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보리스는 그의 수하들과 함께 테리브란으로 들어섰다. 앞장서서 걷는 보리스의 등에는 커다란 검 한 자루가 매여 있었다.
“됐다. 이만 다들 물러가라.”
“예. 허면 엿새 뒤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래. 엿새 뒤에 보도록 하지.”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 마중 나오겠다고 했지만 보리스는 거부했다. 수하들에게 ‘대장 보리스’가 아닌 ‘장군의 아들 보리스’로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리스 역시 ‘군터 장군의 아들’이라는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를 다 지워낼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왔느냐.”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간만에 만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보리스는 부친의 집무실로 향했다.
“파헨델은?”
“별 일 없었습니다. 살라스님께서 문제없이 요새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몇 번이나 똑같이 반복했던 형식적인 대화. 기계처럼 묻고, 기계처럼 답한다. 보리스는 부친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답답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부친과 단 둘이 마주보고 있으면 속이 답답해지면서 되도록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일까. 전에는 이러지 않았었다. 어렵고 무섭기는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부친은 변했다. 이전부터 그를 알았던 모두가 그것을 안다. 그들 대부분은 그 변화에 적응했지만,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일부는 그러지 못했다. 보리스도 그 중 하나였다.
비록 무뚝뚝했으나 그래도 세상에 하나뿐인 아버지다. 말이 없어도,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다 커서 애나 할 법한 투정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의 마음은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고 있다.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냐.”
그의 집안은 장군가다. 비록 아직 부친인 군터가 귀족이 아니기는 하지만, 적포장군의 지위에다 황자의 신임까지 얻고 있는 터라 귀족 가문이 되는 것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장군가의 독자. 그것만으로도 사윗감으로 부족함이 없는데 배경을 제외하고 봐도 보리스는 꽤나 유망한 젊은이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딸을 가진 이런저런 가문들에서 한 번씩 찔러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생각 없습니다.”
“원치 않는다는 뜻이냐?”
“예.”
원한다면 진작부터 사교계에 발을 디딜 수 있었으나, 보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가식으로 무장하고 웃음으로 상대를 베고, 찌르는 가면의 전장 따위.
무도회도, 연회도 참석하지 않는 보리스였기에 당연히 이름 있는 가문들의 여식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름이야 얼핏 듣는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얼굴이나 성품 같은 것은 전혀 몰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니. 장군의 아들로서 나름대로 자각은 있는 보리스였지만, 그래도 역시 내키지 않았다.
“허나, 가문에 필요한 일이라면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컸다고 건방진 말을 하는구나.”
“…….”
“필요치 않다. 네 이름으로 혼담이 들어왔기에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친은 이런 쪽에 심할 정도로 무심했으니까. 군부에서 손꼽히는 지위에 올라있음에도 당신의 정치적 역량을 늘리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군부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이면서 권력에 관심이 없다니, 남들이 들으면 웃기지 말라고 할 테지만…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혼담…하니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만, 신경 쓰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실비에게도 이야기가 들어왔다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수로만 따지면 너보다도 많지.”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았지 않습니까.”
“흔한 일이지 않느냐.”
목적을 갖는 혼인에 늦고 빠르고는 없다. 이제 갓 솜털이나 가셨을까 싶은 소년과 늙은 미망인이 혼인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실비아에게 혼담을 넣은 이들 중에는 군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귀족도 있다. 이쪽 세계에서 그런 것은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혼인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이 맺어지는 동맹이기 때문이다.
흔한 일이다. 그래.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구역질이 나오는 것은 보리스가 태어날 때부터 장군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어볼 생각이다.”
“실비에게 말입니까?”
“그래.”
당연히 부친이 그리 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허면,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짜증나는 이야기를 들었더니 속이 뜨끈해졌다. 연무장으로 가 새로운 검이나 실컷 휘둘러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연무장에 가니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이가 있었다. 자그마한 몸으로 목검을 난잡하게 휘두르고 있는, 숙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앳된 모습의 여인.
“뭐하고 있는 거냐?”
“보면 몰라? 검술 수련하고 있잖아.”
“수련?”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를 본 실비아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지려하자 보리스는 재빨리 입 꼬리를 내렸다.
“갑자기 검술은 왜?”
“갑자기가 아니야. 시작한 지 꽤 됐어.”
꽤 됐다고? 그렇다면 이제껏 들은 적 없었던 것이 말이 안 된다. 종종 오는 모친의 서신에는 실비아가 검을 쥐고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 쓰여 있지 않았었다.
“그래? 얼마나 됐는데?”
“한 달.”
몰랐을 만하다. 보통은 한 달을 ‘꽤 됐다’고 표현하지는 않으니까.
“왜 검술을 익히려는 건데?”
“내 몸을 지키려고.”
이건 좀 뜻밖의 대답이다. 동생에게 괴짜 기질이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런 대답은 짐작도 못했다.
“으응? 뭘로부터?”
“세상의 온갖 위험한 것들.”
“무슨 소리야?”
“성인이 되면 세상을 돌아보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험하니까, 내 스스로 내 몸을 지킬 줄 알아야겠지.”
“하아.”
동생이 이상한 것에 빠지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실비아는 매년, 아니 몇 달에 한 번씩 별 희한한 것에 빠지곤 했었으니까. 미신, 물건, 취미, 등등. 가장 황당했던 것은 테리브란의 지하에 괴물이 산다며 호위병들을 이끌고 지저분한 지하 수로를 닷새 동안이나 들락거렸던 일이다.
아무튼, 이 평범하지 않은 여동생이 이번에는 여행에 꽂힌 모양이었다. 그 일환으로 검술까지 손을 댄 모양이고. 그래도 한 달이면 꽤 의지가 단단하기는 한 모양인데…….
“손 좀 보자.”
“응?”
의아해 하면서도 선뜻 손을 내미는 실비아. 조금 전까지 목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슬쩍 살핀 보리스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이 되었다.
‘설렁설렁 놀면서 한 모양인데.’
검을 쥔 손에 굳은살이 거의 없다. 어쩐지 막무가내로 휘두른다 싶더니, 제대로 배운 것도 없이 어설프게 허공에 대고 몇 번 휘둘러 본 게 전부인 모양이다.
‘신경 쓸 필요도 없겠군. 금방 끝나겠어.’
전에도 그랬다. 항상 그랬다. 실비아의 괴상한 취미, 혹은 흥미들. 개중에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장난을 넘어서는 수준의 것들도 있었지만 보리스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원체 활달한 성격인데, 그런 실비아에게 모친이 딱딱한 예법이나 여인으로서 갖춰야 할 것들을 강요하니 어떤 식으로든 화가 쌓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핏줄로 태어난 이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보리스는 이해했다. 모친도 이해했다. 부친은…이해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실비아의 갖은 기행에도 그냥 고개 한 번 끄덕이며 ‘그러냐’ 하며 넘겼다.
‘그렇게 헛짓거리를 수 없이 하면서도 시키는 공부는 또 한단 말이지.’
실비아가 큰 꾸지람을 듣지 않고 지금까지 기행을 계속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물론 병사들까지 데리고 지하 수로를 닷새 동안 들락거리며 몸에 지저분한 냄새를 달고 다녔을 때는 참다못한 모친이 따끔하게 혼을 내기는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실비아가 그렇게 몸에 오물 냄새를 묻히고 다닐 때조차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무슨 책을 본 거야? 요정을 사랑한 용? 바다 정글의 신비한 사슴?”
“그런 거 아니야.”
“아, 그래?”
“응. 그런데 오빠. 그거 알아? 제국의 밑에는 아바시스라는 거대한 나라가 있대. 거기서 더 내려가면…….”
책을 본 것이 분명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에 대해 이것저것을 줄줄이 써 놓은 책이겠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신기하고 대단한 것이 많은지를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장황하게 써 놓은.
‘세계라.’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다. 제국만 해도 얼마나 넓은 것인지 제국전도(帝國全圖)를 봐도 감이 안 잡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세계를 논한다면 그저 아득할 뿐이다.
미지는 항상 두려움, 혹은 흥미의 대상이다. 이런 것은 명확히 후자에 속하는 주제이고.
“아. 그래. 들어본 적 있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 안 해봤어?”
“음…글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그랬다. 한때는 그런 호기심에 즐거워하던 때도 있었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막연한 것을 생각하기보다 보다 가까이 있는 눈앞의 것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계를 돌아본다느니 하는 것은 허황된 망상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궁금하잖아. 해가지지 않는 산이라던가, 보석이 자라나는 연못이라던가, 신기한 것들이 너무 많아.”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있다고 확인이 된 것은 아니지. 그냥 책에 그렇게 쓰여 있을 뿐.”
“없다고 확인된 것도 아니잖아?”
보리스와 실비아는 연무장 한편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주로 실비아가 자신이 책에서 본 신기한 이것저것들에 이야기하고, 보리스가 들어주는 식이었다.
오랜만에 만났다지만 사실 정기 휴가를 나올 때마다 봤던 터라 그렇게까지 반가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실비아는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신나서 떠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말동무가 없기 때문이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근래의 가벼운 흥미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상대조차 없다. 실비아에게는 오라비인 보리스가 유일한 말벗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친인 벨리사가 실비아와 자주 시간을 보내지만 그녀는 딸의 친구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지만, 실비아가 원치 않는 것을 실비아에게 강요하면서부터 실비아는 모친에게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그들의 관계는 전과 달라졌다.
“친구들 사귀었다면서? 그 애들은 안 만나?”
“친구 아니야.”
“친구라면서?”
“별로더라고.”
“너랑 안 맞는다는 거지?”
“짜증나게 하잖아.”
“구체적으로?”
“하인들을 열 명 넘게 데리고 다니면서 심심하면 욕하고 때려.”
“오.”
“그러면서 하는 얘기라고는 어느 가문의 누가 잘생겼다더라, 누가 무슨 예쁜 뭐를 샀다더라 하는 것뿐이야.”
“너랑은 확실히 안 맞네.”
“그렇지?”
“음.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야.”
“그럴 수 있을까? 어머니가 만나보라고 하는 애들은 다 별로야.”
“뭐, 그건 나도 그랬어. 하지만 지금 나는 친구를 사귀었지. 내가 원하는 좋은 친구를.”
“우슈무르?”
“성만 부르는 건 어디서 배운 못된 버릇이냐.”
“아, 미안. 걔네들하고 몇 번 어울리다 보니. 그…전에 말했던 자밀? 우슈무르 가문의 후계자 맞지?”
“그래. 그런데 이젠 후계자라고 하긴 뭐하지. 지금은 그 녀석이 우슈무르 가문의 가주나 마찬가지야.”
“백부장이라며?”
“그래.”
“그런데 어떻게 귀족 가문의 가주가 돼? 고작 백부장인데?”
“이 오라비도 백부장이다만?”
“응. 그러니까.”
“…….”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슬슬 화가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예전, 키가 그의 허리에나 간신히 오던 때의 동생은 무척이나 귀여웠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한 것일까.
(다음 화에서 계속)