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화
벨리사를 위해 영약을 구하라고 명을 내린 군터였다. 하지만 채 며칠도 되지 않아 그에 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남쪽에서 날아온 급보 때문이었다.
“미친놈.”
고위 관리, 귀족들이 모두 참석한 대전 회의. 옥좌에 앉은 황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상스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이자, 황좌의 주인을 자처하는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의 언사를 지적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역시 할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은 소리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모자란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형편없는 얼간이일 줄이야.”
“고의라고 보십니까?”
“당연하지. 놈이 일부러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아바시스 놈들이 어찌 대협곡을 넘었겠나.”
제국과 아바시스를 잇는 몇 안 되는 주요 길목 중 하나인 대협곡은 현재 13황자 아말로페 트라소프의 권역이었다. 사실,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권역이었다. 아말로페 엘 트라소프가 차지한 다섯 개 주가 모두 제국의 남부에 위하고 있었다. 제국의 남부라고 할 만한 주들 가운데 그의 권역이 아닌 곳은 27황자 바라눔 엘 트라소프가 차지한 바사드 주 뿐.
“뚫린 곳도 하필이면 대협곡이지. 이건 나를 노리고 벌인 일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침음을 흘리며 동의를 표했다.
2황자 바라누르 엘 트라소프를 물리치며 그의 권역을 흡수했고, 아직도 하고 있는 7황자였다. 온전히 병합이 끝나고 나면 제국의 37개 주 가운데 12개 주가 수중에 들어오는 셈이고, 이는 제국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아직까지도 중립을 외치고 있는 주들이 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상 남은 경쟁자인 27황자와 13황자를 압도하는 규모다.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거지.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려서라도 말이야.”
이해한다. 허나 방법이 잘못 됐다. 차라리 서쪽에 웅크린 무식한 형제와 손을 잡고 덤볐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세를 끌어들이다니? 그것도 저 아바시스 놈들을.
“이것은…자충수입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던 간에, 13황자는…….”
“황자라 부르지도 마라! 반역자 놈일 뿐이다!”
“옛. 그 반역자는 무엇도 얻지 못할 것이며, 식자와 중립 주들의 적개심을 살 것입니다.”
“그래. 누구라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미친놈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그런데도 저질러버렸어. 왜일까? 미친놈이라서, 라는 말은 하지 말라.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정신 나간 대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이성을 동원해 추측을 하자면, 일단 13황자와 아바시스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거래라는 것은 아마도, 제국의 국토나 이권 일부를 아바시스에 넘겨주는 대가로 경쟁자들을 없애거나 견제해주는…그런 식의 거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쯤은 노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황자 역시 생각하고 있을 터. 어차피 지금 떨어진 황자의 물음은 진지한 것이 아니다. 그저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뱉고 있는 것일 뿐.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는 반역입니다. 마땅히 각지의 총독과 성주들에게 알려 반역자를 징치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27황자에게도 말입니다.”
“흥미로운 생각이군.”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비틀어진 그의 입매는 풀리지 않았다.
“허나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닌가? 반역자 놈이 자기가 반역을 저질렀다고 토설이라도 하겠나? 잡아떼면 그만 아니겠나.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 아무리 해봐야 몰아가기 정도 밖에 안 돼.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국경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놈의 무능함이지 역심이 아니야. 또, 생각 있는 자라면 당연히 반역자 놈이 역적질을 했다는 것을 알겠지만 지금까지 중립을 외치며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자들이 진정으로 내전에 피를 흘리기 싫어 발을 뺀 것이라 보나? 여기도 끼지 못하고 저기도 끼지 못하는 겁쟁이거나 기회주의자인 놈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놈들이 과연 움직이란다고 움직일까?”
신랄하지만 그 말 그대로였다. 대외적으로 대협곡은 열린 것이 아니라 뚫린 것이다. 아바시스의 병력이 대협곡 쪽 국경을 돌파한 것이다. 13황자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패퇴했다. 대외적으로는 말이다.
“판세를 흔들어보려는 수작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이건 너무 과해.”
아바시스가 어디인가. 선황이 한창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을 당시부터 끝없이 제국과 충돌해온 적대국이다. 제국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적이라 불릴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국가인 것이다.
헌데 황좌를 노린다는 자가, 제국의 황실혈통을 이었다는 자가 그런 적국과 손을 잡아? 언어도단이다.
“아바시스군을 이끌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진 것입니까?”
“아니.”
대협곡을 돌파한 아바시스군은 그대로 그곳에 눌러앉은 듯했다. 제국의 수비군을 몰아내고 그 천혜의 요새를 차지한 것이다.
“길목을 확보했으니 조만간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겠지.”
그때가 되면 본격적인 전쟁이다. 지금도 전쟁이 일어났다고 봐야 할 상황이지만, 제국은 아직 제대로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못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제국은 본래 오직 황제의 명 아래 단결하여 움직였다. 절대적인 하나의 존재 아래 모든 것이 복종한다. 그것이 제국의 체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절대적인 중심점이 되어야 할 황제가 부재중이다. 세 명의 황자가 하나뿐인 황좌를 노리고 각기 세력을 확보하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 이런 판국에 연합이니 협력이니 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그들에게 그런 제국을 위하는 숭고한 대의가 있었다면 내전이 지금까지 이어져오지도 않았을 터.
“반역자 아말로페가 궁지에 몰리기는 했었지요. 아군이 동부까지 진출하면서 그 자가 세를 넓히는 데도 제약이 걸리는 형국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말로페 트라소프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전쟁을 시작하던가, 아니면 7황자나 27황자 중 한 명에게 숙이고 들어가던가.
그런데 이 터무니없는 작자는 선택지에도 없던, 선택지라고 할 수도 없던 다른 것을 택했다. 제국의 황족으로서의 자부심마저 저버리는, 그야말로 역겨운 짓거리를 저질렀다.
“그렇지만…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짓이다. 상식적으로 아말로페 트라소프가 아바시스에 붙을 이유가 없다. 아바시스가 무엇을 약속했건,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바시스가 그의 손을 잡고 제국을 정복한 다음 자그마한 영토를 떼어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적당히 왕 정도에 봉해주겠다고 했다 치자.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그 약속을 지킬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정복한 땅을 탐할 고위시민들이 아바시스에 넘쳐날 텐데, 쓸모가 다한 적국의 황자를 그대로 둘 필요가 있을까? 제국황족은 존재 그 자체가 더없는 후환덩어리인데 말이다.
만약 아말로페 트라소프가 더 이상 자신은 황좌의 전쟁에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권력욕에 눈이 뒤집힌 형제들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차라리 자신의 세력을 해체하고 그 자신은 교단에 들어갔어도 될 일이다. 교단에 정식으로 성직을 받고 들어간다면 설령 남은 둘 중에 누가 황제가 되더라도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비록 교단의 성직자가 되면 트라소프라는 이름을 포기해야 하니 황자였을 때 누리던 막강한 권력과 사치스러운 삶은 잃게 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지위는 보장받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제국에서 세 번째로 황좌에 가까운 위치까지 갔던 이로서 만족스러운 선택지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정말 그가 막다른 곳에 몰렸다고 생각했다면, 분명 이성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고를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그러니까, 아바시스를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어느 면에서 봐도 훨씬 더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거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을 마다하고 그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최악을 택했다. 아말로페 트라소프가 세상에 다시 없을 머저리가 아닌 이상,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석연치 않아.’
하여 황자는 의심을 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잠시 그를 지배했던 당혹과 분노가 점차 사라지면서 의심은 더욱 강해졌다.
“이런 시기에 군주들께서 나서주시면 좋으련만.”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한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황자의 시선이 그 말을 중얼거린 이를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후덕한 인상의 귀족은 당황하여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황자의 눈은 정확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의 말이 옳다. 군주들은 선황과 제국을 수호하기로 맹약을 맺었지. 황좌를 둔 지금 같은 때야말로 그들이 나서야 할 적기가 아니겠는가.”
“전하. 그 말씀은…….”
“마침 나의 권역에 칩거하고 있는 군주가 있지 않은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분께서…움직이시겠습니까?”
다른 이였다면 이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상대가 상대다. 베이고르를 정복했던 까마득한 과거 이후로 그는 자신의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군터 장군.”
“예.”
군터가 부름에 답했다. 회의가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던 그였다.
“헤이모라로 가라. 가서 군주 쿠엘단을 만나라. 그리고 내 말을 전해라.”
“예.”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가?”
“알려주시겠지요.”
황자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입을 열지 않고.
[그에게 너를 보내는 이유는 그가 너를 흥미로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는 흥미 없는 상대와는 마주하지 않아.]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릿속을 울리는 의성.
군터 또한 같은 방식으로 답했다.
[무엇을 전하리까.]
[멍청한 놈을 충동질한 배후. 그 배후가 이 난장을 피우는 저의.]
[그 두 가지입니까.]
[그래. 허나 이 일은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무슨 뜻이신지.]
[침식, 아니 잠식인가. 무엇이 됐든, 너의 상태에 대해 그에게 물어봐라. 네가 그의 흥미를 끌 수 있다면, 그리고 약간의 호의를 살 수 있다면 그가 네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군터는 잠시 침묵했다.
[네 상태가 전보다 더 위태로워진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널 도울 수 없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널 도울 수 없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