.”
쿠엘단이 책을 펼쳤을 때, 군터는 환상을 보았다.
장구한 역사. 투쟁의 역사였다. 피골이 상접한 촌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일어섰고, 거대한 불길이 도시를 휩쓸었다. 군대가 진군했으며, 무수한 생명이 군홧발에 짓밟혔다.
전쟁. 또 전쟁.
정복. 또 정복.
그는 제국이란 마차를 이끄는 여섯 마리 말들 중 하나였다. 백성들에게는 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신이라는 것이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여야 한다면, 그는 그 조건에 부합했다. 심지어 진짜 신을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뭘 원하나?”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
“인간이고 싶은가?”
환상이 사라졌다. 도서관도 사라졌다. 다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나타났다.
실제가 아니라지만, 하늘 위에 서 있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발아래로는 끝도 없는 심연만이 펼쳐져 있었다.
“나이가 몇이지?”
“그게 중요한가?”
“가족이 있나? 부모? 아내? 자식?”
군터는 쿠엘단이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가짜 하늘과 별의 바다를 보고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다시 묻지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그것들은 인간이 갖는 미련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거든.”
“미련?”
“굳이 인간으로 남을 필요가 무엇인가. 생각해본 적 있나?”
“인간이 인간이고 싶은 것이 문제인가?”
“그게 네 본심인가?”
“…….”
본심? 군터는 잠시 멈칫했다.
“문제라고 한 적은 없다. 물었을 뿐이지. 인간이 아니게 된다고 해서 크게 변하는 것이 있나? 알고 있겠지만, 지금의 너도 온전히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알고 있다.”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반쯤은.”
“그래. 반쯤은 괴물이 된 소감이 어떤가?”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대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인가. 시각을 바꾸면 필요하다 여겼던 것들이 어느새 굴레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
군터는 처음 쿠엘단을 봤을 때부터 느꼈던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쿠엘단은 자신과 달랐다. 완전한 괴물과 반쯤 괴물이라는 차이 외에도, 쿠엘단은 괴물이 되는 것에 대해 조금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지 몰라. 하지만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연히 받아들이게 될 테지만…그렇다고 지금 네가 하는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은 또 아니니.”
그는 ‘시간이 지나면’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뚜렷했던 목소리는 점점 더 흐릿해지고, 그의 목 위에 머물던 어둠은 아래로 떨어지는 물처럼 점점 더 그를 뒤덮어갔다.
“생각의 틀을 바꿔라. 괴물이 된다는 건, 전락이 아니다. 더 거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기둥이요, 법칙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로 나누어 말할 수는 없다.”
“…….”
쿠엘단의 몸이 떠올랐다. 환상인가 싶었지만, 이내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환상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신기루 같은 탑에 들어왔을 때부터 상식을 기대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술사라 불리는 자가 아닌가. 그런 자인만큼, 설령 그가 기적 같은 일들을 행한다 해도 그러려니 해야 할 것이다.
“아직 네게 남아있는 것들을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져라. 멈출 수는 없어도 늦출 수는 있을 테니.”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다.”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앞서 경험한 자의 조언은 의미 없지 않다. 그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 테지만.
“7황자는…….”
이제 사적인 볼일이 끝났으니, 공무를 논할 차례.
“당신이 아바시스의 병력을 멈춰주기를 원한다.”
“이상하군. 그럴 리 없을 텐데.”
“무슨 말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나서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 테니까.”
“당신은 제국의 군주가 아닌가.”
“원해서 짊어진 짐이 아니거든. 이제는 그 짐을 강요하는 자도 없고. 이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좇는다.”
“그렇다면 조언을 구하지. 황자는 아말로페 트라소프가 아비시스에게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사실이겠지.”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더군. 그는 아말로페 트라소프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 했다.”
“역시 명석하군.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재지가 있었지. 그 자의 본질 역시 일찍이 알아봤을 터.”
“그 자?”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전해라.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도.”
더 물어도 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어둠은 쿠엘단을 전부 집어삼켰다. 그는 이제 밤하늘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 * *
파시 리즈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알아야 하나?”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명받은 대로, 전할 말을 전했네.”
“아…예.”
군터는 그의 서늘한 말에 의기소침해진 파시 리즈레는 쳐다보지도 않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닿은 탑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우중충해 보였다.
‘하늘이…….’
그런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탑에서부터 퍼져나간 거뭇한 무언가가 하늘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