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화
황자의 명이 떨어졌다. 거기에 사안이 사안인 만큼, 군터는 가족들과 측근들에게 알리고서 즉각 테리브란을 떠났다.
호위 병력은 오백. 장군이 움직이는 것치고 단출한 인원이었지만 전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명목상 사절로 가는 것이니 오백이면 그럭저럭 적절한 수준이었다.
“장군. 헤이모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의 보좌로 따라붙은 관리다. 이름은 파시 리즈레. 대대로 관료직을 역임해 온 가문의 차남이다. 차남이라고는 하지만 젊은 나이는 아니다. 리즈레 가주는 70이 넘은 고령이었고, 차남인 파시 리즈레 역시 50대의 중년인이었다. 본인 말로 성년이 됐을 때부터 관직에 종사했다고 하니 그 관록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바로 그 관록 덕분에 그는 이번에 군터의 보좌로 일하게 되었다. 헤이모라에 도착해서도 그렇겠지만, 그 전에도 그는 군터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주었다.
“아니.”
군터가 아는 것은 헤이모라가 군주 쿠엘단의 영지이며, 판니른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도시 정도입니다. 헤이모라로 지정되어 있는 땅은 그보다 훨씬 크지만, 실상 의미 없는 구분이지요.”
승하한 선황제는 군주들에게 그들이 다스릴 수 있는 땅과 백성들을 하사했다. 주에 비하면 작지만, 어지간한 도시에 비할 바 아닌 거대한 땅과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베이고르의 영주들과 같았다. 타국에서는 제국의 군주들을 가리켜 제국의 영주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제국 내, 황제가 아닌 이들 중에 직접 백성들에게 세를 거둘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군주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권한을 가지고서도 군주들은 자신들의 영지 관리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개중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고 방치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대부분이 그랬다. 아예 처음부터 무관심했느냐, 시간이 흐르며 무관심해졌느냐의 차이일 뿐.
통치자가 다스리지를 않으니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의 삶이 망가질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때때로 무치(無治)는 최고의 통치이기도 했다. 군주는 그들의 백성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땅에 사는 그들을 내치지도 않았다. 감히 군주의 영지에 악의를 품고 들어오려는 자는 없었으니, 자연히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군주의 영지에 함부로 들어가서 살려는 자들은 없지만, 동시에 어쩌면 제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을 떠나려는 이들도 없었다. 본래 영지민이었던 이들은 그들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 쭉 눌러 앉아 살았다.
“허나 오직 하나. 예외인 곳이 있지요.”
“헤이모라인가.”
“그렇습니다.”
“어째서지?”
쿠엘단에 들은 이야기는 몇 가지 있었지만, 그 중 그가 가혹한 성정을 지녔다는 내용은 없었다.
“군주 전하들은 물론 제국 신민들에게 있어 늘 경외와 신비의 대상이지만, 쿠엘단 전하 같은 경우는 특히 더합니다. 유독 알려지신 바가 없지요. 소문만 무성합니다. 그 분께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계신다는 소문은 장군께서도 들어보셨지요?”
군터는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런 소문 중에는 그분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양 같은 것들도 있지만, 무지한 자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은 것들도 있지요. 예를 들면…어두컴컴한 밤에 밤길을 헤매는 영지민들에게 낙인을 찍어 영혼을 빼앗는다거나 하는.”
“어린 아이들이나 믿을 법한 괴담 아닌가.”
“하하. 그렇지요. 그런데…무지한 백성들의 망상일지라도, 꼭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닙니다. 혹 들어보셨는지요? 쿠엘단 전하께서 부리시는 인형들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얼핏 들어보았네.”
군주 쿠엘단이 부린다는 영혼 없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룬차이의 루반다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같은 전설이라고 해도 쿠엘단의 인형은 룬차이의 루반다이보다 훨씬 꺼림칙하고 기괴하게 느껴진다. 영혼 없는 인형이라니. 이야기만 들어도 섬뜩하지 않은가. 전장에서 무명을 드높이는 루반다이는 경외감이 절로 들며,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영혼 없는 인형이 되고픈 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것과 관련된 소문입니다. 영혼을 빼앗기고 인형이 된다니, 어찌 보면 죽음보다 더 두렵지 않겠습니까.”
“인형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예. 아닙니다. 애초 인간을 대상으로 그렇게 했다가는 아무리 쿠엘단 전하시라고 해도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선황 폐하께서 가만히 두셨을 리 없으니까요. 하지만 무지몽매한 백성들 아닙니까.”
제국의 신민들은 여명 교단의 신도다. 그런 만큼 그들은 선황의 가르침을 따르며, 사후에 펼쳐지는 영광된 불멸을 믿는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영혼을 빼앗긴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몸서리쳐지는 공포다.
“소문은 소문을 낳았고, 많은 이들이 헤이모라를 떠났지요. 허황된 소문을 다스리고 영지를 정돈하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지만, 쿠엘단 전하는 그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헤이모라의 중앙에 거대한 탑을 축조하신 후에 그곳에서 거하실 뿐, 영지 내외의 일에는 일체 신경 쓰지 않으셨지요.”
황자의 말이 떠올랐다. 회의가 파한 후, 황자는 군터를 따로 불러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중에서는 쿠엘단이라는 이가 어떤 이인지에 대한 것도 있었다. 황자는 자신이 겪고 느끼며, 생각한 바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도 절대 자신의 말을 믿지는 말고 그저 참고만 하라고 조언했다.
‘네가 직접 보고 느껴라. 내가 보는 것과 네가 보는 것이 다를 테고, 그에게 있어 나와 너는 다른 존재일 테니 대한 방식이나 태도 역시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황자가 이야기해준 것 중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군주 쿠엘단은 자신이 관심 있는 것 외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무심함 그 자체다. 그 자는 자신의 영지 바로 앞에서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움직이라는 황명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자신의 음산한 궁전에 박혀서 지식의 탐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두 황자의 사견이었고, 그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듯 그저 참고만 하면 그뿐일 테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는 쿠엘단이라는 자의 특징을 말해준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 자 역시 나와 같은 건가.’
황자가 말했다. 그들(군주들)처럼 되지 말라고. 그런 괴물이 되면 죽이겠노라고 경고했었다.
제국의 군주들은 신을 품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못해도 백 년 이상을 살아왔으니, 잠식이든 침식이든 완전히 됐다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
* * *
테리브란을 떠나 헤이모라로 가는 길 내내 현지의 호위 병력이 따라붙었다. 동부 5개 주는 본래 2황자의 세력이었으나 7황자가 전쟁에서 승리하며 그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병합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큰 저항세력은 모두 토벌했다지만 아직까지도 작은 위협은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때문에 사절단이 이동하는 동안 현지에서 준비한 호위 병력이 그들을 호위했다. 그러다 주의 경계를 넘어서면 그때까지 호위하던 병력은 물러나고, 미리 주 경계에서 대기하고 있던 새로운 병력이 호위 임무를 인계 받았다.
“군터 장군을 뵙습니다.”
오젠과 판니른의 주 경계를 넘었을 때, 이천의 호위군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던 무장이 군터에게 깍듯이 군례를 취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헤이모라는 판니른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사실 오젠에서 바로 남하해도 되는 일이었으나, 처음부터 보다 안전하게 움직이라는 명이 있었기에 판니른을 거쳐서 이동하는 것으로 길을 잡았다.
“요 근래 판니른의 상황은 어떻소?”
파시 리즈레가 무장에게 물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잠적했던 2황자의 추종 세력도 거의 뿌리를 뽑았고, 남은 것은 전란을 틈타 몸집을 키운 도적들뿐입니다.”
“도적들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탈영병들이겠지?”
“아무래도 그렇지요. 전쟁 막바지에 탈영하여 전선을 이탈한 자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쉽지 않겠구려.”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 거점에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숨어 있는 놈들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판니른은 동부의 심장이 아니오. 하루빨리 예전의 그 비옥함을 되찾아야할 것인데.”
“곧 그리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소장과 같은 이들이 발 벗고 뛰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하. 믿음직스럽군.”
파시 리즈레도, 호위 병력을 통솔하는 장수도 귀족이었다. 같은 귀족이어서 그런지, 그들은 제법 통하는 것 같았다. 별 것 아닌 대화를 중요한 대화인 척하며 주고받고, 별 것 아닌 것에도 서로를 추켜세우며 웃었다. 군터는 그들의 대화에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들도 굳이 군터에게 어렵게 말을 붙이지는 않았고.
“여기서부터 헤이모라입니다.”
작은 산 하나를 지나니 탁 트인 평야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장은 여기까지입니다. 장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돌아갈 때도 판니른을 거쳐 돌아간다. 그러니 호위 병력 역시 대기하는 것이 당연.
“후우. 이곳이군.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직접 오게 될 줄이야.”
파시 리즈레가 긴장이 되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가지.”
헤이모라의 경계를 지나는 순간부터 군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은근히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압박감이었다. 태평하게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파시 리즈레를 보면 이런 느낌은 그 혼자만 받고 있는 듯했다.
‘저주인가?’
어쩌면 쿠엘단이 수작을 부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정체 모를 현상에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이틀이 지나고, 군터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를 압박하는 이 정체 모를 현상이 무엇인지를.
‘이 땅이, 나를 거부하는 거다.’
정신을 집중하니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흐름이 느껴졌다. 하늘로, 땅으로, 모든 곳으로 이어지는 작고도 거대한 흐름. 그 흐름은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 깔린 구름 한 점, 땅에 자란 풀 한 포기, 심지어는 그 위를 걷는 말과, 그 위에 탄 사람까지도 모두 그 흐름에 속해 있었다. 오직 하나, 군터 자신만이 그 흐름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흐름에게 배척받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 군터는 내내 불쾌함을 느껴야 했다. 영문도 모르고, 어찌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거북한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길을 재촉하는 것뿐이었다.
“저곳이군요.”
닷새는 걸릴 거리를 사나흘에 주파했다. 그런 강행군 끝에, 그들은 마침내 크지 않은 도시와, 그 도시 한 가운데 우뚝 솟은 탑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쿠엘단 전하의 궁전입니다.”
저 미적 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높기만 한 흉물스러운 탑이 그의 궁전이다.
군터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